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소리 >
“‘저희가 어떤 회사를 어느 정도의 규모로 차려야 합니까?’”
“그건 당신들의 능력에 달렸습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개발자를 끌어모을 수 있느냐에 따라서 2차 투자 금액이 결정될 겁니다. 1억 흐리
벤에서 그칠 수도 있고 10억 흐리벤이 될 수도 있지요.”
“10억!?”
허언이 아니다. 나는 최대 30억 흐리벤까지 생각하고 왔으니까.
돈의 단위 때문인지 통역사마저도 한층 더 긴장했다. 그는 이제까지도 열심히 일했지만, 이제는 열과 성의를 다하여 내 말을 전달해 주었다.
“듣자 하니 3A 게임즈던가요? 먼저 나가서 그런 회사를 차린 사람들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왕이면 그들도 함께했으면 좋겠군요.”
“‘저희와 굉장히 막역한 친구입니다. 그들도 자금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으니 이런 좋은 투자자를 잡았다는 걸 알려주면 당연히 좋아할 겁니다.’”
“잘 됐군요. 그들이 우리가 만드는 회사의 산하로 들어온다면, 투자금은 최소 10억 흐리벤 이상이 될 겁니다.”
“‘꼭! 성공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셔야죠. 좋은 결과를 기대하겠습니다.”
“넵!”
*
SCG의 개발자 올렉 야포르스키.
‘거참 이름 더럽게 어렵네.’
아무튼 그와 만난 후 나흘이 지났다. 그간 올렉은 약속대로 3A 게임즈를 설득하고자 시도했고 절반의 성공을 이루었다. 함께하겠다는 확답 대신 나와의
긍정적인 만남까지만 끌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런 식의 설득과 영업을 하는 건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해왔으니까.
‘나는 프로라고.’
올렉과 막시모프, 3A 게임즈의 창업 멤버이자 핵심 개발자 올리와 앤디가 함께한 회담 자리에서 우리는 통역사를 끼고 대화를 나누었다.
“‘단순 투자가 아니라 GF의 게임 사업부에 우리보고 소속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우리가 작은 돈을 투자하려는 것도 아니고 회사를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정도의 자격은 있다고 봅니다. 물론
GF는 한국과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만큼 이곳 우크라이나의 스튜디오 경영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고공행진을 할 될성부른 나무를 저렴한 타이밍에 사는 것에 불과하다. 손을 대면 초대박, 그렇지 않아도 대박이라는 돈다발을 안겨주는데 잔소리를 퍼부
으며 저들을 괴롭힐 이유가 없었다.
“게임 말고는 저희가 간섭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회사의 경영이야 직원들의 처우만 잘 챙겨주신다면 됩니다. 어떻게 운영하든 우리는 상관없어요. 정작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 게임에 대한 간
섭입니다.’”
“문외한의 허무맹랑한 조언과는 다릅니다. GF의 게임 개발 능력은 이미 전 세계에서 검증받았습니다.”
저들이 아마추어라면 우리는 베테랑이다. 몬스터 프레데터스부터 시작하여 바이오펑크에 이르기까지, GF의 기획자와 개발자들은 경험을 쌓았고 이는
재산이자 실력이 된 상태였다.
내가 꿈속 미래의 지식으로 참견하면 S급. 그렇지 않아도 준수한 AAA급 게임을 꾸준히 만들어낼 정도의 역량을 갖춘 것이다. 즉, 우리의 간섭은 축적된
노하우로 저들의 시행착오를 한층 줄여주는 귀중한 가르침과도 같았다.
그러나 사기꾼이나 진짜거나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그 차이를 알기란 매우 어렵다. 특히, 비즈니스에서는 웃는 얼굴로 상대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농락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니 저들은 작은 부분조차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 투자사인 TAQ 역시 꽤 뛰어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지시에 따라서 촉박한 일정에 맞춰 만든 보
이드는 버그 덩어리 그대로 출시할 수밖에 없었죠.’”
이 부분은 꽤 잘 알고 있다. 결국, TAQ의 재촉에 화가 난 SCG의 사장 시도르비치는 보이드2의 유통을 TAQ가 아닌 딥 골드와 계약하게 된다.
‘글쎄. 나한테는 엄청 합리적인 변경을 하는 수준으로만 들리는데?’
재촉 때문에 버그 투성이가 됐다는 건 누군가의 독촉이 없다면 실력껏 준수한 완성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꿈속 미래가 알려준다. 저들
이 제작한 서브웨이 2033은 런 재촉이 별로 없었음에도 버그 덩어리로 출시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니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물론, 우크라이나의 개발자들을 폄하할 의도는 아니다. 단지, 이들은 괜찮은 게임을 개발할 능력과 아이디어, 기획능
력이 있을 뿐, 대형 게임을 만들 정도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 냉정한 평가였다.
‘게임 엔진 역시도 허접하지.’
의욕과 자존심은 노력의 재료일 뿐, 기적을 부르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이들의 게임은 버그 덩어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 말을 면전에서 대놓고 할 수는 없지.’
소위 말하는 사이다 발언은 화자의 입장에서야 통쾌하지 상대방의 처지에서는 모멸감과 멸시를 들이붓는 것과 같다.
‘적당히 납득할만한 이야기를 해야겠어.’
불쾌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했다.
“지금 당신들이 말한 TAQ의 작년 매출이 얼마 정도 되는 지 아십니까?”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TAQ는 작년에 5억 5천만 달러 정도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GF의 매출은 얼마나 될 거 같습니까?”
내가 이 말을 꺼낸 목적은 매우 간단했다. 당신들이 기가 질려버리는 TAQ조차도 나하고 비교하면 애송이다. GF는 게임 사업부만 따로 떼어놓아도 TAQ
보다 더 큰 기업이다. 그러니 그따위 허접한 녀석들과 나를 비교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GF는 순 이익으로만 계산해도 TAQ의 매출보다 높은 이익을 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게임의 완성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죠. 솔직하게 말할까
요? 우리와 함께한다면 보이드 같은 게임은 결단코 출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완성도를 어떻게 세상에 내놓겠습니까?”
믿기 힘들겠지만, 또 믿지 않을 수 없을 이야기일 것이다.
“당신들은 지금 엄청난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겁니다. SCG도 TAQ나 딥골드의 투자를 받아서 게임을 개발해야 하는데 당신들이 그런 게임을 개발하
려면 언제쯤에나 가능하겠습니까?”
3A 게임즈는 지금도 북미의 개발사들의 게임을 외주로 받아서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는 처지다. 언젠가는 자신들도 AAA급 타이틀을 개발할 수 있게 될
거라 기대를 하며 버텨낼 뿐이다.
‘물론 우리가 아니었으면 조만간에 TAQ에서 먼저 접촉해서 투자했겠지만.’
아직 접촉이 없었던 만큼 이들에게는 내가 구세주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흘 전, SCG의 사무실에 가보았습니다. 여기 올렉 개발자와는 그때 만났지요. 거기서 보니 주차장에 자동차가 몇 대 없더군요.”
뒤이어 저들 중 자동차를 가진 이가 있느냐며 물었다.
올렉만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올렉의 자동차는 말이 자동차지 한국에서라면 중고차 시장에서도 구하기 힘들 것 같은 수준의 자동차다. 그런데 그나마라
도 보유한 사람이 그 한 사람뿐이었다.
“개발자들 스스로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모든 개발자의 로망일 테니까요. 그리고 현실에서 실제로 그런 게임을 개
발하는 게임사는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손가락을 차례차례 꼽았다.
“첫째는 이미 완성된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게임사. 지금 개발 중인 게임이 실패하더라도 수익을 충분히 낼 수 있는 개발사지요. 둘째는 인
디 게임입니다.”
네 명의 개발자들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듯했으나 그래도 끝까지 들어보고자 함이었는지 대답을 하거나 말을 끊지
않고 기다렸다.
“지금 당신들이 게임을 개발하면 바로 그 인디 게임이나 개발하게 될 겁니다. 객관적으로 봅시다. 그렇게 개발한 인디게임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지금 당신들은 물론이고 당신들을 믿고 따라온 개발자들까지 전부 자동차를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오랜 시간 SCG Game world의 텅텅 비어있는 주차장을 보면서 출퇴근을 하던 이들에게 자동차라는 것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보이드라는 게임이 얼마나 팔렸습니까?”
“‘200만 장이 넘게 팔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일 플랫폼.
그것도 콘솔이 아닌 PC 패키지 게임이 이 정도로 많이 팔렸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직 자동차가 없으시군요.”
“······.”
“저는 시도르비치와 다릅니다. 여러분이 개발한 게임이 그런 성공을 거둔다면 여러분은 당장 자동차를 사러 가게 될 겁니다. 허접한 중고 자동차 말고 서
유럽이나 미국에서 건너오는 신차로 말이지요.”
사람마다 자신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아이템은 제각각이다.
시도르비치가 얼마나 멸시를 줬는지 이 개발자들은 자동차에 눈이 붉어질 정도였다.
“그러니 지금 제가 손을 내밀 때 잡으세요. 그리고 확실한 프랜차이즈 게임을 개발하고 그 성공을 발판으로 만들고 싶은 게임도 함께 만들면 됩니다. 다
시 말하지만 저는 시도르비치와 다릅니다.”
“‘하겠습니다.’”
결국, 개발자들 전원은 나의 손을 잡았다. 이로서 나는 서브웨이 2033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 올렉과, 막시모프, 3A 게임즈를 확보했다는 것은 내 생각
보다도 더욱 큰 영향력이 있었다.
괜찮은 회사와 대박 날 게임 정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게임계 전체를 손에 넣은 叩?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를 실감하는 건 딱 사흘이면 충분했다.
올렉의 대표로 둔 새 회사, 보르타 게임즈를 시작하며 채용공고를 냈을 때 엄청난 지원자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몇 명이요?”
“‘지금까지 총 400명의 개발자들이 모집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개발자들이 우리와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에 이걸 어찌해야 할지······.’”
나는 ‘당신들의 능력에 맞춰서 회사의 규모를 결정해라, 돈은 거기에 맞춰주겠다.’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키예프는 물론이고 저 멀리 리비우주에서도 이
들의 신생 개발사에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이 나 버렸다.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여러분이 우크라이나에서 유명한 개발자라고는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군요.”
“‘아닙니다. 연봉을 많이 주시기 때문이죠.’”
‘역시 자본주의.’
확실히 다른 회사에 비해서 많은 돈을 주기는 한다. 그런데 이건 우크라이나 기준이다. 한국 돈으로 신입에게는 240만원. 올렉이 3,600만원인데 이건
월급이 아니라 연봉이다.
이 급여가 우크라이나에서는 ‘헉’ 소리가 나는 액수였다.
‘하긴 올렉과 같은 감독급 개발자들은 연봉이 여덟 배나 오른 셈이지.’
그 외의 경력을 인정받은 개발자들도 다섯 배나 올랐다. 굳이 이렇게까지 돈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외국에서 온 투자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연봉으
로라도 충성심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미였다면 올렉 정도의 인재는 최소 1억이 넘는 연봉을 줘야 한다. 이 정도는 딱히 많은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추세라면 지원자가 1,000명이 넘는 것도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많기는 한데, 다 받아줄까?’
한국 개발자 연봉의 10% 수준만 줘도 되는 인력들. 한국에서 한 명을 뽑을 때 여기에서는 10명을 뽑을 수 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람이 많다고 좋은 퀄리
티의 게임이 계속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돈이 많다고 허공에 붓는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지.’
영리하게 써야 한다.
“딱 500명까지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적당하리라 본다.
그리고 1주일 후.
우리는 500명이라는 엄청난 개발진을 확보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회사는 이런 대규모 인원이 작업을 할 사무실이나 비품 등이 아직 확보되지 못한 상
황이라서 일단, 개발자들에게 입사는 2개월 후부터 하는 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하위 개발자들은 기다리게 두어도 상관없지만 핵심 개발자들을 그리 놀리는 건 지나친 낭비다. 이를 위해 올렉에게 지시했다.
“주요 개발자들을 챙겨서 한국에 다녀와야겠습니다.”
“‘한국이요?’”
서브웨이 2033은 물론이고, 이들이 앞으로 개발할 게임들은 GF에서 개발한 엔진을 활용하게 될 것이다.
“우리 GF 엔진 활용법에 대해서 배우도록 하세요.”
처음부터 범용 엔진으로 개발된 엔진인 만큼 따로 배우지 않아도 금방 익힐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배운 것과 안 배운 것은 그 활용도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니 시간이 있을 때 한국에 가서 직접 개발진들에게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배워서. 우크라이나의 상징과도 같은 게임을 만들어 봅시다. 그럼. 2개월 후에 보도록 하죠.”
“‘회장님은 한국에 안 가십니까?’”
“한국보다 더 중요한 곳이 있어서요.”
고급 인력이 능력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나라는 비단 우크라이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바로 이 옆에 붙어 있는데 여기까지 와놓고 그냥 돌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폴란드에서 챙겨갈 물건이 있지.’
소설이 원작이었고 장차 국가를 대표하는 게임이 될 그 작품은 워쳐였다.
< 목소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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