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소리 >
‘괜찮아. 듣다 보면 이해될 거야.’
사장들과의 협의가 끝이 난 후 이들에게 내가 원하는 세 가지 콘셉트를 공지했다.
“첫 번째는 지능 개발 게임입니다. 퍼즐과 같이 두뇌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고 클리어해나가는 게임. 그런 게임이 첫 번째 콘
셉트입니다.”
한국은 콘솔의 불모지다. 이런 불모지에서 닌텐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일까? 바로 게임하고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지능 개발이라
는 키워드 때문이었다.
게임을 주로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학생이지만, 그 게임을 구매할 경제력을 갖춘 사람은 그들의 부모님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모는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길 원하는데 게임이라는 것은 그것을 정면에서 막아서는 장애물 같은 존재이다.
‘그렇다고 부모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
수단이 썩 현명하지 못해서 회초리와 잔소리로 비칠 수 있으나 이 역시 사랑하는 마음에 비롯한다. 그러니 자식의 간절한 바람을 무작정 외면하는 부모
님의 마음도 편한 것만은 아니다.
바로 마음 한편에 있는 미안함을 깨트려버리는 절충점이 지능개발 게임이다.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여주고 또 그것으로 학습 효과라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다면 이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으랴.
게임기기가 아닌 학습기기로 속여 파는 상술!
닌텐두의 마케팅은 바로 그렇게 해서 성공을 이룬 것이다.
“두 번째 콘셉트는 가족입니다.”
게임의 성공을 위해선 가족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콘텐츠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아야만 한다. 과거 그리스에서는 토론이 유흥의 중심이었고, 책은 젊은
청년들이 토론장에 나오지 않게 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규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가 없는 생각이지만, 당시의 철학자들은 책.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은 젊은이들을 망치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불리며 사유와 철학의 상징과도 같아졌다.
‘매체의 발달이 이렇지.’
TV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금시초문이겠으나 내가 어린 시절에는 TV를 보고 있으면 바보가 된다 하여 ‘TV=바보상자’라는 공식이 성
립했다.
이렇듯 기성세대에게는 그들만의 유흥거리가 있고 이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유흥거리는 무시와 천대, 더 나아가서는 탄압을 받는 현상
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가족이라는 키워드에서 해답을 알 수 있다.
다 함께할 수 있는 지금의 TV의 포지션에 합류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실제로 닌텐두의 뷔가 성공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지.’
이런 걸 예리하게 짚어서 성공해낸 것을 보면 닌텐두가 참 대단한 기업이기는 하다.
“마지막 콘셉트는 잠입과 암살을 주제로 한 게임입니다.”
굳이 콘셉트에 잠입과 암살을 이용한 게임을 개발하라고 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인들이 재능을 보이는 분야니까.
‘건전한 키 포인트는 두 가지면 됐다. 세 가지 전부 다 건전할 필요는 없어.’
국내에서 개발한 게임들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한국인들은 유난히 은신, 잠입, 암살, 자객 뭐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정작 한국
의 게임 개발사들은 그런 게임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걸 내세웠다. 부디 진짜로 할 만하면서도 끝내주는 국산 잠입 액션 장르의 게임이 나와 주기를 기대한다.
“여러분도 잘 시다시피 우리 GF와 손을 잡으면 저희의 엔진은 무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100억의 투자를 받게 되는 개발사에는 콘솔 게임에
많은 경험이 있는 우리 개발자들을 파견 보내 드릴 것입니다.”
이들 입장에서는 성공만 한다면 3M이라 불리는 국내 최대의 대형 개발사들도 가지지 못한 귀중한 경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GF그룹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겠지만, GF그룹의 지원과 함께 100억이라는 투자금만 있다면 이들도 스스로 AAA급 게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하겠습니다.”
“지금 개발하고 있는 게임들 다 중단하고 당장이라도 새로운 게임을 기획해보겠습니다.”
구체적인 지원이 더해지자 저들의 마뜩잖던 처음의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웃으며 우선 진정시켰다.
“일단 지금 개발하고 있다는 그 게임들. 우선 그 게임에 대한 자료를 GF로 먼저 보내주세요. 이미 개발 중이라 했으니 만약, 마음에 드는 게임이 있다면
해당 게임에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입장에서야 혹시나 좋은 게임이 이미 있다면 그걸 나중으로 미룰 필요가 있냐, 이런 생각이었지만, 사장들에게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럼 다음에 좋은 기획이 있으면 그때 다시 뵙도록 하죠.”
감동한 저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간석 사옥을 떠났다.
한편.
“회장님. 저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김유천 비서실장이 돌아오는 차에서 내게 물었다.
“뭐 하러 국내의. 그것도 이런 작은 규모의 개발사에 투자하시려는 겁니까?”
“1,700억씩이나 말이지요?”
“네. 그 돈이면 이미 북미에서 검증받은 개발자들을 끌어올 수도 있고 그 개발사들에 우리가 원하는 게임을 개발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이미 검증받은 개발진이 1,500억으로 다섯 개의 게임만 개발해도 사실 따지고 보면 어설픈 개발사에서 15개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성공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내가 조금의 부정도 없이 모두 긍정하자 김유천 비서실장이 외려 의아해했다. 잘 알면서 왜 그러느냐는 시선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 콘솔 개발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나는 그 합리적인 생각을 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나쁜 생각이라서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네? 나쁜 생각이요?”
“좋은 개발사에 300억씩 쥐여주고 좋은 게임을 공급받으면 우리 콘솔의 입장에서야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국내
게임 산업은 언제 성장할까요?”
모두가 경력 있는 신입을 원하면 정작 진짜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겠는가.
애초에 이 사업은 대한민국 산업에서 게임이라는 분야가 주류로 떠오르게 만들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배제한다니.
그럴 거면 시작도 안 했다. 아울러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또한, 굳이 지금 미국의 게임사들에 투자해서 그들 좋은 일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요”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그거 끝난 거 같죠?”
대규모 집값 하락으로 인해서 수많은 미국인이 빚더미에 앉게 된 사건. 그러나 미국이라는 막강한 경제력으로 인해서 그것은 금방 안정화가 된다···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진정한 폭탄은 아직 터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쾅 하고 터져나갈 때가 쇼핑할 최적의 기회지.’
그때는 돈만 있으면 먼저 줍는 놈이 임자인 회사들이 넘쳐나게 된다.
나는 지금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
SCG Game world의 개발 2팀 팀장인 올렉 야포르스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고용주와 마주하고 있었다.
[개발 파트 3팀은 이번 달까지만 두고 바로 해체하기로 했으니 앞으로 제이콥스키의 팀에서 인계받아서 마무리 짓도록 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현재 개발하고 있는 게임의 전작은 무려 200명의 개발자가 붙어서 개발했던 게임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후속작을 개발하라고 하
면서 핵심 인력을 제외한 개발자들을 전부 잘라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게임을 개발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인력으로도 겨우겨우 해나가고 있는데 무슨 수로···]
[하여간 우크라이나 놈들은 게을러서 문제라니까. 하라면 하는 거지 뭔 말이 그리 많아?]
사장인 시도르비치는 마치 본인은 우크라이나 사람이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네 놈들이 돈 받고 하는 일이 뭔지 알기는 해?]
능멸하는 그의 말에 올렉의 표정이 굳어진다. 속에서 울컥 치미는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하고 억지로 억누르고만 있을 따름이다. 그리
고 그렇게 딱딱하게 굳은 채로 불만스러운 속내와 싸우는 그의 얼굴로 서류 더미가 날아왔다.
[그 얼굴은 뭐냐? 너희들이 지금 누구 덕에 그렇게 제때 급여를 받고 일하는 건데!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그딴 표정이나 짓고 있어!?]
‘더러운 놈. 이 게임으로 벌어먹은 돈이 얼만데 급여를 더 챙겨주지는 못할망정!’
SCG Game World는 작년에 신작 게임인 ‘보이드 : 체르노빌’을 출시했다. 이 게임은 무려 200만 장이 넘게 팔리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고 올렉이 알
기로 SCG가 벌어들인 돈은 무려 3억 흐리벤(우크라이나 화폐 단위 흐리브냐의 복수형 : 3억 흐리벤 약 130억 이상)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많은 돈을 벌어들인 게임을 제작했음에도 정작 게임사의 직원들은 결코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인격적인 모독에
멸시까지 당한다.
자괴감과 분노!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의 비정함이 이 들끓는 온도에 냉각수를 퍼부었다. 올렉의 심경이 복잡한 이유였다. 시도르비치가 혀를 차며 짜증만 난
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한심하기는. 됐고, 나는 유통사 만나서 투자에 관해 이야기할 것 있으니까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상황정리 확실하게 해놓도록 해.]
[그럼 최소한 남아 있는 직원들 급여라도 조금 더 챙겨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여간 게으른 놈들이 욕심은 더 많다니까.]
[네?]
[이봐. 네놈들이 노예야?]
올렉은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어서 눈을 끔뻑이며 사장을 쳐다보았다.
‘노예라니!’
소비에트 연방에서 탈퇴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사실은 연방의 노예와 마찬가지였다 라는 사실에 크게 분노했었다.
그뿐이랴.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속해 있는 인종인 슬라브(Slavs)족. 이들이 워낙에 유럽에서 노예로 많이 팔려다녔던 이력 덕분에 영어로는 노예를 슬레
이브(Slave)라 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특히 노예라는 단어를 혐오했다.
그런데 시도르비치가 무려 이 말을 쓴 것이다.
[딱 주는 만큼만 일하려고 들면 그게 노예지 뭐가 노예야?]
자신만의 논리를 가진 훌륭한 개소리가 이어졌다.
[자고로 자주정신을 가진 직원이라면 10만 흐리벤(약 45만 원)을 받으면 20만 흐리벤 만큼을 일해서 고용주가 미안해서라도 돈을 더 주고 싶도록 일해
야 하는 거 아닌가?]
이미 이곳의 직원들은 받은 값의 두 배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개소리를 계속 들어주어야 하는 것일까?
‘이 새끼! 뻔히 다 알면서!’
그가 알고 자신도 잘 이해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이곳을 나가면 자신에게 이만큼의 급여를 줄 만한 곳도 얼마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시도르비치가 저런
식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올렉이 지금 받는 급여는 10만 흐리벤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취업하기 전 그가 받던 급여는 월에 3만 흐리벤이 되지 못하는 돈이었다. 폭언과 욕설에 맞
대응하면서 버리기에 매달 7만 흐리벤은 너무나도 가혹한 액수였다.
[그러니까 이런 쓸데없는 논쟁은 여기서 그만하도록 하지. 난 그렇게 알고 나가볼 테니 잘 좀 하라고.]
시도르비치는 그 말을 끝으로 올렉의 어깨를 툭툭 치더고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올렉은 눈빛만으로는 몇 번이나 살인을 저질렀을 것 같은 시선
으로 그가 나간 곳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든 그가 동료를 찾았다.
[막시모프.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자.]
[나가서? 그냥 안에서 피우지?]
[그냥 실내가 답답해서 그래.]
실내 흡연에 별다른 간섭이 없는 회사였기에 그냥 자리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었지만, 올렉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막시모프는 조용히 담배와 라이
터를 챙겨서 올렉의 뒤를 따랐다.
탁 트인 곳에 나오자마자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빌어먹을 새끼 같으니.]
[왜 그래? 사장 놈이 또 이상한 소리를 했어?]
[3팀 해체한단다.]
[뭐? 이런 개 같은 놈이!]
발끈했던 막시모프 역시 말로는 갈아 죽여버릴 만큼 욕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공허한 뒷말일 뿐 이내 답답한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사장이 해체한다
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들의 입장이다.
[···언제까지래?]
[이번 달까지.]
[아니. 그렇게 갑자기 해체한다고 해버리면 애들은? 걔들은 어떡하라고? 게임이 망해서 인력을 줄여야 하는 거면 그런가 보다 할 텐데 충분히 돈을 벌어
놓고 왜 다 내보내겠다는 건데?]
< 목소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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