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목적 >
손님이라니. 지금 이 회사를 찾아올만한 사람을 떠올려 보았지만, 당장 떠오르는 중요 인물이 없다.
[지금은 만날 수가 없다고 그래.]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면 손님보다는 지금의 대화에 결론을 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게··· 멀리서 오신 분들이라서······.]
[멀리? 어디서?]
기대에 부풀었다. 쌍욕을 퍼부어도 시원치 않았던 미국에서 드디어 메시지가 왔나 보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답니다.]
가브리엘에 밝아졌던 표정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미국이 아니면 의미가 없던 것이다.
[됐다고 그래.]
이를 보고 마빈이 말했다.
[그래도 멀리서 온 사람이라는데 한 번 만나보기나 하지 그래?]
[만나서 뭐 하게? 저 사람들이 몇백만 즈워티를 돈 가방에 들고 여길 들어오기라도 할까봐?]
[혹시 모르잖아.]
영화와도 같은 스토리.
마빈은 그런 특별한 인연과 운명적인 만남을 정말 좋아했다. 꿈만 가득하게 꿀 수 있었던 시절에는 가브리엘 역시 그런 모습에 호감을 가졌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책임질 자리에 와서도 계속 낭만만 따지니 이제는 한숨만 나올 뿐이다.
[나는 일 없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두통약을 찾았다.
*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폴란드인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네요.”
“할 수 없죠.”
그 나라에서 사업할 때는 자국민의 언어를 써주는 편이 낫다. 이런 기조로 우크라이나에서는 개발자들이 영어를 할 줄 알았으나 비싼 통역사를 대동했었
다. 하지만 아직 세계 속의 한국은 변방의 소국인 탓일까, 폴란드에서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는 이를 찾지 못했다.
그 탓에 영어로 소통하게 됐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온 윤태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반응을 보았다. 실무자로 보이는 눈앞의 마빈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린 것이다. 혼잣말인지 옆의 친구에게 하는 말인지 되
뇌는 그의 모습은 회사의 사장은커녕 훈련된 비즈니스맨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냥 풋내기 대학생을 마주한 느낌마저 든다.
한편, 못마땅한 표정이던 가브리엘은 나를 보다가 이내 놀란 얼굴이 됐다.
‘이건 또 뭐 하는 시추에이션이야?’
게임 개발자들이기 때문일까.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들끼리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뭐라 뭐라 말하더니 넋을 놓고 있었다. 그래도 딱히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무슨 대화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GF’와 ‘윤태식!’이라는 단어. 그리고 저들의 표정만큼은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필시 어중이떠중이의 방문인 줄 알았다가 내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기겁한 게 틀림없다.
[저기··· 그··· 일단 여기 앉으시죠?]
처음에 나선 마빈 대신, 가브리엘이라고 불린 인물이 정신을 차리고는 우리를 의자로 안내했다.
[저희 회사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조심조심하면서도 눈을 기대감에 찬 모습을 보였다. 그런 가브리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유천 실장이 테이블 위로 가방을 올린 뒤 저들에게 내밀었
다.
[열어 보시죠.]
가방을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한 둘은 또다시 입을 벌렸다.
커다란 가죽 가방에는 돈다발이 가득했던 것이다. 총 10억 원이라는 돈이 즈워티로 환전되어 들어 있었다. 이 분위기에서 내가 말했다.
[회사가 많이 힘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그··· 그게···]
[저는 CDPRed가 이대로 망해서 사라지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회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원래 계획은 이것보다 조금 더 일반적인 방식의 대화로 진행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회사의 로비에 도착하고 사장실에 오기까지 둘러보니 회사의 분위기
가 심상치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워 보이는 두 사람의 감정선을 보고는 이들의 상황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연출 방법을 바꾸었다.
‘템포가 조금 빠르기는 해도 그간의 경험이 알려주지. 지금은 이게 딱 맞아.’
게다가 어차피 이미 저지른 멘트다. 후회해 봐야 아무 의미 없으니 지른 말과 행동보다는 저들의 반응에 더 집중해야 했다.
[저희 회사가 아까워서 찾아오셨다는 게 어떤 의미로···]
[GF로 오십시오.]
[네?]
[직접 퍼블리싱도 하고, 게임도 만들고, 사업체 운영이라는 게 참 힘들지요? 여기에 자금 투자를 하려니 이쪽에도 자금이 필요하고, 저쪽에 자금 투자를
하려니 또 다른 곳에 자금이 필요하고 말입니다. 십중팔구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가브리엘은 크게 공감하는 기색으로 나를 보았다. 절친했던 친구를 만난 양 나를 반가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회사의 역사는 당신들이 우리보다 길겠지만 게임 개발은 물론이고 유통까지 전부 GF는 더 많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자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울타리 안에서 편하게 날개를 펴시는 게 어떻습니까?]
가브리엘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한참 갈등했다.
그리고 눈을 딱 감고는 가방을 조금 밀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그의 실눈은 돈에 머무른 상태다. 게임을 100만 장이 넘게 판매한 기업의 사장이 10억에서 눈을 못 떼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회사가 힘
들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제안을 거절한다?
‘심지어 지금도 제안을 거절하는 말 자체를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는데?’
이유가 뭘까, 되묻지 않은 채 시선으로 추궁하니 그가 말을 이었다.
[저희 CDPRed는 폴란드의 자랑스러운 게임 기업이 되고 싶습니다. 해외로 넘길 수는 없습니다.]
‘애국심이군.’
핍박의 역사를 가진 탓일까, 폴란드는 한국과 매우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여타 유럽의 국가들은 그냥 지배계층과 피 지배계층의 개념만 있어서
애국심이 그리 크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에 폴란드는 국가에 대한 아주 강했고 그러다 보니 회사가 망할 위기에도 외국의 손이 미치면 일단 나라부터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명감
에는 또 그 나름의 설득 방법이 있기 마련 아니겠는가.
[GF 소속의 게임 스튜디오가 된다고 해서 CDPRed가 한국 회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글쎄요. GF가 한국의 회사인데 그 아래에 있는 회사가 한국 회사가 아니라고 하시는 건 말이 맞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미국에 많은 회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넷플렉스, 바벨, 마이코닉스와 같은 곳들이지요. 이 중 한국 회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마이코닉스 단 하
나 뿐입니다.]
나머지 회사들은 미국에 있고 미국의 기업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넷플렉스와 바벨을 한국 기업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상장도 미국의 증권사에 상장이 되어 있고 경영자도 미국인이며 대부분
의 직원도 미국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의 법인으로 등록되어 있기까지 하지요. 이는 CDPRed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주식회사가 되고 나면 기업의 정체성은 하나로 딱 말하기 어렵게 되는 법이다.
[그래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곳이 폴란드라는 겁니다.]
[제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폴란드는 자동차, 전자, 항공, 바이오, R&D 같은 분야에만 외국인 투자가 가능합니다. 저희는 해당 사항이 없어요.]
[제가 아는 바와 다르군요. 명확히 딱 그 분야만 투자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는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요.]
[네? 그게 무슨 말이시죠?]
자국민이라 해서 외국인보다 법률까지 통달할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다르고 상황마다 차이가 난다.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이
익과 목적을 가진 타인이 훨씬 정통할 때도 있다.
[이 서류를 먼저 보시죠.]
[게임 연구를 위한 투자 계약?]
바르샤바는 바르샤바 대학을 포함해서 20여개의 대학이 있는 일명 대학의 도시다. 그만큼 많은 고등 교육기관이 존재하고 있는 이곳은 교육에 투자하면
그만큼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
빈틈은 여기에 있다. 교육과 함께 취업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에는 위의 해당 사항에서 벗어나더라도 투자를 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폴란드에서 추구하는 산업과 거리가 멀면 아무리 그렇게 해도 힘들다.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어떻게든 게임을 전자 산업에 욱여넣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였다.
‘이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넌 모를 거다.’
폴란드 관광도, CDPRed의 투자도 하기 전에 진짜 발바닥에 땀나도록 움직였다.
[게임 개발에 대한 연구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R&D 아니겠습니까? 주변 대학과 연계해서 게임 개발 인력을 추가로 키울 수 있도록 연구에 지원하고, 또
그들이 취업할 수 있는 기업을 양성하는 방향의 투자입니다. 덕분에 정부에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애국심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폴란드의 회사라는 정체성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외국의 투자라서 포기해야 하는 이유도 사
라지니까.
[살았다······.]
가브리엘은 꾹 막아 놓은 것 같았던 가슴이 뻥하고 뚫리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럼 이제부터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네.]
CDPRed의 직원은 150명에 달하는 폴란드 최대 규모의 게임 회사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별로 차지 않는 숫자이니 최소 두 배까지는 늘릴 필요가 있었다.
[저는 CDPRed와 함께 CL 게임즈에도 투자할 계획입니다.]
같은 말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다르듯, 지금 하는 투자라는 말은 사실 인수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괜한 감정적인 거부감을 줄 수 있기에 나는 절대
로 인수라는 단어를 필요 외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CL 게임즈.
이곳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폴란드 게임 업계의 이인자다. 사실 말이 2등이지 1등과 비등비등한 정도의 역량은 전혀 없다. 그냥 이
자리를 차지할 존재가 없어서 2인자인 회사다.
‘하지만 장점은 있지.’
CL 게임즈의 특징은 C급과 B급 사이를 오가는 게임을 1년에 5~6개씩 발매한다는 것이다. CDPRed는 워쳐를 5년이 걸렸는데 CL 게임즈는 1년에 다섯
개 이상씩 출시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수준은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도 이들 역시 뛰어난 개발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화살을 여러 발 쏘다보면 이따금 정 중앙에 명중하는 대박도 터지거든.’
CL 게임즈는 하나의 게임을 개발하고 나면 그것을 활용해서 수정한 후 새로운 게임을 내보내는 전략을 취한다. 그러던 중 저격병이라는 게임이 뜬금포
로 200만장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면서 시리즈 화 된다.
비록 그 200만 장 중에 100만 장이 환불되는 초유의 환불 사태를 불러오기는 하지만, 내가 간섭해서 방향성을 잡아주고 버그에 대한 대처요령을 가르쳐
주면 충분히 킬링타임용 양산형 게임을 개발할 수 있는 개발사가 되어줄 것이다.
‘콘솔에는 AAA게임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
프로젝트X 탓에 우리는 다양하고 많은 게임이 필요하다. 일단 넉넉한 양을 깔아두고 그다음에 게이머들로 하여금 좋은 게임을 고르게 해야 하는 입장이
다. 그러니 CL 게임즈 역시 장바구니에 담아야 하는 좋은 매물이 된다.
[그럼, 저희와 CL게임즈가 합병이 되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AAA게임을 출시하는 스튜디오와 B급 게임을 출시하는 스튜디오가 같은 회사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건 그 자체만으로도 AAA급 게임의 브랜드를 깎
아 먹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아무래도 서로가 공유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같은 건물을 사용하게 되긴 할 겁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완전히 나눠진 회사가 될 겁니다.]
염연히 사장도 다르고, 사무실도 다르다. 그냥 건물만 같을 뿐인 다른 회사다.
이 말에 묘하다는 표정을 짓는 가브리엘이었지만, 아무튼 합병은 아니라는 말에 일단은 넘기는 분위기였다.
[지분은 GF가 60%, 지금 두 사장님이 각각 10%씩 총 20%, 마지막으로 폴란드 정부의 투자가 20%. 이렇게 맞춰질 겁니다.]
GF라는 거대 기업의 움직임은 폴란드 정부의 관심을 이끌었고 그들은 우리를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함께 투자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정작 회사의 주인이 있지도 않은 자리에서 이런 투자 비율이 결정 났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이런 걸 보면 폴란드도 허울만 민주주의이지 어떻
게 보면 독재정치국가의 개념이란 말이야.’
한국인이 갖는 유럽에 대한 단순한 시각에서 오는 오류는 입장을 바꿔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인이 북한, 대만, 베트남, 한국을 죄다 아시아로 보
고 뭉뚱그려 이해한다고 보면 그게 과연 얼마만큼 맞는 이야기인지 체감할 수 있으니 말이다.
< 삶의 목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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