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소리 >
역삼동 고층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양식 레스토랑.
손님마다 개별 룸의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조용한 만남을 가지기에 좋은 식당이라고 추천받은 곳이다.
“반갑습니다. 윤태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류인혁이라고 합니다.”
그는 문체부의 장관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체육관광부는 그 이름 때문에 ‘대한민국의 문화와 관련된 업무를 하는 기관’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이 기관의 전신은 대한민
국의 공보실이다.
문체부는 전통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부처다. 심지어 이번에는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신형 콘솔에 대한 이야기가 문체부
에서 나왔고 게임에 대한 관리 역시 이곳에서 하니 우리와는 겹겹으로 엮인 관계였다.
“제가 왜 뵙자고 한 건지는 이미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네. 아무래도 한 번쯤은 이렇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시다니요.”
이 사람이 아주 느긋한 투로 재미난 이야기를 지껄인다. 권력이 있으면 함부로 때려놓고도 뻔뻔하게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큰일을 저희와 상의도 없이 지르셨으면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저희에게 먼저 연락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이렇게 전화 한 통에 바로 나올 정도로 큰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심심한 사과의 말이라도 전하는 게 예의다. 즉, 조금 전의 소리는 그냥 하는
말뿐인 신소리다.
사람 봐가면서 대응한다는 뜻이며 우리가 오성이나 LZ였다면 저들이 이렇게 행동했을 리가 없었다.
“저희는 이번 정부의 말만 믿고 이 사업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업의 시작부터 이렇게 초를 치다니요. 이래놓고 정부를 믿고 사업을 계속 진행하
길 바라시는 겁니까?”
“제 불찰입니다. 이제라도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사과 좋죠. 그런데 기업과의 마찰에서 사과는 마음이나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네?”
정치인들이나 그들과 자주 엮이는 기업인들의 특성 중 하나는 같은 말을 해도 너무나 빙빙 돌리고 돌려서 10분이면 끝날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한다는
것이다.
“다 알아들어 놓으시고는 왜 이러십니까? 말로 말고 돈으로 사과하시라는 말입니다.”
선입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정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지난 삶 때문이었을까, 그간 언론을 통해서 접
하게 된 이미지가 엉망진창이기 때문이려나.
‘늘 바쁘고 시간 없다고 징징대는 인간들이 그럴 땐 또 시간이 넘쳐나신다니까.’
정치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이 생기고 정치인들 역시 가식적이라는 생각부터 들게 된다. 머리로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감성적
으로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걸 보면 소위 바른 정치를 한다는 이들도 홍보와 마케팅에 재주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돈으로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사업에 지장을 줬으니 그걸 만회할 만큼 돈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금은 자본주의 시대다.
‘진정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지표로 돈을 선택해 달라.’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유효한 수단은 공손함과 진심이 아니라 바로 돈의 무게다.
“회장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문체부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입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하시면 그게 가능
할 거로 생각하신 겁니까?”
“안 될 게 없다고 봅니다. 올해 예산이 이미 다 책정됐을 테고 그 예산안에서 게임에 사용할 돈이 있으실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돈을 내놓으라?”
“네.”
너무나도 당당하고 뻔뻔한 내 행동에 류인혁 장관이 애매하게 웃었다. 순간 할 말을 잃었는지, 화가 올라온 것인지,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저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면전에서 웃었는데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붉어진 얼굴과 별개로 대체 나라는 인간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하는지를 생각하는 것
처럼 보였다.
“이해 못 하실 게 뭐 있습니까? 당신들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우리는 엄청난 손실이 예상되니 그 손실을 당신들이 적당히 메꿔주길 원한다, 이겁니다. 문
체부의 올해 예산이 얼마나 됩니까?”
어차피 정부 주요 부처의 예산이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니까 딱히 비밀도 아니다.
“4조에 조금 못 미칩니다.”
“그중 문화 콘텐츠 분야에 배정된 금액은 얼마입니까?”
문체부 장관이라고 수많은 예산의 사용처를 다 외우고 다니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질문하는 건 최소한 나와 만나는 자리라면 이 정도는 알아
두고 나왔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역시나 질문과 동시에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550억입니다.”
“총 4조의 예산 중 문화콘텐츠 분야에 활용되는 금액은 고작 550억이군요. 게임도 아니고 문화 콘텐츠 전체에 말이지요.”
“문체부에서 관리하는 분야는 굉장히 넓고 방대합니다. 그만큼 여러 분야에 빡빡하게 예산을 집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게임 콘텐츠에 관련된 곳
에 저희가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은 최대 13억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이것만 봐도 한국이 게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다.
13억 원.
이 예산은 허접한 중소기업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나는 문체부 장관에게 ‘게임 사장 나부랭이가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하게 큰 소리를 내는
가?’에 대한 대답을 해주기로 했다.
“장관님. 우리가 이번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투자해야 하는 자금이 얼마나 될 거 같습니까?”
“어차피 전자제품 유통은 판로를 다 뚫어놓은 기업이니, 새로이 개발하고 생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것에 2조 원 이상의 투자가 필요할 거
라고 보고는 있습니다만.”
“맞습니다. 콘솔에만 2조 원 이상의 투자금을 쏟아부을 겁니다. 정확히는 약 4조 원의 예산을 배정했지요. 그러고 보니 하필이면 문체부의 올해 예산과
비슷하군요?”
조라는 단위는 결코 우스운 게 아니다.
“게임기 산업은 결국 게임을 하려고 게임기를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에 3조 원을 추가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즉, 이 사업에만 7조 원이
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자되는 겁니다.”
7조 원.
문체부의 1년 예산을 아득히 넘었다. 이만한 돈이 투입되었는데 국내시장이 활성화되지 않고 배기겠는가. 내가 그의 앞에서 당당하게 웃고 주장을 펼칠
힘이 여기에 있다. 7조 짜리 사업은 류인혁 장관의 업적이 될 수도 있고 치명적인 실정이 될 수도 있다.
“지금 그런 사업에 재를 뿌려놓은 겁니다. 그런데 뭐라고요? 13억? 지금 저희와 장난치십니까?”
원래 돈이라는 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것 자체로 힘을 가지게 되는 법이다. 류인혁 장관은 돈의 단위를 듣기 전과 후의 태도가 바뀌고 말았다.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당신네끼리 회의를 하는 자리가 됐든 뭐가 됐든 게임 콘텐츠 분야에 예산을 더 받아오셔야 할 겁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투자금
의 규모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저는 어차피 문체부가 움직일 수 있는 푼돈에 관심 없습니다.”
“그러시다면···”
“제가 관심 가지는 건 이번 정부가 발표한 것에 대해서 얼마나 책임을 질 의사가 있느냐입니다.”
“예산으로는 얼마 즈음을 염두에 두시는지···?”
“그거야 알아서 능력껏 하셔야지요. 다만 그 금액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희는 이 사업을 바로 접겠습니다.”
그리고는 돌아 나왔다.
이후, 바로 정부와의 협의에 들어간 것인지 문체부에서는 아주 빠르게 내게 연락을 보내왔다.
300억의 추가 예산을 약속받았다는 메시지였다.
*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취급을 받느냐에 대한 부분을 해결했다. 이 정도면 우선은 만족한다. 물론, 명예와 관련되었을 뿐 실질적인 당장의 이익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예산을 약속받았어도 그 돈이 문체부 손에 쥐어지기까지 꽤 걸리지요?”
“네, 회장님. 아무리 빨라도 석 달은 넘게 걸릴 겁니다.”
정부의 1년 예산이 250조이니 300억은 별 것 아니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그냥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예산이라는 건 한쪽에 더
주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만큼 감축되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니 이를 조율하다 보면 반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그래도 일단 그 약속을 받아냈다는 것 자체에서 제 목적은 달성한 셈이네요.”
문체부의 성의를 확인했으니 이제부터는 우리의 목적에 집중할 차례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인천 남동구 간석동에 찾아갔다.
“여기도 많이 변했네요.”
GF 간석 사옥.
나는 지금 과거에 GF가 처음으로 시작했던 그 빌딩에 와 있다.
게이머스 포럼이 강남으로 이전하고 한동안 간석 사옥은 게임단과 진수성찬의 사무실로 활용되었다. 그런데도 빌딩은 꽤 여유 공간이 남아 있었기에 영
세한 게임 개발사들이 저렴하게 들어와서 게임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그 덕분일까.
지금의 간석동 일대는 게임 개발사들의 성지화가 된 상태였다. 김유천 비서실장 역시 자부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GF그룹의 시작이라는 그 상징성 때문일까요? 수많은 게임 개발사가 어떻게든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이라고 합니다. 사옥을 관리하는 팀에서도 그것 때
문에 곤란한 일이 많아 늘 울상이라더군요.”
일명 ‘게이머스 포럼 인큐베이팅’이라 명한 이 사업은 게이머스 포럼 초기에는 나름대로 신경을 쓰던 사업이다. 혹시나 괜찮은 개발사가 있으면 투자든
뭐든 해서 함께 가려고 시작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영세한 국내 개발사는 대학의 게임 개발 동아리와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고 딱히 투자할만한 기업이 없었다. 그리고 GF그룹으로 변
모하면서 GF 자체의 규모가 거대해진 이후부터는 딱히 이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게 되었다.
‘될성부른 나무들은 세계에 더욱더 많았고 우리 입장에서 이곳을 유지하는 비용은 푼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콘솔을 개발하기로 했으니 입장이 조금은 바뀌었다.
간석 사옥이 내게 제법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감회가 새롭다는 것을 느끼면서 건물을 한참 보다가 한 걸음을 내딛는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고는 건물에서 주차장까지 달려 나왔다. 나야 당연
히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기에, 김유천 실장이 옆에서 그의 직책을 말해주었다.
“GFI 팀의 이환규 팀장입니다.”
게이머스 포럼 인큐베이팅이라는 말이 워낙 길었기 때문에 그것을 줄인 말이 GFI였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GFI팀은 이곳에 입주해 있는 게임 개발사들의 입주를 관리하고 그들의 법률적인 문제나 세무 회계 등의 문제 등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팀이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을 보아서는 그냥 영락없이 GF 간석동 사옥을 관리하는 경비팀의 모습이었다.
“다들 회의실에 먼저 모여서 회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벌써? 30분 전인데?’
우리 회사 사람들도, 우리의 협력 개발사도 아닌데 내가 온다고 한참이나 일찍부터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문득 중국의 쑤전팽이 시장 전체를 한산
하게 만들었던 광경이 떠올랐고 머릿속에 ‘이것도 갑질이라면 갑질이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도치 않게 갑질을 펼치고 만 것이다.
“일찍부터 모여서 기다리고 계셨네요. 그럼 빨리 갑시다. 그런데 팀장님.”
“네, 회장님.”
“혹시 오늘 일찍 모여 계시라고 이야기하시거나 그러신 겁니까?”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여기 입주한 회사의 사장들이 바쁜 회장님이 오신다니 최대한 스케줄에 방해 안 되게 한다고 먼저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다. 이 팀장이 직접 지시를 했다거나 한 거였다면 진짜 많이 화가 날 뻔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일찍부터 모여서 기다리거나 하실 경우 입주 기업 명단에서 제외할 거라는 공지를 전달하도록 하세요. 이번만 넘어갑니다. 이해하
셨죠?”
“바로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딱딱한 대답을 듣고는 자리를 이동했다.
< 목소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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