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보다 더 >
*
2008년 6월 11일.
E3가 열리기 한 달을 앞둔 이 시점에 GF 콘 행사를 잡았다. 때는 바야흐로 무더위를 상징하는 여름의 문턱 아니겠는가. 일기예보에서는 ‘예년보
다는 선선한 날씨’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조금도 선선하지 않은 날씨였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는 개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뚜렷한 자랑스러운 우리나라···라는 식으로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었는데 성인이 된 지금 떠올리면 그것만큼 웃긴 것도 없
는 것 같다. 애당초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는 전혀 특별하지도 않을 만큼 부지기수이고 고작 그런 것에 자긍심을 느끼는 것도 난센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절 변화가 뚜렷하리만큼 변화무쌍하면 그게 더 적응하기 어려운 일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자질구레한 건 다 떠나서, 나한테는 그냥 덜 여름, 엄청 여름, 덜 겨울, 엄청 겨울로만 느껴지는 게 짜증의 근원일 지도 모르고. ···응? 이러
고 보니까 사계절이 맞기는 하네?’
사계절을 부정하려고 마구잡이고 떠올린 생각이 어찌어찌하다 보니 ‘사계절 맞구나!’로 나와 버렸다.
GF 콘 행사 장소는 용산 전자 상가에 위치한 홀이었다. 현황을 확인하고자 나왔는데 내 눈에는 영 눈살 찌푸려지는 광경이 보였다.
“왜 이런 곳으로 잡았습니까?”
소위 ‘용팔이’라는 깜찍한 이미지를 확고히 구축함으로써 떡락 해버리는 한국 전자제품의 메카. 재래시장 이용을 권장하지만 푸근한 정으로 찾
아온 손님의 등을 치는 상인들 탓에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동네 시장이랑 비슷하다.
용산은 시작할 때는 정 붙이려고 애쓰지만, 끝에는 짜증으로 마무리되는 곳이었다.
‘G 크로스도 전자 제품이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긴 하지만, 여기는 손절매하고 싶단 말이지.’
추억 보정을 받아야만 그럭저럭 떠올려볼 만한 장소, 용산!
그러나 지금 내가 불만스럽게 행사장의 준비 과정을 보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노숙자들이 저렇게 있으면 곤란합니다. 도대체 행사장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거리에 나앉은 이들을 깎아내릴 용의는 없으나, 후줄근한 사람들이 선사하는 비주얼 쇼크 이상으로 위생적으로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악취를 풍겨 불쾌감을 증폭시키는 것도 있다.
이런 내 말에 김유천 비서실장이 난색을 보였다.
“회장님. 그게··· 어렵습니다.”
“왜요? 쫓아내면 행사에 찾아와서 행패 부릴까 봐 그럽니까? 그럼 경찰이라도 배치해달라고 요청을···”
“저희 고객들입니다.”
“네?”
“그게··· 저희 초대권을 받고 찾아오신 게이머들입니다.”
조심스러운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무질서하게 간격을 두고 있는 저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자 아직 전반적으로 연령대가 매우 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희가 국내에서 이런 행사를 처음 하는 거라서 고객들이 지레 예상한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리고 입장조차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말이죠. 사실, 그간 미국에서 진행한 행사들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온 건 국내 언론에서도 여러 번 나왔으니까요.”
서울은 미국의 도시들보다 인구밀도가 훨씬 높다. 그러니 텐트 치고 미리부터 대기하지 않으면 체험을 못할까 봐 저리 대기 중이라는 이야기였
다.
“그래도 그렇지, 행사는 내일이잖습니까. 미리 오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맞다. 오늘은 6월 10일이며 아직 저녁도 되지 않은 오후일 뿐이다. 그런데 이미 노숙자와 같은 모습으로 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있는 것이다.
‘얼씨구. 저긴 텐트도 있네. 아이돌 콘서트도 아닌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줄을 서는 데 이골이 난 듯 프로페셔널하게 만반의 준비가 된 이도 있었다. 군대를 두 번 가서 ‘저는 노련하게 훈련했죠.’라고 말하던 어느 연예
인이 떠오를 정도였다.
내심 혀를 내두르며 걸어갈 즈음.
“어이! 거기!”
길가에 퍼져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행사장의 준비를 확인하러 들어가는 우리를 붙잡는 손길이 있었다.
“이봐! 사람들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 줄을 서라고! 줄!‘
“뒤로 가! 다들 먼저 와서 기다리는데 어딜 은근슬쩍 끼어들려고 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쩌렁쩌렁하게 목소리가 울렸다. 분노로 가득 찬 이들의 일갈에 우리 행사의 참가자들이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3초 뒤 그 대상이 바뀌었다.
“이 새끼가 어른이 말하는데 빤히 쳐다···”
“으아악! 이 미친놈아!”
“새치기는 무슨 새치기야! 윤태식 회장님이시잖아!”
“저놈들 입 다물게 해! 우리 회장님을 지켜!”
“아··· 으아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들어가 주세요!”
‘응? 우리 직원인가?’
누군가의 외침 덕에 마구 욕하던 이들마저 급속도로 회개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해서 한창 준비 중인 행사장에 입성할 수
있었다.
‘더운 날씨에 다들 엄청나게 고생하는구나.’
행사 진행이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찾아왔을 뿐이지만, 막상 무더위 속에서 고생하는 직원들을 보니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급
여를 주니 그거면 끝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나 사람 사는 사회에서 어찌 매몰차게 그리 여길 수만 있으랴.
천 마디 말보다도 훨씬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돈으로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다.
“밥 먹고 합시다. 배달 가능한 거로 원하시는 메뉴를 마음껏 시키도록 하세요. 오늘은 제가 쏩니다.”
“우와아!”
“역시 회장님!”
“감사합니다!”
열광적인 환호성이 터졌다. 공짜는 무조건 옳다. 공짜 밥과 마음껏 이라는 단어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진리의 단어였다.
“그리고 밖에서 미리부터 대기 중인 고객들의 인원을 체크하십시오. 다들 우리 행사 참가자분들이니 저분들께도 함께 음식을 배달할 겁니다. 맛
있는 건 같이 먹어야지 않겠습니까.”
“네!”
공짜 음식의 힘으로 충성도 맥시멈에 도달한 답변이 들렸다.
이윽고, 행사장 내에서 울린 환호성이 저 바깥에서도 똑같이 울려 퍼졌다.
- 우오오!
- 역시 GF!
- 회장님은 대인배!”
- 갓겜을 만드는 개발사 회장님은 역시 배포도 달라!
제공해준 음식은 피자와 콜라다. 단, 한 판으로 두세 명이 나눠 먹는 건 인정 못 한다. 1인 1빙수를 즐기듯 개인당 한 판씩 마음 넣고 먹도록 했
다.
- 윤태식 회장님을 국회로!
‘싫어!’
찬양 중에는 함정 카드도 섞여 있었지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6월 11일이 찾아왔다.
내가 행사장 내부에 있었다가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행사장 전체를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곳
에 따로 자리를 잡고 지켜보는 중이다.
“이제 곧 오픈하려나 봅니다.”
마치 좀비 영화에서 생존자가 나타나면 쓰러져 있던 좀비가 일제히 일어나서 맹렬하게 추격해오듯, 텐트까지 치고 농성하던 고객들이 모여드는
모습이다. 굳이 행사장의 안내를 듣지 않아도 이제 곧 오픈하려 한다는 걸 몸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변화가 보였다.
복장이 달라졌다. 분명히 어제까지는 노숙자의 포스를 풍기던 이들이 오늘 오전에는 좀비와 같은 몰골이었는데 지금은 말끔한 모습의 게이머로
돌아간 것이다.
‘아니? 저런 상태로 있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어제랑 불과 조금 전까지는 왜 저러고 있었던 거야? 무슨 히어로물에서 5초 만에 옷 갈아입는 것처
럼?’
참으로 모를 일이다. 기다림이라는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그들만의 방법이라고 그냥 예상만 해볼 뿐이었다.
“우오오!”
“대박! 초대박!”
게이머들은 하나둘 행사장으로 들어오고는 하나 같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행사장에는 100대의 G 크로스가 준비되어 있었고, 다양한 장식품들
과 함께 참가자들을 위한 선물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GF에서 완전 작정하고 준비 했나 보네!”
“이 정도면 GF가 그냥 단일로 하는 게임 쇼라고 봐도 되는 거 아니야?”
“여기다! 여기에 그게 있어!
“그 워쳐가 이 워쳐인가요?”
“맞아요, 그 워쳐.”
“보라고! 여기 워쳐라고 써 있잖아요.”
모르는 사람들끼리 알아서 이어지는 대화였다. 그만큼 공감대가 있다는 건 사람이 서로 가까워지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워쳐 해보셨어요?”
“아니. 처음인데요.”
사실 한국은 GF 콘을 진행할 필요가 있는지 다시 계산기를 두드릴 만큼 워쳐의 인지도가 낮은 국가였다. 다른 나라의 경우, PC판과는 또 다른
맛이 있는 워쳐를 경험시킬 필요가 있었다.
‘당신은 이미 PC판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GF의 워쳐는 또 구매할 가치가 있는 게임입니다.’라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른 의미가 되었다. 재구매를 위한 설득이 아닌, 워쳐라는 게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다.
“G 크로스는 다른 콘솔들보다 성능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보니까 절반이 뭐야? 그보다도 한참 떨어지더라고.”
“그 정도였어?”
“어. 다른 콘솔들은 200 플로피? 뭐, 그렇다던데 G 크로스는 60인가 그래.”
“근데 이거 왜 이러냐? 진짜 성능이 떨어지는 거 맞아?”
워쳐의 그래픽을 보는 이들은 ‘과연 이 기기가 성능이 떨어지는 기기가 맞기는 하는가?’라는 고민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알면서도 되물어
볼 만큼 퀄리티 있는 그래픽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게? 그럼 성능이 더 좋은데, 일단 조금 낮게 깔고 들어간 건가?”
“그랬으면 광고할 때 숨길 리가 없잖아.”
“근데 왜 이렇게 좋냐?”
“잘 모르지만, GF니까 가능했겠지.”
진실은 최적화와 꼼수로 이루어진 결과물이지만, 이걸 딱 보고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는 게이머가 아니라 개발자가 됐을 것이다.
“이 게임이 GF에서 개발한 게 아니었어?”
“응. 폴란드 회사를 GF가 인수하고 워쳐를 GF에서 완전히 갈아엎었데.”
“아······.”
“너는 대체 어느 시대의 정보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냐? 그런 정보력을 가져 놓고 여기 초대는 잘도 받았다?”
GF 콘에 초대받은 게이머들은 GF 게임에 대한 골수 팬들이 대다수다. 그러나 일부는 자유게시판이 일기장 내지는 채팅창이라는 듯이 게시판을
통해 대화하면서 높은 점수를 획득한 이들도 더러 있었다.
이런 고객들은 정보력이 뛰어난 이들을 통해 G 크로스를 실시간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근데 진짜 GF가 액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뽑아낸다.”
“대박이네. 사스가 GF!”
“그러게 사스가네.”
G 크로스 100대는 행사장 전체를 채울 만큼 많은 숫자였지만, 행사에 참여하는 게이머들의 숫자에 비하면 초라한 숫자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게이머들은 줄을 서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가 10분 정도 게임을 하고 다시 줄을 서는 것의 반복이었는데 그 탓에 게임을 하는 시간보다 대화하
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지루해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마땅했지만, 게이머들은 지루함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새
로운 것들을 하나씩 얻어내고 그것들을 공유해나가며 지루함을 극복했다.
“저는 워쳐 PC판을 해봤는데 그건 진짜 엄청 흐느적거리면서 싸우거든요. 근데 이건 딱 절도 있게 액션이 잡히네요. 진짜 겜 하면서 이런 게 나
와줬으면, 이렇게 개선됐으면 이라고 상상만 했었는데··· 우와. 그게 그대로 이루어진 겜이라니!”
“맞아, 나도 그래. 워쳐하면서 제일 아쉬웠던 게 진짜 해결된 거야.”
“쩔어. 이건 진짜 쩔어. 난 드래곤 소울이 한국에서 만든 최고의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바꿔야 할 거 같아. 역시 우리나라는 게임 대국!”
“에이. 그래도 이걸 한국에서 만든 게임이라고 보긴 어렵지.”
“왜? GF에서 만들었다며?”
“원본이 폴란드잖아.”
“원본이 폴란드인 게 뭔 상관이야? 한국에서 다시 만들었으면 한국 거지.”
“짜장면이 중화요리냐? 한식이냐?”
“난데없이 뭔 소리야? 게임 이야기하다가 짜장면이 왜 나와?”
“이게 한국 게임이면 짜장면도 한식이라고.”
전부 예상 범주 안에 있던 대화라서 그럴까.
뜻밖의 단어인 짜장면에 문득 마음이 쏠렸다. 나는 김유천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김 실장님은 짜장면이 어디 음식이라고 보세요?”
시기상 아직은 아니지만, 나중에 유명해질 이야기가 짜장면, 자장면 논란이고 자연스레 자리 잡는 상식이 ‘짜장면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음식이
다.’라는 것이다. 중국에 있는 원래의 짜장면은 이제 와서는 한국의 짜장면과 완전히 다른 음식이니까.
실제로 중국인들도 한국 짜장면은 한국 음식이라고 말한다.
‘근데 실제로 파는 곳들은 중국집이거든.’
게다가 그걸 개발한 요리사들도 한국에서 만들었을 뿐 화교들로 국적은 중국이었던 사람들이다. 단지 한국에서 개발됐고, 한국에서 즐겨 먹는다
는 이유로 이것이 한식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이 이렇다. 단순하게 정의할 수도 있으나 여러 각도로 고민하면 쉽게 결론짓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이래서 단정적으로 말하는 녀석들
대부분이 비전문가이고 사기꾼인 거다. 사람들이 원하는 결론을 내려주기는 하되 허점이 많기 때문이다.
이토록 대단히 복잡한 의미가 담긴 내 물음에 김유천 비서실장은 간단히 대답했다.
“중화요리면 어떻고, 한식이면 어떻습니까?”
“그럼?”
“맛있으면 된 거라고 봅니다.”
“아하.”
명쾌한 답변에 나는 무릎을 '탁' 치고 다시 게이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 생각보다 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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