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소리 >
혹시라도 기분이 조금 달래질까 해서 태우는 담배 연기가 입안을 텁텁하게 만드는 만큼이나 속이 답답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에 주차장이 들어온
다.
[개새끼.]
[젠장. 이렇게 보니까 기분이 더 더럽네.]
주차장에 있는 차량은 총 네 대였다.
하나는 15년도 더 된 중고차로 올렉의 자동차였고, 나머지 두 대는 사장 시도르비치의 것이다. 회사 주차장에 자동차라고는 늘 4대의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 세 대가 시도르비치의 것이었다.
2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있던 때도 지금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올렉은 연식이 15년이라도 된 중고차라도 있지 다른 직원들은 그 누구도 자동
차를 구매할 엄두조차 못 냈다.
‘사장 놈은 유통사에 간다고 했었는데 네 대가 세워져 있다고?’
그 사이 또 차를 한 대 더 구매한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돈 버는 사람 따로, 쓰는 사람 따로 있다. 올렉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확 이딴 회사 때려치워 버리고 잘린 다른 직원들 모아다가 회사나 차려 버릴까?]
[그래. 네가 차리고 나 좀 데려가라.]
[무조건 시도르비치가 피눈물 흐르게 만들어주는 거야. 버젓이 그 새끼만 방해하자고.]
[맞아. 아주 집요하게 무너뜨리는 거지.]
흡사 달걀 열 개에서 병아리가 나오고 이를 잘 키워서 닭이 되면 100개의 달걀에서 병아리가 무럭무럭 자라 거대한 양계장의 주인이 되는 식의 기분 좋
은 꿈이었다. 돈만 아는 사장이 게임 개발이나 회사 운영을 제대로 할 리 없으니 제대로 한 방 먹여줄 수 있을 것이다.
[······어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쳤으나 그만큼 이내 우울해졌다. 이 모두가 딱 하나가 부족해서다.
[회사를 차릴 돈이 없어.]
[맞아. 어디서 갑자기 투자자가 튀어나오면 모를까.]
그렇게 둘이 한창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차되어 있던 차량 한 대에서 웬 동양인들이 나오고 있었다.
‘뭐야? 저거 사장 놈 차 아니었어?’
우크라이나에서 보이는 동양인이라면 십중팔구는 중국인이다. 올렉은 이 중국인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을까? 생각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알 수 없는 언어를 지껄이며 저들이 웃었다.
‘쳇. 팔자 좋은 놈들이구나. 저런 자동차를 사려면 돈을 얼마나 모아야 하는 걸까?’
자동차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서유럽에서도 명품으로 통하는 고급 자동차이니 척 봐도 최소 자신의 10년 치 연봉은 필요할 것 같았다.
참으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사는데 사람마다 삶의 모습이 달랐다.
올렉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들에게 저들이 다가왔다.
[여기가 SCG Game world 맞습니까?]
중국인들만 보여서 몰랐는데, 그들 사이에 우크라이나 사람이 있었다. 담뱃불을 꺼뜨리며 그가 대답했다.
[맞습니다만, 사장님은 지금 회사에 계시지 않습니다. 사장님을 만나러 오신 거라면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 정도 차량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 그냥 게임 회사에 구경이나 하러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만큼 올렉은 약간 감정이 상하긴 했어도 나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중국인이 뭐라고 지껄였고 통역으로 보이는 우크라이나 인이 말했다.
[본의 아니게 대화하시는 걸 들었는데. 여기 개발자분들 맞으시죠?]
[그렇습니다만?]
[반갑습니다. 이분은 한국에서 오신 윤태식 회장님이십니다.]
*
미녀들의 나라 우크라이나.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예쁜 여배우급의 여자들이 밭을 갈고 있다는 나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관해 알려진 대중의 이미지는 딱 이
정도일 것이다.
‘그 이상이라고 해봐야 러시아에서 독립한 나라겠지.’
물론, 나처럼 목적을 갖고 직접 찾아본 부류는 더욱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전체 GDP 중에서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30%나 되어 유럽의 빵 바구니,
소련의 식량창고 등의 별명을 가진 나라라는 것.
1인당 GDP는 2,000달러로 세계 109위에 이르는 최빈국 중 하나.
그런데도 세계에서 우주선을 자체 제작 발사가 가능한 7개국 중 한 곳.
X-Ray, 헬리콥터, CD, 우편 번호, 가스램프를 발명한 나라.
이런 곳이 바로 우크라이나다. 그리고 여기에 내가 찾아온 이유는 당연히 아름다운 미인과의 황홀한 데이트 때문이 아니었다. 세계 109위라는 가난한 나
라임에도 예상외의 저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는 예상외로 IT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했기에 프로젝트 X를 위한 신흥 시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우리한테는 천국이랄 만큼 환상적인 곳이지. 나름대로 게임을 만들만한 인력이 충분히 존재하는 데 이들의 인건비가 고작 초봉은 140달러잖아.’
한국 돈으로 16만 5,000원 수준.
중견 이상의 개발자들도 고작해야 30만 원이면 쓸 수 있다.
판타스틱 그 자체!
게임을 개발할 때 가장 많은 비용이 무엇일까? 바로 인건비다. 게임은 개발인력에게 들어가는 돈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그 개발인력의 비용
이 한국의 10% 수준도 안 되면서 수준은 한국과 비슷하다면 이런 시장을 놓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여기에는 서브웨이 2033이 있거든.’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우크라이나를 듣는 순간 미녀들의 나라를 떠올렸을 테지만 겜돌이는 다르다. 명작 게임인 서브웨이 2033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
우크라이나까지 날아왔다.
“이것저것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김유천 실장은 한국 내에만 있을 때는 꽤 답답해하는 것 같더니만, 해외로 나오니 어딘가 해방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따로 이야기도 안 했는데, 이미 SCG
에 대해서 자료를 준비한 모양이다.
“알아보니까 일단 이곳 사장 시도르비치라는 자는 돈 욕심이 엄청난 것 같더군요.”
그럴 것이다. 안 그래도 그 욕심이 너무 엄청나서 직원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회사를 떠나게 되고 그렇게 차려진 회사가 여러 개나 되었으며 그중 하나
인 3A가 서브웨이 2033을 만든다.
“그래요?”
“아무래도 주로 투자를 받는 유통사가 있어서 어지간해서는 투자를 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들어주니까 김유천 실장은 수다쟁이가 되어 신나게 말을 이었다. 바로 그때, 내 눈에 주차장에서 씩씩거리며 열변을 토하고 있
는 두 사람이 보였다.
“잠시만요.”
“네? 저 지금부터가 중요한 얘기입니다만···”
“됐으니까. 쉿.”
“네.”
외국어로 욕을 잔뜩 하는 무뢰한들인데 내 감각이 알려준다. 이건 좋은 느낌이라고 말이다. 나는 통역사에게 물었다.
“저들이 뭐라고 하는지 여기에서 듣고 통역해 주시겠습니까?”
“음··· 대부분이 욕인 데다가 정작 필요한 이야기는 작게 해서···”
“이런. 못 하신다는 거군요?”
대놓고 실망감을 표출하는 내 모습에 통역사는 순간 긴장한 표정이 되어서는 어떻게든 저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럼. 그 정도는 해줘야지.’
돈을 받으면 최소한 돈값을 해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심지어 일당이 무려 80만 원자리 통역사인데 말이다. 그 돈을 받으면 이쯤은 확실하게 해줘야 하
는 거다.
미간을 찌푸리고 신경을 집중했던 그가 말했다.
“이번에 사장이 대량 해고를 예고한 모양입니다. 저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장에게 매우 적대적인 듯 보입니다. 그리고 확 회사를 차
려서 전 사장을 망하게 할 구체적인 계획을··· 아··· 그런데 돈이 없어서 그건 곤란한 모양입니다.”
동시통역까지는 무리였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좋군요. 갑시다.”
혹시라도 이 사람들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갈까 급히 차에서 내렸더니, 남은 두 사람도 놀란 얼굴로 따라 내렸다.
애초에 나는 이 회사에 투자할 마음이 없었다. 처음부터 핵심 인력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을 뿐이다.
‘돈만 밝히는 쓰레기 같은 사장에게 투자해줘 봐야 결국 쓰레기 혼자 배가 터지도록 먹어치울 뿐이겠지.’
사장에게 불만이 가득한 이 개발자들을 회유하고 투자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곳의 개발자들이라면 장차 3A 게임즈를 만들 인재들에 대
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통역하세요.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개발자분들이 맞으시죠?”
그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를 일일이 전부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큼은 분위기로 전달하고자 했다. 우리는 지
금 엄청난 투자를 위해 이 자리에 왔으며, 그 대상이 당신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 카페 같은 곳이라도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눕시다. 여기는 영 분위기가 아닌 것 같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우리가 건넨 GF그룹의 명함은 그들이 상황파악을 하기에 앞서 일단 카페로 먼저 안내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른 나라에 가면 역시나 다른 문화를 자주 접하게 된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냐고 물어보네요.”
“그러라고 하세요.”
올렉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에게 통역사가 괜찮다는 말을 하자 그들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카페에서의 흡연은 물론이고 투자자를 앞에 두고 담배를
피워대는 건 나로서도 제법 생경한 경험이다.
‘너드라서 이들도 독특한 거려나?’
우크라이나를 성급하게 일반화하기보다는 게임에만 몰두하는 게이머나 개발자들이라서 보이는 특색이라고 보는 게 좋겠다. 저들에게 내가 온 이유를 알
려주었더니 알렉이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희에게 투자를 해주시겠다는 말씀이 맞습니까?’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 제대로 통역하신 거 맞죠?”
“네. 하나도 거르지 않고 그대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물어본다는 것은 그만큼 갑작스러운 이런 투자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일 터.
“‘대체 저희의 무엇을 믿고 투자를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통역사의 말을 들은 김유천 실장이 옆에서 그들의 말에 동의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양반이. 지금 당신이 여기서 같이 고개를 끄덕이면 어떡하자는 거야?’
당연히 황당할 것이다. 처음부터 당신들이 이곳의 개발자가 맞냐는 질문을 했을 때부터 이미 이 사람들을 알고 찾아온 것도 아니라는 걸 밝힌 셈이다. 그
렇다면 그들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턱대고 찾아온 건데 투자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의심하는 건 상식적인 선택이다.
“제가 이래 보여도 게임사를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대충 분위기만 봐도 어느 정도의 개발자겠구나, 이런 게 나와요. 뭐 호칭이야 회
사마다 제각각이니 알 수는 없고 대충 중간 관리자급의 개발자가 맞으시죠?”
통역사의 통역을 듣고는 알렉과 막시모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작년에 출시한 보이드가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알아보니 회사의 전체 인력이 움직인 것 같고 당신들 정도면 핵심 개발자로 짐작하는데, 틀
렸나요?”
이번에는 통역이 필요 없었다. 자신들이 맞다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으니까.
“아주 좋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투자할 용의가 있습니다. 우선 1차로 20억 원인데··· 여기 돈으로 하면 얼마 정도인 거지?”
흐리브냐인지 흐리벤인지, 그냥 유럽에 붙어 있으면 유로나 쓰지 뭔 자체 화폐를 사용해서 계산이 복잡해지게 하는지 모르겠다. 통역사가 재빨리 알려주
었다.
“대충 4,400만 흐리벤에서 4,500만 흐리벤 사이쯤 될 것 같습니다.”
“그럼 4,500만 흐리벤을 1차로 투자할 거라고 전해주십시오.”
잠시 후 알렉과 막시모프가 황당하다는 시선을 내게 보였다.
“‘사천 오백만이요?’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게임 투자치고는 좀 작지요?”
걱정하지 마라. 아무리 여기가 값싼 노동력을 구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라고 하더라도 20억으로 게임을 만들라고 할 생각은 없다.
“그냥 4,500만을 투자한다는 게 아니라 일단 1차로 투자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게임 개발을 위한 투자가 아닙니다.”
이어지는 통역사의 말을 들으며 두 사람은 그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일단 게임을 만들려면 회사가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4,500만 흐리벤은 그 회사를 차리기 위한 비용입니다. 게다가
개발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비용이죠.”
“‘저희가 그 투자금을 가지고 그냥 도망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그 말에 나는 빙긋이 웃었다.
한국인들은 백인들이 사는 서양 국가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는데, 사실 유럽의 대부분 국가는 한국과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시민의식이 떨어진
다.
20억이면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도 절대 작지 않은 돈이다. 소위 말하는 ‘먹튀’의 유혹이 찾아올 수 있다.
“한국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에는 이름표가 없다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올렉이라고 하셨던가요?”
“‘네.’”
“그런 건 다 서민들의 이야기이고 부자들의 돈에는 이름표가 있습니다. 내 돈을 가지고 도망간다? 못 잡을 거 같습니까? 장담컨대 우크라이나는 물론이
고 중국과 미국에서 당신들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찾아낼 겁니다.”
진지한 내 모습에 두 사람은 물론이고 통역사까지 꿀 먹은 벙어리마냥 눈알을 내리깔았다. 피우던 담배를 조심히 끈 그들이 카페의 테이블에 시선을 고
정했다.
< 목소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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