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95화 (395/577)

< 부자 >

“닌텐두요?”

저게 뭔 소리인가 싶었는데 순간적으로 번개처럼 뭔가가 스쳤다.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과도 같은 그 단어는 바로 ‘명텐두’였다.

2007년.

위기의 닌텐두는 닌텐두DS라는 거치형이 아닌 휴대용 게임기로 다시 한번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게 된다. 한창때는 미국에서 1분당 열

일곱 대씩 판매하면서 전 세계에 1억 5천만대라는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름하여 휴대용 게임기의 전설과도 같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박명두 대통령이 이것에 관심 가지고 이야기를 꺼내는 건 일 년이 더 지난 후로 아는데.’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올해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것은 이미 박명두 대통령이 엄청나게 까이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

이다.

‘지금은 당선된 지 얼마 안 돼서인지 서울 시장 시절 청계천이나 버스 이미지가 강해서인지는 몰라도 까는 사람만큼이나 기대하는 사람

도 많은 상황이니까.’

대통령의 힘이 가장 막강한 시기는 정권을 막 잡았을 때인 초기다. 즉, 욕을 먹기는 한참 일렀으니 명텐두 이야기는 원래대로면 지금 나

올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기 모인 분들을 보세요. 오성 전자나 LZ전자만 해도 저기 일본의 그 어떤 전자 기업들보다도 뛰어난 전자 회사들입니다. 단연 세계

제일의 전자회사들이죠. 그뿐입니까? GF그룹은 지금 전 세계 최고의 게임회사이지 않습니까?”

‘맙소사. 자기가 해봐서 다 안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해?’

“이런 국내의 기업들끼리 힘을 합치면 닌텐두는 비교도 안 되는 게임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아이큐 80짜리 두 명이 머리 합치면 160의 능력을 발휘한다던 논리가 떠오르는군.’

게임 산업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박명두 대통령의 말에 오성 그룹의 이진회 회장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LZ그룹의 고

준표 회장은 박명두 대통령의 사업 아이템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미 콘솔에서 한 방 제대로 얻어맞고 리타이어를 제대로 당했던 과거도 있는 양반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경험 많은 바보가 하나뿐인 건 아니었구나.’

게임기?

당장 우리 레이컴에서 개발해도 닌텐두 DS이상의 게임기를 개발할 수는 있다. 솔직히 그 정도 게임기를 개발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문제는 게임기라는 산업이 게임기 하나를 잘 만든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면 양도준 사장이 콘솔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고 할 때 찬성해줬겠지.’

중요한 건 게임기가 아니라 게임이다.

콘텐츠인 내부 게임이 좋아야 성공하는 사업인데 국내의 기업들과 힘을 합치라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박명두 대통령이야 겜알못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할 게임이 없어서 망한 콘솔에 투자했다가 제대로 피를 본 고준표 회장이 저러는 걸 보

면, 저 사람도 정신 차리기는 아직 글렀다.

‘이 판국에서 그냥 웃으면서 고개 끄덕이다가는 피 보는 셈이지. 차라리 잘 됐을지도 모르겠어. 지금 시점에서 뭔가 바꾸면 적어도 게임

이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미래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거야.’

나는 자세를 조금 바꾸었다.

“글쎄요. 조금만 안 좋은 사건이 생기면 우리 게임 산업으로 불편한 시선을 떠넘기는 나라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까 의외이기는 합니다.”

안쪽으로 꽉 찬 묵직한 직구.

내게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내 말이 만들어낸 파급력은 상당했다. 한순간에 접견실에 있는 모든 인

원이 술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박 대통령은 웃음을 잃지 않는 편안한 표정으로 내 말에 답변을 이어갔다.

“이전 정부에서 게임에 대해 많은 탄압을 자행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 정부의 일입니다. 저는 윤 회

장님께서 도와주신다면 게임 산업을 이 나라의 미래 산업으로 삼고 지지할 생각입니다.”

‘웃기는 소리하네. 앞으로 임기 내내 게임을 탄압하고 셧다운 제도마저 처음으로 도입시키는 정부의 수장이 당신이거든.’

꿈속 미래를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오는 발언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내가 딱 써먹기 좋은 말이기도 했다. 박명두 대통령의 본심이

나 성향이 어떤지는 모른다. 알 수도 없고 짐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공개석상의 내뱉은 말은 그 자체로 효력을 발휘하는 법.

‘게임 산업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끌어내자.’

내가 진짜 게임이 정신질환으로 등록만 안 됐어도 이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국내 전자회사와 협력해서 세계적인 게임기를 하나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건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여기 계신 오성이나 LZ 모두 뛰어난 전자 회사라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기업에는 못 미칠지라도 저희 GF 역시 충분한 역

량을 가진 기업이 있습니다. 우리 기업을 두고 외부 기업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내 대답에 처음으로 잠시나마 대통령이 미소를 잃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공공의 이익이랑 남 좋은 일 하는 건 달라.’

게임기 산업에 내가 긍정적이지 않았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노력에 비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둘째, 만약 성공한다고 치더라도 그 시간에 다른 노력을 한다면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단점들을 감수하고 내가 이 분야에 뛰어들어야 한다면, 이를 통해 나라에서 게임 산업을 대하는 자세가 변한다면 나는 별

다른 이득이 없어도 기부와 같은 개념으로 뛰어들 용의가 있다.

하지만 공익적일 때의 이야기일 뿐, 내가 키워서 다른 기업인의 입에 밥상만 차려주는 방식이면 안 하고 말겠다.

‘둘의 표정이 다르네.’

박명두 대통령은 내게서 나왔던 부정의 말이 거절을 위한 대답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반대로 고준

표 회장의 얼굴은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대충 파악을 마쳤다.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임기 동안 게임에 대해서 부정적인 판단을 하지 않으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도 게임기를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게임이 이 나라의 미래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각자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모인 자리다.

나 역시 사업하러 온 만큼 나의 이익을 챙기기로 했다.

*

청와대 만찬회를 끝낸 다음 날. 회장실로 GF그룹의 게임 사업부와 카이닉스 그리고 레이컴의 사장단들을 소환했다.

“박명두 대통령의 말도 있었으니 이번에 우리 GF에서 새로운 콘솔을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있었던 일들을 짧게 언급하고서 말했다.

역시나 사장단들의 표정은 좋지 못하다. 야심 차게 준비해 왔다가 대차게 까여본 경험이 있는 양도준 사장이 대표로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 저희가 콘솔을 개발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에는 수익이 형편없으니까 하지 않으시겠다고 회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랬었는데 대통령이 ‘왜 우리 한국에는 그런 게임기가 없냐’고 하자 갑자기 사업을 시작하시는 겁니까?”

날선 반응은 무조건 감정적인 반론이 아니었다.

건설업계는 대통령의 임기동안 50조 이상의 자금을 투입해서 건설 경기를 살리겠다는 확답을 들었다. 그 외의 업계들도 정부의 지원금

을 통해 사업을 더 키울 수 있게 되는 희망찬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왔다.

반면에 게임은 그저 정부에서 나서서 게임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에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 정도가 전부다. ‘고작 이 정

도 약속에 움직일 거라면 과거에는 왜 거절했느냐?’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셧다운제가 씨앗이 되어 무럭무럭 자라서는 문화계 전반에 얽히는 정신질병 하나를 WTO에 등재하게 만들듯 지금 시점에서의

행동은 생각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중요한 거니까요.”

무려 파워풀한 임기 초기의 대통령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권력이라서 무조건 납작 엎드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일전에 콘솔 사업을 반대했을 때와 지금은 엄연히 다른 상황입니다. 당시 레이컴에서 콘솔기기를 개발하려고 했던 이유가 뭐였는지 기

억하십니까?”

“수익의 다각화를 위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던 거였습니다.”

“그랬지요.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데, 사실 콘솔 산업은 수익을 만들어내는 게 엄청나게 어려운 분야입니다. 그뿐

인가요? 겨우겨우 수익을 만들어내 봤자 시장의 전체 파이는 고작 15조짜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번 사업은 수익을 위해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네?”

당황스러운 반문이다. 마땅한 반응이었다.

기업은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사회를 위한 모든 비영리 활동도 결국은 영리적인 활동을 위해 진행하는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

이 하는 비영리 활동들도 전부 영리활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기업의 수장이 수익이 아닌 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누가 태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다보는

시점이 꿈속 미래와 얽혀있고 관점 역시도 저들과 다르기에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게임 산업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꾸준히 보내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은 강한 정치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니 콘솔로는 돈을 벌지 못해도 됩

니다. 다만, ‘게임이 이 나라의 미래다.’라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게임이 이 나라의 미래다.

이건 외부인에게는 별것 아닌 표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업계에 종사하며 사회의 냉대를 실감해온 이들에게는 가슴앓이만큼 감정적으로

와 닿는 말이었다.

그 탓에 게임 사업부에 속한 사장단들은 마치 감동적인 연설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카이닉스의 홍의제 사장과 레이컴의 양도준

사장은 ‘GF가 게임으로 시작된 기업이니까.’라는 정도의 반응만 보였다.

“이제 다들 납득 하신 겁니까?”

표정을 보아하니 과거에 까였던 기억이 아직은 남아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만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이제 당위성이 해결되었으니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갔다.

“게임기도 종류가 많지 않습니까? 닌텐두만 해도 일반 거치형 게임기는 물론이고 휴대용 게임기까지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게임기를 개발하게 되면 해당 게임기로 게임들을 발매해야만 하는데 현실적으로 저희가 개발한 콘솔에 발매할 게임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홍의제 사장과 양도준 사장은 ‘어떤 콘솔을 만들 것인가?’에 궁금증을 드러냈고, 게임 사업부 쪽에서는 ‘과연 새로운 콘솔로 발매할 게

임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이런 논의에서 결코 빠지면 안 되는 포인트를 먼저 짚었다.

“작년에 레이폰을 세상에 공개한 후로 사람들은 우리 레이컴에서 새로운 상품을 공개할 때마다 큰 관심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혁신이라는 키워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매번 보고 싶어 하는 기대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회의실 곳곳에서 신음이 나왔다.

‘말이 쉽지 실제로는 정말 해내기 어려운 거니까.’

혁신을 일으키는 기업.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다. 그러나 정작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것만큼 부담스러운 말이 없다. 남들이 새로운 혁신을 가져오면 놀라운 칭

찬을 받고 혁신이 아니더라도 평타가 되지만, 이미 관심을 받을 대로 받고 있는 기업은 혁신을 선보여도 평타에 불과해서다.

‘하지만 네게는 해답지가 있지.’

보통이라면 지극히 어렵지만, 미래의 정보를 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양도준 사장님. 아까 닌텐두에는 휴대용도 있고, 거치형도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왜 휴대용과 거치형을 따로 생각해야 하는 걸까요?”

“네? 그건···”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다가 내 질문이 아이디어를 제공해주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가 말끝을 흐렸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소미의 GSP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몇몇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타 회사의 게임기이지만, 오히려 게임을 개발하는 회사의 개발자이면서 사장인 사람이 타 사의 성공한

게임기가 없다면 그게 더 문제다.

“GSP는 휴대용 콘솔입니다. 맞죠?”

“그렇습니다.”

“GSP로는 TV에 연결해서 게임을 못합니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GSP는 휴대용 콘솔입니까? 거치형 콘솔입니까?”

당연히 휴대용 콘솔이다. 그렇지만 길남주 사장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걸 휴대용이라고 대답하자니 방금 자신이 대답했던 TV에 연

결하는 방식은 거치형 콘솔의 형태였고 거치형이라고 대답하자니 이건 분명히 휴대용 콘솔이다.

“고민되나 봅니다.”

이 개념을 타파해야 한다.

“일단 GSP는 그 이름부터가 휴대용 게임 스테이션이니만큼 휴대용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저 거치형처럼 TV에 연결할 수 있다 뿐

이지요.”

양도준 사장은 내 태도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 같다.

< 부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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