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09화 (409/577)

< 삶의 목적 >

‘이걸 한국인이 만들었었나?’

게임 제작툴로 만들어진 게임 중에서 꽤 수작으로 평가받은 작품이다. 제작 툴의 수준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면모는 없으나 다양한 선택지와 그것을 바탕

으로 마치 한 편의 소설을 감상하듯이 플레이하는 게임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부의 정점에 선 인물에게는 뭔가가 진짜 있나 보네.’

나도 잘 안다. 오늘 이 한 번의 사례만을 가지고 결론 짓는 일이 어리석다는 것쯤은.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빌이 이 사람을 딱 짚어냈고 우연이라고 언급했으며 내 능력 역시 함께 발동해 버렸다는 특이점들이 존재한다.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 하긴, 남들이 볼 때는 나도 마찬가지겠구나. 어마어마한 행운을 타고난 것처럼 보일 테니까.’

어쨌거나 빌은 사악한 인간이 틀림없다. 내 재산의 90%를 기부받으려는 악독한 인물이니 나는 기필코 늙기 전에 재산을 펑펑 쓰고 말 것이다. 대충 듣자

하니 돈만 많으면 유럽의 성이나 태평양의 섬도 살 수 있다고 하더라.

‘아무튼, 나중 일은 나중에 따지고 지금은 좋은 아이템을 챙기게 됐음을 기뻐하자.’

프로젝트 X는 고객 타깃층이 다른 만큼 성능도 부족하다.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게임은 액션성보다 스토리를 중시한 인터렉티브 드라마의 장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북미의 게임사

들을 인수하는 것이 좋을지, 바벨의 작가진을 활용해서 우리가 그런 게임을 개발하는 게 좋을지를 조만간 결정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서 투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게임과 인재를 만났으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원래 카페에서 작업하십니까? 그게 아니면 오늘만?”

“원래 이렇게 작업합니다.”

“사무실은요?”

“수익도 없는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자인걸요.”

사무실이 있을 리 없다는 대답이다. 나로선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합격입니다.”

“네?”

“어떻습니까? GF 그룹에 채용되시겠습니까?”

“예!?”

사내가 벌써 몇 차례인지 모를 경악을 내질렀다. 그리고 이를 빌은 뒤에서 흥미롭게 구경 중이었다.

*

하나의 주인공이 7가지의 메인 줄기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임, 레인보우 스토리.

그 개발자 중 한 명인 이명우는 오늘 도저히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었다.

‘세상에. 이게 말이 돼?’

집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은 평소와 똑같았다. 기막힌 복돼지가 품에 안기지도 않았고 라면에 넣는 계란의 노른자가 두 개이지도, 다시마가 여러 개 나오는 행운도 없었

다. 그렇게 아무런 조짐도 없었는데 오늘 그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인물을 무려 두 명이나 만났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사업가이자 전설을 만들어가고 있는 GF의 윤태식 회장.

다른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는 마이크루 소프트의 빌 게이트.

이들을 호텔 스카이라운지도 아닌 일반 카페에서 볼 줄이야!

그것도 모자라서 무려 윤태식 회장으로부터 채용 제의까지 받았으니 어안이 벙벙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후회되는 점도 있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입사하겠다고 할걸. 뒤늦게 연락하면 페널티라도 생기는 거 아냐? 그럼 어떻게 하지? 으아··· 내가 혼자 만든 거였으면 바로 오케

이 했을 텐데.’

레인보우 스토리는 켈베로스라는 인디게임 개발팀에 소속이 되어 있으니 자신만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그러니 팀 켈베로스가 함께여야 했고 용기를 내

어 윤태식 회장의 제안에 대한 대답을 뒤로 미뤄둔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옳다고 여겼던 이 행동이 돌아오고 나자 여러모로 후회되고 있었다. 드라마나 신문에서도 많이 봤지 않던가. 재벌이라 여겨지는 부류가

어디까지 소시민들을 괴롭힐 수 있는지 말이다.

그럴 리 없다고 99%를 생각하면서도 ‘혹시 몰라···’하며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건 윤태식에 비해 이명우의 처지와 사회적인 위치가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어영부영하면 안 돼.’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재빨리 팀 켈베로스의 팀원들에게 메시지를 돌렸다.

> 중요!

> 급히 모여서 회의할 문제가 있으니

> 팀장님 집으로 오늘 오실 수 있는 분들

> 전원이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웃기는 상황이지만 지금 보낸 메시지의 집합 장소인 팀장님 집은 이명우의 집이 아니다. 팀 켈베로스의 팀장은 김선홍인데 이명우는 정작 팀장에게조차

언급하지 않고 장소를 잡아버린 것이다. 그 탓에 자신의 집에서 모임이 생기는 걸 김선홍 역시 지금 알게 되었다.

‘마음이 조급해서 뭔가 순서가 꼬인 거 같긴 한데··· 에이, 몰라! 이미 저질렀다고.’

GF의 제안을 받았는데 약간의 문제쯤은 그냥 넘어가도 될 것이다. 지난 2년간 팀장의 집은 그들의 아지트나 다름없게 변해버려서 실수했다고 하면 대충

넘어가 주리라 생각했다.

일반 가정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이 가득한 집안.

팀 켈베로스의 아지트나 다름없이 이용 중이던 집은 여기저기 치우지 않은 쓰레기들은 물론이고 내부 공기는 빠지지 않은 담배 연기로 찌든 상태였다.

건강하던 사람도 호흡기 질환을 앓게 될 것만 같은 장소다.

그러나 켈베로스의 팀원들은 이런 환경에 아무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불편함을 떠올리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이 환경이 익숙했고 아지트란 본래 이렇게

생겨 먹은 게 당연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홀로 자취하는 팀원들의 집안 꼬락서니도 이곳 못잖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중요한 회의라니?”

“내가 눈을 의심했다는 거 아니냐. 우리 집에서 모이는데 정작 내가 모르더라고. 술김에 약속 잡은 걸 깜빡했나 이 나이에 치매까지 걱정했어.”

‘오라니까 오기는 했는데,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다.’라는 기색이 역력한 팀원들의 모습. 제아무리 형 동생 하는 친한 사이라고 해도 동생이 선을 넘는 행

동을 하면 불쾌한 게 한국인의 정서다. 나이로 서열을 우선 단정 짓고 보는 관습의 잔재였다.

하지만 이명우는 자신 있었다.

“오늘 제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메시지와 같은 작은 실수보다 오늘 가져온 희소식이 더욱더 크다고. 그러나 인간은 이성보다 감성이 앞설 때가 많다.

“이런 씁···”

“스무고개 하려고?”

“명우가 좋은 일이 있었나 본데 그게 뭘까?”

“우리가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고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이고 뭐 그런 모임은 아니지 않니?”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막내의 갑작스러운 소집이 불편한 형들의 표정.

더 이상 폼을 잡았다가는 안건을 꺼내기도 전에 감정부터 상할 게 뻔했다.

결국, 형들이 더 화를 내기 전에 명우는 재빨리 자신이 오늘 겪었던 일들을 설명해나갔다. 카페에서 일하던 중에 GF의 윤태식 회장이 찾아와 채용제의를

했고 빌 게이트 회장이 뒷자리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고 말이다.

“우와.”

팀장인 김선홍이 건성으로 손뼉 쳤다. 다른 팀원들도 한숨으로 흥을 더하고 고개를 흔들며 한편의 행위 예술을 완성했다.

“그래. 넘어가자.”

“그래서 지금 다음 작품 시나리오 콘셉트가 나왔다고?”

“네? 시나리오라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명우가 자신의 설명에 무엇이 잘못되었나를 다시 생각해 볼 즈음, 김선홍이 대꾸했다.

“내가 강남에서 비싼 감자튀김을 먹고 있었거든. 그런데 때마침 지나가던 SV엔터테인먼트 사장이 끝내주게 잘 생겼다면서 가수를 해보자고 하는 거야.

우와! 이런 대박이라니! 끝내주잖아. 하지만 바로 오케이하면 우리 게임개발에 문제가 생길 거 같아서 내가 그냥 왔어.”

“그게 뭔 소리예요?”

“네 말이랑 똑같은데 왜 너는 안 믿냐? 우리한테는 믿어달라면서?”

“저는 진짜고 형은 아니잖아요.”

“아이고 머리야. 이건 뭔 말이 통해야지 해 먹지.”

화를 내기가 오히려 우습다는 반응이었다.

“명우야. 아무리 자주 다니는 카페가 GF 본사와 가까운 곳이라고는 하지만 윤태식 회장님이라면서? 그런 사람이 직접 와서 입사 제의를 했는데 마침 그

옆에서 같이 커피를 마시고 있던 사람이 빌 게이트라면 몇 살짜리가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냐?”

“구라도 좀 말이 되게 구라를 쳐야지.”

“게임 개발 말고 막장 드라마 쪽으로 직업을 바꾸려면 추천할게. 흔한 신데렐라 스토리이기는 한데 병맛을 더 얹으면 훨씬 그럴듯해질 것 같아.”

명우는 그제야 형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차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오늘 있었던 일들은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비록 진실이고 자신이 정

말로 겪은 일이라 해도 이는 오직 자신의 사정일 뿐이다.

“하긴, 오죽하면 그랬겠냐. 나도 복권 1등 당첨처럼 여러 상상을 한 적이 있었거든. 알고 보니 재벌 3세였다던가 하는 거.”

“저 말이 진짜면 꿈만 꿔오던 메이저 게임의 개발이 현실로 다가오는 거니까.”

이명우를 지나치게 윽박지른 이유 중에는 회한도 섞여 있었다. 평소에 꿈꿔오던 일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꿈꾼다고 표현하

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실의 어려움이 꿈의 크기를 점점 작게 만들고 말이다.

한편, 이명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건 조금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고이 간직해둔 명함을 꺼냈다.

“형들 이게 GF그룹 윤태식 회장님의 명함이에요. 전화 걸어서 목소리를 들려드리고 직접 통화해보세요. 이러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아실 거예요.”

명우가 말하고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자 ‘할 테면 해봐,’라는 기색의 켈베로스 팀원들이 아주 빠르게 명함의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평소에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민첩성이다.

“얘가 연기를 전공했을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진짜 같지?”

“명우야. 구라 안 친 거 맞아?”

“아. 진짜! 다들 너무 하신다. 제가 이런 거로 거짓말할 꼬맹이로 보이시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회장님이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면서 이거 주신 겁

니다. 그러니까 좀 믿어봐요!”

답답해하는 그의 모습에 어색한 분위기가 됐다.

“가자. 대신에 아니면 너 진짜 혼난다.”

김선홍이 차 키를 들었다.

“어디요?”

“다들 따라와.”

팀장인 그의 차에 우르르 들어간 일행이 도착한 곳은 GF 본사였다. 불안감과 호기심, 기대의 눈동자가 이명우를 향했고 그가 쭈뼛거리며 나섰다.

“저기··· 윤태식 회장님이 언제든지 찾아와도 괜찮다고 하셨거든요. 이 명함도 주셨고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팀 켈베로스의 이명우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팀 켈베로스 이 명우님··· 아! 여기 있네요. 지금 바로 연락드려보겠습니다.”

GF 본사에 오기 전까지의 실랑이가 무색하리만큼 상황은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어졌다.

잠시 후. 이들을 안내할 직원이 로비의 데스크로 내려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팀 켈베로스는 말끔한 차림의 비서실 직원이 찾아오고서야 명우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장소를 섭외해서 저 많은 이들을 가짜

로 고용하면서까지 농담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GF 본사라니.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미쳤다··· 미쳤어··· 이게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GF 그룹은 현 시대 대한민국 최대의 게임 기업이자. 최고의 급여는 물론이고 최고의 복지까지 보장하는 게임 개발자라면 꿈에 그리는 기업이다.

지금 그곳에 그냥도 아니고 회장이 직접 명함이라는 초대장까지 보내준 상황이라는 것이 눈앞에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 오

히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흔한 카페에서 등장했던 윤태식이라는 인물은 기연이 아니면 쉽사리 만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저희 실장님이 오실 겁니다.”

“실장님이요?”

“예. 비서실장님이신데. 회장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분이시기도 하고, 기본적인 계약에 관해서는 실장님이 거의 실무를 담당하고 계시거든요.”

< 삶의 목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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