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99화 (399/577)

< 목소리 >

GFI의 공동 회의실은 누가 보아도 ‘IT업종의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미래적이면서 세련 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과거 게이머스 포럼이 있던 시절과

비교하면 같은 건물이라는 것이 의심될 만큼의 많은 변화였다.

하얀 회의실 테이블 역시도 공동으로 사용하는 비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하게 관리가 되는 것 같았다. 이 공간에 19명의 인원이 모였다.

“반갑습니다. GF의 윤태식입니다.”

현재 GFI에서 관리하는 입주기업은 총 17개.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는 총 17개의 개발사 사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일로 GF의 회장이 직접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하는 호기

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대충 예상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이곳에 직접 찾아온 이유는 이번에 GF에서 새로이 시

작하는 콘솔 사업 때문입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반응하는 사장이 몇이나 될까 하는 시선으로 쭈욱 둘러보는데, 다행이랄까? 모두 다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인다.

“이건 좀 예상외네요. 몇 분 정도는 놀라는 반응이 있을 줄 알았는데요?”

“이미 저희가 개발한 게임들은 전부 클로버 스팅에 올라가 있는 상태거든요. 굳이 회장님이 여기까지 오실만한 이유는 최근에 공개된 콘솔기기 말고는

딱히 없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하긴. 내가 굳이 찾아오겠다고 한 이후로 이 사람들끼리 계속 대화를 나눴을 테니 결론이 날 만큼 대화를 하긴 했겠지.’

“저희가 궁금한 것은 GF의 콘솔 사업에 저희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느냐는 부분입니다.”

하긴, 영세한 개발사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콘솔 게임 하나를 개발하기도 힘들 테니 별로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대화가 아주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넘어가게 됐네요. 좋아요. 일단 지금 이 부분은 화면을 보면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곧이어 회의실 내부가 어두워지졌고 한쪽 벽에 프로젝트로 화면이 나타났다.

「2,231.」

「100억,」

「17.」

별다른 내용도 없이 그저 몇 개의 숫자만 보이는 화면이다. 무슨 암호문을 보여주는 것 같은 내용에 다들 고개만 갸웃거렸다.

“2,231은 2008년 현재 대한민국에 등록된 개발사의 숫자입니다. 상업적인 게임을 개발하는 회사들만 추려서 2,231개라고 하더군요. 이들 개발사 중에

서 매출 100억을 넘기는 회사의 총 숫자가 17개입니다.”

이어서 화면의 숫자가 바뀌었다.

「5,800,000,000,000」

“이 숫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시겠습니까?”

무엇이든 게임과 관련 있으리라는 단서를 토대로 저들이 대답했다.

“대한민국 게임 시장의 규모가 아닐까 싶습니다.”

“맞습니다. 작년 한 해. 대한민국 게임 산업은 5조 8천억이라는 거대한 규모의 시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시장에 연 매출 100억을 넘기는 기업

이 고작 17개라는 것은 그만큼 몇 개의 기업에서 모든 매출을 다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열일곱 개의 기업이 매출 대부분을 끌어가고 있다는 말은 게임 개발사가 숫자만 많을 뿐, 대부분이 영세한 기업이라는 뜻이 된다.

사실 국내 게임 시장의 규모와 비교해서 영세한 개발사가 많고, 적다는 것은 딱히 내가 신경을 쓸 부분은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국내 게임 산

업 그 자체다.

‘생존을 위해서 다양성이 사라지니까.’

2,231개의 회사 중에서 매출 100억을 넘기는 회사가 17개 있다면, 17개를 제외한 모든 회사는 저 17개의 회사가 진행하는 방식에 맞춰서 게임을 개발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과거 아이스 스톰의 스타드래프트가 대박을 치자 국내 게임사들이 우후죽순으로 RTS 장르의 게임들을 개발했다. 그뿐이랴. 메피스토2와 MC소프트의

플레지가 대박을 치자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들과 비슷한 분위기의 게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었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뉴 온라인 역시 메피스토2의 짝퉁이지.’

이렇듯 그것을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는 조금도 상관없다. 17개의 기업이 게임 산업을 이끄는 기업이 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많은 점유율을 보유하면 대다수의 게임 개발사들은 어쩔 수 없이 해당 게임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하게 ‘시장에서 대중들에게 먹히는 걸 봤으니 우리도 따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해당 스타일에 익숙해졌다는 것에 포인트를 맞춰야 한

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틀에서 너무 벗어나게 되면 극소수가 ‘새롭다’는 느낌을 받아서 대박이 나고 대다수는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아서 쫄딱 망하고

만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아니지.’

안타깝지만 생각보다 사업을 해보면 하이 리스크를 성공시켰음에도 로우 리턴인 경우가 상당하다. 그러니 많은 기업들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아니

라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을 강요받게 된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 게임 산업을 이끌어가는 기업은 어디일까?

일반적인 게이머들에게 열에 아홉은 바로 우리 GF 그룹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게임 개발사들에게 질문한다면 다른 대답이 나온다.

MC소프트, 맥슨, MHM.

일명 3M으로 불리는 게임사다.

‘우리는 워낙 전 세계에 판을 크게 깔아놓고 그것을 토대로 수익을 당기는 거라서 국내의 일반 게임사들이 따라 할 수가 없지.’

어쭙잖게 흉내 냈다가는 수익 악화로 망하게 되는 구조다. 반면에 3M은 너무나도 좋은 롤 모델이 되어주고 그 탓에 국내 게임들은 질적으로 하락하고 말

았다.

“결국 3M이 선도하는 방식으로 게임 산업이 이끌려가다 보니 게임성의 힘으로 지갑을 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갑을 열지

않고는 즐길 수 없는 게임이 한국 게임사들의 주류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를 무조건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 탓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애초에 우리나라의 게임 산업이 이런 행태로 발전을 하게 된 이유도 살아남기 위한 나

름의 몸부림이기도 했으니까.

과거 PC 패키지 게임을 살리기 위해서 클로버 스팅을 만들었던 이유처럼 대한민국의 게이머들은 게임에 돈을 쓰면 바보라는 인식이 강했다.

‘양심에 손을 얹고, 이걸 감히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덕분에 과거에 잘 나가던 대형 게임 개발사들은 지금 자취를 감추었고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온라인 게임 개발사들이 대형 기업으로 성장하고 말

았다.

“대한민국의 게임 시장은 충분히 커졌습니다. 시장이 커졌다는 것은 게이머들이 게임에 그만큼 돈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렇다면 다시금 되짚어

볼 차례입니다. 과연 지금의 게이머들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을까요? 그들의 의식은?”

시장 규모가 5조 8천억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장들은 ‘그렇다’라는 대답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아무도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않은가.

과거 시절과 비교해 경제력이 올라갔고 문화가 발전했다. 그만큼 구매력도 높아졌으며 비대해진 시장규모가 이를 버젓이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이

들은 게이머들의 인식이 변했다고 대답하지 못할까?

‘안 변했으니까.’

맞다. 아직 게이머들의 인식은 그대로다.

‘조금은 바뀌었다고 할 수 있지. 조금쯤은.’

클로버 스팅의 등장으로 나름대로 게임을 구매해서 하는 이용자들이 약간이나마 늘어나긴 했다. 과거에는 패키지 게임을 내놓고 10만 장 정도를 팔면

대박라고 보았으나 이제는 20만 장 이상은 팔아야 대박이라고 할 수 있으니 딱 그만큼 나아지긴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국내 대형 게임사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 때문에 게이머들은 게임에 돈을 쓰는 것에서 묘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자충수지.’

부분 유료화 게임의 특성을 이용해서 게이머들의 돈을 갈취 아닌 갈취를 하는 시스템 때문에 게임에 돈을 쓰면 호구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동안 게이머들이 게임을 보는 시선이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게임을 보는 시선을 바꿔보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

다.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도 올렸다고 생각합지요.”

다행히 이 자리에 있는 사장들은 이 말에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는 게이머들을 바꾸거나 사회의 시선을 바꾸는 것을 바꾸려 노력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노력해보려 합니다. 바로 게이머들만 변하라고 강

요하는 것이 아닌 우리부터의 변화. 즉, 여러분과 같은 게임 개발자들이. 더 나아가 게임 그 자체가 변할 때입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듣기에만 좋고 실효성이 없을 수 있고 그 반대도 있다. 당연히 나는 후자에 속하며 이제부터 실질적인 방침을 거론했다.

“말로만 게임이 변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당장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게이머들의 니즈를 다 채워주

다간 개발사가 먼저 굶어 죽습니다.”

창의적인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 고뇌해본 이들은 더욱 이 말이 와닿을 것이다.

“그래서 약속드립니다. 제가 세 가지 콘셉트를 드릴 테니 여기에 맞춰서 게임을 기획해서 가져오십시오. 만약 그 기획이 저의 마음에 든다면 그 자리에

서 바로 100억을 투자하겠습니다.”

“백억이요!?”

이 자리에 있는 개발사들의 1년 매출은 얼마 정도가 될까?

엄청나게 성공한 게임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1년에 15억 정도의 매출을 내고 있을 것이다.

고작 그 정도가 최대치인 기업이 게임 개발에 대해서 투자받는다면 얼마를 끌어올 수 있을까?

1억? 2억?

진짜 많이 받으면 10억까지 당겨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내 입에서 나온 액수가 100억이지.’

이런 투자금을 끌어낼 수 있는 개발사는 대한민국에도 몇 개 되지 않는다. 그 잘난 소프트 넥스도 지금은 100억의 투자금을 당겨오기 힘들 정도다.

‘이번 콘솔 게임 개발을 위해 1조 정도를 국내 개발사에 사용하려고 했는데 이 자리에 있는 개발사는 총 17개. 이들 기업 전부에 투자해도 1,700억 규모

의 투자에 불과하지.’

이 돈으로 괜찮은 게임을 다섯 개만 확보해도 무조건 남는 장사다.

“대신, 투자 규모가 큰 만큼 저희의 간섭이 많아질 수 있습니다.”

해외의 유명한 대형 퍼블리셔들을 보면 각자 자신들만의 노하우들이 존재한다.

스포츠 게임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중소기업 AA의 경우 소속된 스튜디오들의 자유로운 창작을 지원하지만 그만큼 빡빡한 예산과 일정은 물론이고 결과

물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가차 없이 스튜디오를 폐쇄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반대로 UD소프트는 어지간한 손실은 다음을 위한 경험이었다는 마인드로 넘어간다. 그러나 개발의 처음부터 끝까지 본사가 정해준 디테일에 맞춰서 진

행하기 때문에 개발자들이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할 수 없다.

‘UD소프트의 게임들이 대부분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게 이것 때문이지. 오죽하면 UD식 게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따라붙었겠어?’

여기서 포인트는 UD나 AA 둘 중에 어디의 방식이 더 좋다, 나쁘다, 라는 게 아니다. 둘 다 장단점이 있다는 거다. 이런 사정을 빤히 아는 사장들이 내게

반문했다.

“투자금이 만만치 않은 만큼 일부 간섭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너무 많은 부분에서 간섭하시면 좋은 게임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현저

하게 낮아질 겁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이건 게임 업계의 흔한 착각 중 하나다. 게임이 실패하는 너무나도 단순 명쾌하다.

‘창의력에 제한을 받아서가 아니야. 게임이 재미없어서지.’

명명백백하게 이해해야 한다. 간섭이 잦은 게임이 실패하는 이유는 게임의 내적인 것을 배제하고 그저 수익만을 바라본 간섭이기 때문이다.

UD소프트는 게임 개발에 있어서 굉장히 많은 간섭을 받는다. 그런데도 그들이 만든 게임들은 대부분 재미있다.

왜?

재미있는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꽤 높은 사람이 간섭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GF는 내가 요소요소 끼어들어서 성공시킨 대작이 수두룩하다.

적어도 지금 당장만큼은 세상에서 나보다 게이머들이 추구하는 게임의 방향에 대해서 높은 이해도를 가진 사람은 없다.

“여러분은 콘솔 게임 개발에 대한 경험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GF는 지금까지 다양한 콘솔 게임들을 내어왔고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지요. 이 정

도면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만?”

“그야······.”

“뭐··· 그렇지요.”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서 창작자가 누군가에게 간섭을 받는다는 부분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너무 그렇게들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지는 마세요. 제가 보는 포인트는 딱 하나이고 오직 이것에만 집중할 겁니다. 바로, 게이머들이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라는 것 말이지요.”

“아······ 예.”

“알겠습니다.”

즐거움. 재미. 행복.

이런 추상적인 가치는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된다. 대성공한 회장으로서의 부러움과 존경심은 둘째치고 저들이 떨떠름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100억인데.

결국 사장들은 마지못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 목소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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