< 생각보다 더 >
“그렇다면 사방이 적이군요.”
“네, 회장님. 쇼핑몰도 겉으로는 정부에서 압박한다는 핑계를 대고 있지만, 속으로는 제도를 응원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나저나 이상한 일입니다. 출시 날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굳이 함께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장소까지 이래 버리면 제품이 훨씬 더 비교되고
경쟁력이 떨어질 텐데?”
“한국에서는 휴일이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한강을 간다든가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브라질 사람들은 쇼핑몰로 온다고 합니다.”
“쇼핑몰이 피서지라도 되나 보네요.”
“네. 브라질 사람들은 휴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쇼핑몰에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인 문화랍니다.”
이제야 이해됐다. 우리는 지금 브라질의 수도인 브라질리아에서 가장 큰 쇼핑몰에서 행사를 준비 중이다. 이러니 당장 이보다 더 좋은 행사장은
브라질에 없는 셈이었다.
‘우리 회사 마케팅 부서가 정말 일을 잘하긴 잘하는구나.’
나는 그냥 미국에서도 비슷하게 행사를 했으니 브라질에서도 쇼핑몰로 잡은 줄 알았는데, 나만 몰랐을 뿐 제도의 전략에 맞서서 우리도 수를 마
련했던 것 같다. 다만, 정부와 쇼핑몰이 공공연하면서도 티 내지 않는 압박으로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가 될 줄은 미처 몰랐지만 말이다.
“사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냥 저들은 신경 쓰지 말고 우리는 우리 할 것만 합시다.”
어차피 같이 공개하면 처참하게 박살 날 것이다. 두 제품은 애초에 경쟁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울 정도로 엄청난 격차를 가지고 있다. 스펙을 간단
하게 비교하자면 신흥시장을 위한 저가형 G 크로스의 가격은 89달러, 제도는 129달러다.
가격 경쟁력에서부터 승패가 명확했다.
그렇다면 성능은 어떨까?
무려 20배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
콘텐츠는?
워쳐부터 시작하여 G 크로스 더 거론해봐야 입이 아플 정도지만, 제도는 달랑 5개의 게임을 가지고 출시했다. 그리고 그조차도 GF가 삼 개월만
가볍게 개발하면 비슷한 수준으로 20개 이상은 찍어낼 정도의 저품질 게임이었다.
‘제도가 망해서 사라질 때까지 출시된 게임 용량을 다 합쳐도 500Mb가 안 됐으니 말 다 했지. 하물며 본래보다 1년을 앞당겼으니 성능은 오죽
하겠어.’
그러나 애국심과 자국 기업에 대한 자긍심 버프는 이런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우리 행사를 준비하는 직원들의 사기 저하와 어수
선함과 달리 제도의 직원들은 ‘해볼 만 해!’라는 기운을 뿜어내며 패기만만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뭔가 찜찜한데. 이놈들이 페어플레이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
자고로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다.
준비해서 나쁜 건 없다.
“김 실장님. 굳이 우리가 하는 모든 마케팅을 쫓아다니면서 훼방을 놓고 있는 놈들입니다.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지요.”
“저들이 행패를 부릴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행사를 방해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간단하게 이곳 쇼핑몰과 몰래 협력하면 우리 행사장으로 이어지는 전기만 따로 차단할 수도 있다.
뜻하지 않은 사고라고 둘러대면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정전이 5분만 이어져도 우리는 G 크로스의 성능을 보여주기는커녕 치명적인 피해를 보
게 된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돌다리도 두들겨서 건너는 심정으로 빈틈없이 준비했다. 유사시에 대하여 만반의 준비를 한다.
이윽고 2시간여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행사장 주변에 제법 많은 아이가 행사의 시작을 기다리며 모여들었다.
“본격적인 시작이군요.”
세팅된 화려한 게임기와 디스플레이들.
그 안에 게임 화면이 나타나자 신이 난 아이들이 게임기 앞으로 달려들었다. 일단 당장 지금까지는 아이들의 눈에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상품은
G 크로스보다 제도였는데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확실히 디자인은 제도가 낫습니다.”
다양한 기능 때문에 디자인에 제약이 많은 G 크로스.
반면에 제도는 뜯어보면 정말 간단한 기판이 존재할 뿐이다. 솔직히 제도는 콘솔기기 동호회 수준만 되어도 뜯어보고 바로 복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조악한 기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니 디자인에 제약받을 것도 없었고 덕분에 외관만으로는 굉장히 미려해서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비단 G 크로스만이 아니라 ZBox,
게임 스테이션 등등 어떤 콘솔이라고 해도 디자인만큼은 제도가 압도적이었다.
[와아! 이거 게임기예요?]
아이라면 게임기라는 존재 앞에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재밌게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마냥 웃음이 날 뿐
이다. 그런 아이들의 반응에 힘입어서 두 기업의 직원들은 동시에 아이들을 확실하게 자극할 수 있는 게임들을 구동시켰다.
여기서부터 실체가 드러난다.
‘쯧쯧. 하필이면 똑같은 게임이냐.’
이런 행사에서 가장 분위기를 과열시킬 수 있는 게임이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빠르게 경험하고 빠르게 순환될 수 있는 게임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게임을 고르면 대전 게임으로 한정된다. 단 몇 분 만에 승부가
갈리고, 패자는 다른 사람에게 조이패드를 넘기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시스템이라서다.
대전 게임만이 갖는 이런 장점은 누구나 알 수 있으니 제도에서도 같은 장르를 준비하리라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전 게임이라는
분야에서도 하필이면 똑같은 게임을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태권.
3D와 2D 전부를 다 합쳐서 가장 사랑받는 대전 게임!
아들을 절벽 밑으로 던지고 기어서 올라온 자식이 아비를 절벽 밑으로 밀어버리는 막장 가족과 수습 불가의 설정 충돌로 괴이하게 시리즈를 이
어나가게 되는 세계가 사랑한 놀라운 게임이다.
‘스토리의 개연성 따위가 대전게임의 인기랑은 크게 상관없다는 걸 보여준다고 봐도 되려나.’
PC방의 등장으로 한국에서는 오락실이 처절하게 몰락했다. 반면에 브라질에서는 여전히 오락실이 성행하고 있다. 그러니 태권이라는 게임은 아
이들의 눈에 꽤 익숙한 게임이었고 오락실에서만 보던 게임을 집에서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赴? 조이패드 쟁탈전에 빠지도록 만들
었다.
[우와! 이거! 우리 브라질에서 만든 게임기 맞아요?]
[우리 브라질도 이제 이런 게임기 만드는 거예요?]
[그럼 우리 엄마한테 게임기 사달라고 해도 되는 거죠?]
[브라질 게임기니까! 브라질 엄마라면 당연히 사주겠죠?]
브라질의 언어는 포르투갈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 대화를 알아들을 방법이 없었다. 가벼운 말 정도야 영어와 은근히 비슷한 느낌의 단어
들이 많아서 느낌으로 알 수 있었지만, 대화가 길어지거나 복잡해지면 전혀 알아들을 길이 없다.
그래도 아이들이 어떤 반응인지, 어떤 기분인지, 어디에 열광하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어휘 대신 ‘우와!’ ‘이야!’라면서 온몸으로
표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면 속의 멋진 게임 영상을 따라서 우리 행사장에 있던 아이들에게 날벼락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브라질에서 만든 건 맞는데 브라질에서 개발한 게임기는 아니란다. 브라질에서 개발한 게임기는 저기 옆에 있는 제도거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린 오리 떼처럼 반대쪽을 본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에엑? 저거요?]
[싫어요! 저건 아니에요!]
[저딴 걸 누가 해요!]
[어허! 브라질 사람이라면 자랑스러운 브라질의 제품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우선 제도부터 해보는 게 어떠니?]
[그··· 그치만···]
[자랑스러운 브라질 게임을 해보지도 않고 욕하려는 거는 아니지?]
[우으으···]
여기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 장소에서 안내 중이었는데 죄다 우리 직원에게 질문한 아이들이 꼭 제도 쪽 행사장을 한 번 이상 쳐다보고는
괴상한 소리를 지른다는 점이었다.
‘저 자식들이 뭔가 이상한 수를 부린 거 같은데?’
우리 직원들이 제도에게 매수당한 것은 아닐까? 싶은 합리적 의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 게임을 즐기러 왔던 아이들이 제도의 행사장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의심에서 확신의 단계로 넘어갔다.
“대단하네. 이런 식이면 현지인을 전혀 쓰지 말라는 소리인가?”
시스템이나 전력 등의 것들로 훼방을 놓을 수 있다는 예상은 했다. 그러나 설마 사람을 매수했을 줄은 몰랐다.
“김 실장님도 보고 계시죠?”
“······.”
대답이 없었다. 왜 그러나 싶어 김유천 실장을 보니 섬뜩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저러다 피 보는 거 아닌지 몰라.’
우리 직원들이 아이들을 제도의 행사장으로 보내는 현장.
이를 노려보는 김유천 실장은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는지 모르는지 윗니가 아랫입술을 꽉 짓누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셌으면 피가 줄줄 흐를 정
도였다.
“회장님. 잠시 자리 좀 비워도 되겠습니까?”
정말로 사람이 매수되었고, 그 때문에 우리가 우리 돈을 주고 고용한 직원들이 오히려 경쟁상대를 위한 호객행위를 하는 거라면 이대로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화가 나고 바로 상황을 파악하여 관리자들에게 대응하도록 조치하는 게 맞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직원들의 행동 때문에 그러는 거 맞죠?”
“네. 저 씨발··· 죄송합니다. 저 녀석들이 지금···”
“화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굳이 안 가 봐도 해결될 수준이고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회장님.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알아요. 아주 심각한 문제가 맞습니다. 그러니 몰래 지켜보면서 누가 매수당한 직원이고 누가 아닌지를 확실하게 파악해둬야 합니다.”
뒤이어 냉철함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을 알려주었다.
“잠시 저쪽의 아이들을 보시겠습니까?”
“아이들이요?”
G 크로스를 체험하러 왔다가 직원들의 말을 듣고 제도의 행사장으로 빠져나간 아이들은 입술을 삐쭉 내밀고 후회스럽게 우리 행사장을 보고 있
었다.
[씨이-! 재미없어!]
[이게 뭐야? 꼬졌어!]
[이상하고 다 옛날 거만 나와. 저쪽 게임기는 요즘 오락실에서 할 수 있는 건데!]
[엄청 이상하게 생겼어. 이런 건 브라질 아니야!]
[우리나라 게 최고 랬었어. 근데 이건 나빠!]
[저쪽이 브라질이야! 이건 아니야!]
[맞아. 저거 하러 갈래!]
제도와 G 크로스.
두 게임기 모두 동일한 대전 게임인 태권이다. 그러나 제도의 태권은 고전 중에서도 고전인 태권2로서 1995년에 발매된 게임이었다.
‘아니지. 가정용으로 계산해야 하니까. 1996년으로 보는 게 맞겠네.’
1년 봐줬다.
그런데도 제도가 가진 고질적인 용량 문제 때문에 원래의 성능을 보이지도 못했고 열화 판으로 동작했다.
반면, G 크로스는 어떤가?
2006년에 출시된 태권5였다.
‘이것도 운 좋은 줄 알아야 할걸?’
원래는 작년 말에 출시된 여섯 번째 시리즈를 가져오고 싶었지만, 당장 그것을 가져오는 것은 소미와 마이크루에게 대놓고 전쟁 선포를 하는 것
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태권5를 준비한 것이었다.
최신 게임보다 딱 발매 시기는 1년의 차이인 게임.
즉, 이쪽은 충분히 요즘 게임처럼 즐길 수 있는 게임인데 제도에서는 한참 옛날로 불리는 고전 게임을 가져왔다. 애국심을 몇 드럼 들이부어도
이 차이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다.
그러자 행사장의 직원들이 발 빠르게 대응했다.
[하하하! 얘들아. 그럼 이건 어떠니? 너희들 축구 좋아하지?]
[축구요?]
[물론이죠!]
세계에서 축구로 가장 유명한 브라질! 삼바 축구라는 말로 구구절절 첨언할 필요가 없는 국가다. 당연히 이곳의 남자들은 아이고 어른이고 축구
를 사랑한다. 바로 이 핵심 콘텐츠로 아이들의 떠나려는 관심을 붙잡은 직원이 게임을 재빨리 바꿔버렸다.
“오호. 이번에는 나름 최신 게임이 등장하네요.”
FIFA 2008.
스포츠 게임계의 명가인 일렉트릭 아츠에서 개발한 축구 게임으로서 작년에 출시된 게임이었다. 그런 내 말에 김유천 실장이 분노에서 벗어나서
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최신 게임이라는 말씀입니까?”
“최신 게임이잖아요.”
“저게 어딜 봐서 최신 게임입니까?”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말이 최신 게임이지 실제 눈에 보이는 저 게임은 절대 다른 콘솔에서 발매한 피파 2008과 동일한 게임
이라고 볼 수 없었다.
‘2001도 저거보다는 그래픽이 좋았겠다. 어째 저런 식으로 그래픽을 빻아 버렸다냐.’
< 생각보다 더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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