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03화 (403/577)

< 목소리 >

*

2개월 후, 한국으로 넘어갔던 올렉과 보르타 게임즈의 핵심 개발진이 키예프로 돌아왔다.

두 달은 개인이라면 모를까 기업이 무언가를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그러나 충분한 돈은 상식적인 불가능을 가능의 영역으로 바꿀 수 있다.

보르타 게임즈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기업으로 변모했다. 우선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당연히 본사 사옥이다. 비록 건물을 새로이 올린다거나 하는 일

은 없었지만, 키예프에서도 제법 그 규모가 큰 3성급 호텔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그만큼 사무실은 세월마저 담은 훌륭한 본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내가 이런 기업의 대표가 되다니.’

올렉은 꿈만 같은 상황에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밀려오는 통증에도 이 현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고작 두 달 만에 이렇게 변했는데, 앞으로 반년은 계속 공사를 한다면서?]

옆에서 함께 감회가 다르다는 표정으로 건물을 바라보던 막시모프의 말에 올렉도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개발 중에도 공사를 계속하면 방해되지는 않을까?]

[어차피 당장 그렇게 급하게 개발할 것도 아니니까 그런 건 크게 상관없을 거 같아. 게다가 공사는 야간 위주로 한다고 그러더라.]

막시모프가 웃으며 되물었다.

[야간인 게 무슨 상관이야? 야근이 우리 일상인데?]

등대처럼 심야에도 불을 밝히고 일하는 건 개발자의 당연한 일과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올렉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나 싶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

다.

[안 해.]

[안 한다니? 설마, 야근을?]

[어.]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 회장님이 게임 개발에 재촉 안 할 거라고 그렇게 똥배짱 부리는 거야? 그러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건 해야 늦어져도

늦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괜히 열을 내는 막시모프의 모습에 올렉은 조용하게 웃었다.

[그게 아니야. 회장님이 낮에만 일하래.]

[뭐?]

[회장님이 밤에는 일 시키지 말고 낮에만 하라시더라.]

상상도 해본 적 없었던 말에 막시모프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상적인 근로생활이 그들에게는 비정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때마침 출근하던

올리와 앤디가 그들을 불렀다.

[오! 올렉 사장님! 막시모프도 있었네?]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해?]

[내가 지금 너무 황당한 말을 들어서.]

[무슨 말?]

[아니. 올렉이 그러는데. 회장님이 밤에는 일 하지 말라고 그랬대.]

[뭐야?]

이해 못 할 소리에 그들이 의혹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인데 이해가 되지 않는 묘한 모순에 빠진 것이다.

[그게 말이 돼?]

[밤에 일을 안 하고 게임을 언제 다 만들어?]

[너무들 그러지 마라. 나도 안 그래도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듣고 너랑 똑같이 올렉한테 물어봤다니까?]

[그래?]

[그래서? 회장님이 뭐라시는데?]

일행의 시선이 올렉의 입을 향해 모였다.

그는 왠지 모를 자부심을 느끼며 짐짓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 500명으로 250명이 밤에도 일하는 수준으로 낮에만 일하면 된대. 그러라고 500명이나 뽑은 거라고 하셨거든.]

500명이 250명처럼 일하기.

허탈할 정도로 쉬운 방법이었지만, 합리적이지는 않았던 방법이었다. 게임 발매가 다가올 때는 일손이 부족하고 그 이전에는 노는 손이 많은 곳이 게임

사다. 당연히 회사 입장에서는 250명을 뽑은 뒤 평상시에는 잉여인력 없이 일을 시키다가 바쁠 때, 야근을 의무화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윤태식 회장은 직원을 회사라는 기계의 부품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고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비효율을 감수한 것이다.

[이런 게 세계적인 대기업인가···]

[한국에 가고 싶어질 정도야. 근무 환경이 다르네.]

[아무리 그래도 발매일이 다가올 때는 야근을 하긴 해야겠지?]

[그건 당연한 거지! 그래도 이런 급여를 주면서 야근을 하지 말라는 지시가 나오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단 말이야.]

[아직 놀라긴 이르다.]

지금도 충분히 놀라 자빠질만한 상황인데, 아직도 더 남았다는 올렉의 말에 다시 한번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나 말고 저기 주차장을 봐.]

[주차장?]

지금은 회사 사옥이지만 과거 3성급 호텔이었던 건물이다. 당연히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주차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의 주차장에는 햇살에

반짝이는 깔끔한 신차 아홉 대가 주차된 상태였다.

[우리 신입 개발자들 중에 자동차 있는 애가 있어?]

[아닐걸? 게다가 걔들은 아직 출근도 안 해.]

[한 대는 올렉 네 차라고 쳐도 나머지는···]

[월급 받기도 전에 받을 걸 감안하고 벌써부터 차부터 산 미친놈이 있나?]

[그게 아니야. 회사 차다.]

올렉이 감동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회사 차라니?]

[회사 차라고.]

[그러니까 회사 차라는 게 무슨 말이냐고.]

야근이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10년간 3만원에서 시작해 30만원 수준까지의 급여를 받으며 게임만 개발하던 이들에게는 머릿속에 없는 단어였다.

[개발자들이야 정시에 퇴근하면 되지만, 관리자들이나 스태프들은 일을 하다 보면 정리해야 할 것들도 많고 꼭 그날 해야 할 것들이 있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로 출장을 가야 할 일도 종종 생길 거고.]

[생기겠지. 그래서 뭔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당장 야근을 시키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은 야근과 관계없이 정시에 퇴근을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회장님이 그럴 때, 저거 타고 다니래.]

[뭐?]

비록 서유럽에 유명한 명품 브랜드의 차량이 아닌 우크라이나 자동차였지만, 그게 뭐 어떤가? 딱 봐도 때깔이 번쩍거리는 신차인데 말이다.

[맙소사!]

[나 그럼 이제부터 저거 타고 출퇴근해도 되는 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방금 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아니. 똑바로 들었는데?]

[똑바로 들었는데 그런 말이 나와? 저건 야근하고 늦게 퇴근하거나 출장 갈 때 타라고 주신 거라니까?]

[그러니까 어차피 우리는 야근을 해도 되는 사람들이고, 나는 이제부터 매일 야근을 할 거니까 저걸 타고 다녀도 된다는 아름다운 결론이 내려져도 되는

거잖아.]

무언가 뒤바뀐 것 같지만, 올리의 말에 올렉은 저절로 수긍하고 말았다.

한편.

[뭐야! 왜 출근하는 놈이 하나도 없는 거야!]

시도르비치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의문이 뒤엉켜 있었다.

[얼마 전에 GF라는 회사 회장이 와서 엄청난 투자를 했었답니다. 그래서 개발진들이 대거 이탈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준 총무과 여직원의 말에 그의 언성이 더욱 높아졌다.

[뭐? 투자!? 고작 유통사에서 게임에 투자 좀 한다고 개발자들이 이렇게 다 빠져나갈 거였으면 키예프 전역에 게임 개발사가 이미 넘쳐났겠지!]

시도르비치는 그에게 남은 분노를 모두 쏟아내듯이 몰아세웠고, 그의 분노한 모습에 총무과 직원이 긴장감으로 땀을 뻘뻘 흘렸다.

[빌어먹을! 아니야. 아니야. 어차피 개발자들이야 돈만 있으면 다시 불러올 수 있어. 그래. 그런 개발자들 따위보다는 내세울 게임 타이틀을 가진 내가 투

자를 받기에도 더 좋지! 좋았어. 바로 이거야. 내가 가서 투자를 제대로 받아오겠어. 거기가 어디야?]

[키예프 서커스 학교 부근에 있는 보르타 게임즈로 알고 있습니다.]

게임 개발사를 운영하면서 얼마나 이 바닥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는지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윤태식 회장이 다녀간 지 2개월이 흘렀고 개발자들이 대규

모로 이직하는 사태가 일어났건만 그는 보르타 게임즈의 이름조차 처음 알게 된 상태였다.

[서커스 학교? 알았어!]

그는 재빨리 올렉이 만들어둔 게임의 기획안과 서류들을 챙겨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미처 챙기지 못했던 자신의 짐을 마저 챙기고는 회사를 떠

났다. 총무과 여직원 역시 빈 사무실에서 툴툴거렸다.

[망할! 진작 다 챙겨서 나갔어야 했는데! 하필 이걸 놓고 가서는!]

그녀 역시 이미 이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3급 호텔이라고 하지만, 리조트 형 호텔이었던 현 보르타 게임즈의 본사는 SCG Game World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일반적인 게임사의 대표라면 자신의 회사와 비교해서 거대한 이 회사의 위용에 기가 죽을 만도 했지만, 시도르비치는 반대로 뜯어낼 돈이 더 많을 수 있

겠다는 생각에 기대감을 높였다.

보르타 게임즈는 우크라이나의 다른 게임 기업들과는 달리 1층 로비에서부터 보안을 위한 장치가 마련되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구조였다. 들어갈 방

법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안내데스크의 직원이 다가왔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이곳에서 요즘 투자를 해준다고 하길래 찾아왔습니다만?]

[어디에서 오셨죠?]

[SCG Game World의 시도르비치입니다.]

보르타 게임즈의 안내 데스크 직원은 이 회사에 입사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SCG Game world에 대한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들도록 들어

왔다. 또한, 시도르비치가 찾아올 경우에 대한 행동 강령도 잘 숙지하고 있었다.

[SCG Game World셨군요. 여기 출입증입니다. 8층의 사장실로 바로 가시면 됩니다.]

‘역시. 우크라이나의 게임에 투자하면서 나를 모를리가 없지.’

시도르비치는 마치 자신을 바로 알아보고 사장실로 안내하는 것 같은 태도에 뿌듯함을 느끼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SCG Game World의 시도르비치 사장님입니다.]

비서의 보고와 함께 사장실의 문이 열렸다.

막힘없이 들어간 시도르비치는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큰 성공을 이끈 게임사 SCG Game World의 시도르비치라고 합니··· 어라? 너는······.]

러시아식 넓은 탁자.

그 탁자 위로 구둣발을 올리고는 거만한 표정으로 시가를 태우고 있는 사내.

그는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 보아오던 올렉이 틀림없었다.

[야포르스키. 출근도 하지 않은 네놈이 여기는 왜 있는 거냐?]

항상 고개 숙인 남자였던 옛 부하직원이 거만하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투자를 받겠다고 온 인간이 야포르스키? 네놈? 이봐. 내가 네 친구냐?]

[투자라니? 설마 이곳의 대표가······!]

시도르비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자신의 밑에서 30만원을 받고 일하던 개발자가 어찌 이런 대기업의 사

장이 되었단 말인가?

그가 바로 수긍하기에 지금 상황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투자를 받으러 오셨다고?]

[그··· 그러려고 온 건데···]

[안 해.]

단호한 그의 한 마디에 시도르비치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랬다. 지금 이곳에서 올렉이 왜 여기에 있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돈이다.

[조금 전에는 내가 실수했네. 그러니 이야기를···]

[다 됐으니까 안 한다고. SCG 같은 가망 없는 회사에는 투자하지 않는 게 우리 원칙이거든. 거기는 이제 개발자도 없는데 투자는 받아서 뭐 하려고?]

[개발자는 투자만 받으면 구인해서···]

[지랄하네. 투자받으면 다 네놈 주머니로 들어가겠지.]

냉소적인 그의 욕설에 시도르비치가 얼떨떨할 무렵, 올렉이 말했다.

[우크라이나에 노예는 없다. 자랑스러운 우리 국민을 노예처럼 부리는 네놈에게는 1흐리브냐도 투자하지 않아. 그러니까 꺼져.]

저런 얼굴과 표정이 있었는지 몰랐으리만큼 정말 단호했다. 그러나 시도르비치는 지금 느끼는 모멸감을 채 풀지조차 못했다. 경비를 호출한 올렉이 그를

문자 그대로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젠장!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저놈이 이곳의 사장으로 있는 거지?’

잡상인처럼 밀쳐서 보르타 게임즈를 나온 그가 뒤늦게 씩씩거렸다.

[흥! 아무튼 상관없어. 어차피 저런 노예근성을 가진 놈이 있는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지! 너희 투자가 없어도 SCG는 굉장한 게임을 만들 거다. 그

리고 네놈들을 집어 삼켜주마! 그때는 무릎 꿇고 빌어도 절대 받아주지 않겠어!]

당장 개발자들이 다 빠져나간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결국 다 한 때다. 어차피 이곳에서 모든 게임과 개발자들에게 투자할 수는 없을 것이고 고용할 개발

자들은 또 오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도르비치의 예상대로 두 달 즈음이 지나고부터는 SCG Game World를 찾아 개발자들이 하나둘 문을 두드렸다. 문제는 그가 원하는 경력 있는 신인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부 햇병아리들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개발에는 문외한이었던 시도르비치는 일단 필요한 만큼의 개발자들을 모두 고용했다. 항상 그랬듯이 업무를 지시하고 욕설로 대표되

는 재촉과 독촉을 하면 어찌어찌 결과가 나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막무가내식 요구를 잘 이해하고 입맛대로 가공하는 능력이 햇병아리 개발자들에게 있을 리 없다.

[이 머저리들 같으니! 결과를 가져오라고!]

자신은 똑같이 행동했는데 이상하게도 허송세월만 하는 시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SCG Game World는 영문도 모른 채 도산하는 길로 빠져들었고

이를 올렉은 느긋하게 감상했다.

< 목소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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