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08화 (408/577)

< 삶의 목적 >

‘내가 웃고 있었나?’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기사를 읽는 것 자체가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게다가 짖어봐야 아무런 피해조차 끼치지 못하는 애송이들의 헛

짓거리다. 상대해봐야 유치할 뿐이니 차가운 웃음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최근에는 이렇게 거슬리는 기사를 쓰는 언론사가 없었거든요. 언론사라면 아무리 상대가 강해도 자신들의 소신이 있다면 이런 기사도 내고 그래야 하

는 거 아니겠습니까?]

[소신이 있다면 이라··· 뭐 그런 생각도 좋죠. 그러나 제 견해는 다릅니다.]

[다르다니요?]

며칠간 제법 친분이 생긴 탓일까, 훗날 재단의 재정에 큰 기부를 해줄 인물이라고 나를 낙점한 이유려나, 그는 호의를 보이며 내게 자기 생각을 알려주었

다.

[이 기사의 내용이 사실인가요? GF는 자국의 게임에는 투자하지 않고, 해외에만 투자했다는 게?]

[그럴 리가요. 일단 자국의 게임사에 먼저 투자 약속을 하고 그 후에 유럽에 다녀왔습니다.]

엄격하게 따진다면 자국 기업에는 투자를 안 한 것이 맞다. 일단 아직 투자를 받은 기업은 없으니까. 그러나 내 동선이 간석동을 먼저 들렀고 투자할 가

치를 증명한다면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를 이행할 의지가 GF에는 있으니 저 기사들은 전부 거짓이었다.

[그러면 달라야 합니다.]

[다르다니요?]

[조금 전에 언론사의 소신이라고 말했는데, 내가 보기에 소신은 이런 거짓말에 들어갈 단어가 아니에요. 언론은 우리와 같은 기업 덕분에 벌어 먹고사는

존재거든요.]

‘기생하는 집단이 언론이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행복을 나누고 기부를 하라고 권하던 천사 같은 빌은 냉정한 사업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내게 보여주었다.

[그런 언론이 거짓으로 기업을 공격했는데 이를 기업이 용인한다? 그건 결국 언론에게 얕보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간지럽겠지만, 시간

이 지나면 하이에나 같은 것들이 급소를 물어뜯으려 눈치를 보게 되죠. 즉, 이런 건 먼저 싹을 잘라내야 합니다.]

기사를 보고 내가 지은 웃음.

그것만으로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지까지 모두 간파한 그가 해주는 조언이었다. 곱씹으니 과연 옳은 말이다.

신생 언론사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안 쓰러워서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그게 누적 되다 보면 우리가 언론을 무서워하는 것

으로 착각하는 사태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에게 알겠노라고 대답한 뒤 김유천 실장에게 말했다.

“김 실장님도 들으셨죠?”

“네! 회장님!”

“관련 기사를 올린 언론사들을 전부 수배하고 이곳에는 향후 우리 게임에 대한 정보는 물론, 우리 게임의 대회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차단하세요.”

“알겠습니다.”

게다가 날을 세우고 바라보니 새삼 의심되는 구석이 발견됐다.

“또한, 어그로를 끌어서 어떻게든 조회수를 늘리려는 신생 언론사라고 하더라도 굳이 우리를 직접 공격하는 기사를 쓰는 건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필시

우리를 배제하고도 수익을 낼 만한 무언가가 함께하고 있을 겁니다.”

조회수를 늘리고, 기사에 광고가 더 많이 달리게 된다고 치자. 그렇게 성장하면 뭐하나? 어차피 GF와 척을 지면 게임 관련 부분에서는 반쪽짜리 기사만

계속 올려야 할 텐데 말이다. 애초에 성장의 한계가 정해져 버리는 짓을 했다는 건 배경에 뭔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3M이라던가 하는 되지도 않는 수준에서 우리와 경쟁한다고 착각하는 단체들 말이다.

“알아보겠습니다.”

김유천 실장이 맡긴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작은 언론사들의 명운이 결정된 후 나는 빌과의 부담 없

는 식사 자리를 가졌다.

그가 원하는 메뉴는 한식이다. 이유는 별 것 아니다. 한국에 왔으니 그 나라의 음식을 먹고 싶을 따름이란다.

[웰니스 열풍으로 미국에서 먹어보기는 했는데 진짜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웰빙 열풍이 웰니스 열풍이다. 굳이 영어인 웰빙을 한국식이라고 하는 건 콩글리시이기 때문이다.

‘맥도날드를 이상하게 발음하는 일본만 가지고 웃을 게 아니야. 막상 따지고 보면 우리도 이상한 게 여러 가지더라.’

영어를 익히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 중 하나다. 웰빙에는 건강과 관련된 의미가 전혀 없다. 사실 영문으로 쓰자면 well-being인데 이건 그냥 복지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는 단어다.

그래서 영어권 국가에서 한국의 웰빙을 소개할 때에는 ‘wellbing’으로 그냥 한국의 단어 취급을 해버린다.

[다른 건 몰라도 특히 진짜 한국 김치는 먹어보고 갈 생각입니다.]

‘이건 진짜 부끄럽다.’

한국의 언론이 워낙 외국인들에게 인터뷰할 때마다 ‘두유 노우 김치?’라고 질문을 해대는 통에 이제는 저들이 알아서 대답한다고 하는 그 음식이다. 한

국인도 짜고 매워서 밥반찬으로 먹는 걸 왜 외국인에게는 그냥 먹이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나 내 부끄러움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최근 5대 슈퍼 푸드에 김치가 선정되면서 김치가 빠르게 인지도를 높여가는 중이었다. 부자 중의 부자라고 할

수 있는 빌 역시 건강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만큼 김치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염병할 김치 전사 애니메이션 따위 백날 만들어서 뭐 해? 슈퍼 푸드 한 방이··· 아니지. 김치 전사가 백날 만들어지는 건 끔찍하군. 그런 건 없는 게 차라

리 나아!’

어쨌거나 미국의 부유층들이 있는 지역에는 최근에 김치를 배치한 식당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드셔보셨겠네요.]

[먹어 봤죠.]

[굳이 본토의 맛을 알아보고 싶은 걸 보면, 마음에 들었던 거군요?]

[전혀. 끔찍한 맛이었습니다.]

[네?]

[세상에 이토록 구역질 나는 음식은 처음이었죠.]

솔직히 그래도 한국이 자랑스러운 음식이다 보니 ‘아주 훌륭한 음식이었어.’라거나 ‘특색있더군.’ 정도를 예상했다. 그런데 이건 전혀 다른 답변이다.

‘생굴이나 특이한 젓갈로 담근 김치였나? 아니면 발효 음식이라서 저렇게 느낄지도?’

기분이 참 묘하다. 나 스스로 김치 좀 그만 권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또 막상 대놓고 욕을 들으니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래서 사이 나쁜 형제도

그런 말을 한다는 유머가 있나 보다. 밖에서 맞고 온 동생의 복수를 해주면서 ‘내 동생 새끼는 나만 때려!’라고 한다는 거 말이다.

[그럼 한식이 아니라 다른 걸 드시는 게 좋을 텐데요. 게다가 굳이 진짜 김치를 찾아서 드시려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이런, 오해가 있군요. 김치의 끔찍함은 처음에만 그랬어. 이게 좀 복잡한 음식이었다고 해야 할까? 건강에 좋다길래 어쨌거나 억지로 더 먹었는데 먹다

보니까··· 음. 이렇게 말하는게 좋겠네요. 요즘에는 그럭저럭 맛을 느낄 수 있게 된 정도입니다.]

이어진 그의 말에 안심이 되는 걸 보면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보다.

때마침 한식을 궁금해하는 빌에게 딱 좋은 음식점이 회사 근처에 있었다.

궁중 한정식.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갈비찜부터 시작해서 궁중 잡채와 보리굴비는 물론이고 다섯 가지의 김치가 나오는 이 식사는 빌에게 한식을 완벽하게 소개하는 데

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매우 만족스럽게 즐기며 나로서도 잘 모르는 당연한 질문을 했다.

[왜 한국은 이런 좋은 요리문화를 가지고 굳이 김치와 비빔밥만 홍보하는 건가요?]

‘그러게요. 저도 알고 싶습니다.’

잡채나 갈비찜, 파전 같은 메뉴들은 세계 어느 나라로 나가도 잘 통할 음식인데 도대체 왜 그렇게 김치와 비빔밥에만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다.

[같은 동아시아에 있는데,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가 각각 고유의 문화가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단 말이야.]

중국과 일본.

이 두 나라의 이름을 듣고 나니 문득 한식을 세계에 소개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은 든다. 서구권에서 일식은 이미 고급 요리라는 이미지로 자리를 확실

하게 잡았고, 중식은 저렴한 요리라는 위치를 차지했다.

이미 동아시아의 두 가지 문화가 자리를 잡은 곳에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상이라도 깊이 주려고 김치를 미는 건··· 틈構憫?. 에이. 내가 뭐 요리 전문가도 아니고 이런 고민을 해서 뭐해? 이런 건 그쪽 분야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나중에 뭐 할 게 없어서 여유가 생긴다면 지금 빌 게이트가 놀면서 지내듯 게임 외적인 일을 해봐야겠다.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들린 곳은 별무늬 여자 그림이 그려진 카페였다.

[아무리 번화가라도 그렇지 똑같은 별다방이 왜 이렇게 많은 건가요?]

[수요가 있으니까요. 이런 카페 문화 자체를 별다방이 만들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별다방 CEO가 한국을 아주 좋아하겠네요.]

허허 웃으며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이 카페는 세계 어디에서나 커피 맛이 별로고.]

[진짜 맛있는 커피숍은 멀어서요. 오늘은 그냥 이거로 만족하시죠.]

[본래 좋은 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법이죠.]

빌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강남의 풍경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미국의 시애틀이나 샌프란시스코도 그렇지만, 이곳도 참 바쁜 도시입니다.]

[도시는 원래 다 바쁘지 않겠습니까?]

복지가 잘 되어 있고 여유가 넘치는 유럽이라고 해도 대도시는 분주한 편이다. 애초에 그렇게 바쁜 곳이 아니라면 많은 인구와 큰돈이 굴러가는 덩치를

유지할 수도 없다.

세계 최고의 부자와 함께하는 시간.

놀랍게도 사업도, 중차대한 일도 아닌 그저 그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편하게 있는 중이다. 그러던 중 빌의 시선이 노트북을 만지는 한 남성에게 머물렀

다.

[저 친구가 하는 거, 게임 아닌가요?]

[그래 보이는군요.]

주문한지 한참은 된 것 같은 커피.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 자리에 꽤 오래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남자는 한창 게임 제작 툴을 사용하고 있

었다.

남이 작업하고 있는 것을 몰래 보는 것이 예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떡하니 보이게 작업을 하고 있었던 덕분에 그냥 고개만 돌리는

것으로도 우리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추어들도 손쉽게 저 퀄리티의 게임을 개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툴로서 이를테면 게임을 제작하는 게임 같은 개념이다.

[어떤 게임을 만드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글쎄요.]

은퇴는 사람을 정말 여유있게 만드는 게 틀림없다. 남의 사정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나와는 달리 빌은 느긋한 웃음을 매단 채로 이름 모를 남성을 주의

깊게 보았다.

[하필 우리가 이 시간에 저 노트북의 작업이 보이는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면 저 남자가 게임을 개발하는지 모르고 있었을 테죠. 이런 게 인연이고 또는

운명이라는 걸지도 모릅니다.]

[기회는 우리가 저 남자를 발견한 게 아니라 저 사람이 우리의 눈에 띈 것에 있지 않을까요? 빌의 관심을 끌었으니 말입니다.]

[우연 역시 같은 틀 안에 있다고 봅니다.]

주차장에서 시작해서 세계 최고의 거부가 된 사내는 도사나 해탈한 중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역시도 작은 일탈일 것이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재

벌의 이색적인 취미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때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은 잊고 지냈던 능력이 왜 갑자기 발동하는 거지?’

일전, 마이코닉스의 일로 미국에서 전전긍긍했을 때 일어났던 일이 있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인 슈퍼컴퓨터의 문제로 돌파구를 찾던 중 기이한 예감

같은 것이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인도했었다. 흡사 게임 속 퀘스트나 미션을 알려주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문외한인 분야에는 꼭 관련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식으로 진행했기에 다시금 이 능력은 발휘되지 않았었다. 어찌보

면 괜찮은 힘을 봉인한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솔직한 내 심정은 전혀 미련이 없다는 거다.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아야 발휘되는 능력이라는 건 그만큼 사업이건 내 인생이건 어려움에 봉착했다는 의미다. 위기를 극복하는 인상적인 삶보다는 위

기 자체를 겪지 않는 평화로운 성공이 더 매력적이라고 본다.

즉, 지금은 예감 능력이 발동할 이유가 전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빌의 별것 아닌 조언으로 이게 반응한단 말이야. 혹시, 이 사람도 직감 비슷한 능력이 있는 건가?’

나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일어났다.

“잠시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네?”

말을 걸자 갑작스레 등장한 내 모습에 남자는 대답도 못 하고 당황한 얼굴로 ‘어버버’만 거렸다. 후줄근한 뒷모습만 보고 있어서 몰랐는데 밀접해서 보니

상당히 앳된 티가 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있는 그에게 이어서 말했다.

“예의가 아닌 건 알고 있지만, 저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보니 게임을 개발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말이죠.”

“아! 그러셨어요? 이건··· 어? 어라? 혹시··· 유··· 윤태식? 아니. 윤 회장님?”

처음에는 갑자기 등장한 내 모습에 놀랐었다면, 이번에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기함하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게임 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나를 꽤나 빨리 알아보았다.

“사람들이 쳐다보니 너무 그렇게 놀라지는 마시고요.”

“아! 넵! 죄송합니다.”

“게임 제작이 맞죠?”

“네! 네! 마··· 맞습니다.”

“봐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노트북을 내게 주다시피 하는데, 여기서 그의 순진함이 느껴진다. 만약 자기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담겼고 내가 악덕 게임사의 사장이라면 이대로 게

임을 훔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어리숙한 남자는 그냥 편하게 게임을 보여주었다.

‘레인보우 스토리라고?’

별 기대 없이 본 화면.

그 안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게임이 있었다. 심지어 꽤 재미있게 했던 게임이었다.

< 삶의 목적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