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 >
*
“집이다!”
최종인 의장은 넷플렉스의 대표자로 중국에 남긴 채 홀로 돌아왔다. 이번에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느낀 가장 큰 것은 내게도 제대로 케어가 가능한 비서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기업 회장들이 왜 그렇게 불편하게 많은 사람을 줄줄이 비엔나 마냥 끌고 다니나 했는데 이번 사업에서 제대로 그 필요성을 느꼈어.’
통역에서 번번이 막힐 때마다 식은땀을 흘린 것만 몇 번째였던가. 소소하게 불편했던 그 외의 일들은 또 어찌나 많았던가. 이 불편함을 해결해줄 집사··· 가 아니라, 비서가 절실하다.
“그러게 진작부터 그룹 비서실을 정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한국에 돌아와서 이 고민을 털어놓기가 무섭게 곽지원 부사장이 삼십여 분간 내게 훈계를 늘어놓았다. 선생한테 혼나는 학생의 심정이었는데, 이건 그가 권하던 걸 내가 거절해왔던 거라서 잔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그래도 내가 오너인데 말이야······.’
‘다 제 불찰입니다.’라는 말을 원 없이 들려준 뒤에야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생각해두신 인사가 있으십니까?”
“그냥 지원자 중에서···”
“회장님. 그냥이라니요. 어디 작은 계열사 사장의 비서실도 아니고 그룹 회장실의 비서실장입니다. 우리 그룹이 진행하는 사업과 모든 전략을 파악하게 될 사람인데 그냥 아무나 데려다가 앉히려고 하셨습니까?”
“에이. 제가 그래도 아무나를 앉히려고 할 리가 없잖습니까. 능력 좋은 사람을 딱 엄선해서···”
“그게 잘못된 겁니다. 능력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 기본 조건이에요. 그 이상으로 봐야 하는 게 충성심입니다. 우리 그룹의 비밀을 잘 지켜줄 수 있는 사람! 특히, 회장님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인물을 뽑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마땅한 대상을 모르겠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더라?’
저런 조건들을 내가 진작부터 알았으면 곽지원 부사장에게 물어봤겠는가? 그냥 혼자서 처리하는 게 나은데 말이다.
“떠오르는 인사가 없는데, 추천 좀 해주시죠?”
“회장님 지시보다 저와의 라인을 중시하는 사람을 추천하면 어쩌려고 이리 물으시는 겁니까?”
회장으로서의 품위와 여러 조건들을 기회 될 때마다 알려주는 곽지원 부사장이었다. 그런데, 그의 우려와 달리 나는 비서실장으로 어떤 이가 오건 정말로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GF그룹의 특성 때문이다.
‘내 회사야. 다 내꺼라고.’
윤태식이라는 개인의 지분이 압도적이다.
경영권 분쟁?
일어나기는커녕 시도조차 생길 수 없다. 알랑방귀만 잘 뀌는 녀석인지 여부는 판가름할 능력 정도는 내게도 있고 말이다.
“정 그러시다면, 저는 GF 글로벌의 사장을 맡고 있는 김유천 사장을 비서실장으로 권해 드립니다.”
“지금 사장인데 비서실장을 하라고 하면 그건 좌천 아닙니까?”
“보기에 따라서 좌천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다릅니다. 제가 부사장이지만 김유천 사장보다 아랫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네?’
또 설득당했다.
곽지원 부사장은 그룹 내에서 이인자의 위치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룹의 계열사라고는 하나 거의 자회사나 다름없는 해외 유통 법인의 사장에서 그룹을 총괄하는 비서실의 실장으로 보직 이동하는 겁니다. 영전으로 봐야지요.”
‘오호라.’
그럼 상관없겠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굳이 김유천 사장을 추천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이번에 중국에서 불편함을 많이 겪으셨다고 하셨지요. 현재 GF그룹의 매출을 분석해보면 미국과 중국이 대부분의 매출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 세계를 상대로 다양한 사업을 성공 시켜야 하겠으나 결국, 이 두 국가보다 큰 시장이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지당한 식견이다.
“그런데 김유천 사장은 이 두 국가에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회장님의 비서실장으로 이보다 좋은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굳이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충성심 부분도 그라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말로는 자기 라인을 넣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했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딱 맞는 대답을 해준다. 어쩌면 곽지원 부사장은 내게서 비서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준비한 후보가 없어서 그런지, 김유천 사장 이상가는 후보감은 없는 것 같네.’
흔쾌히 승낙!
곽지원 부사장의 추천 그대로 GF글로벌의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고 김유천 사장은 내 비서실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첫 번째 실무는 청와대로부터의 초청이었다.
“회장님. 이번 만찬회에는 꼭 참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오. 중국에서도 지겹게 다녔는데 한국에서도 만찬회냐?’
뭔 놈의 파티장이 이리도 넘쳐나는지, 상류층은 이런 모임이 없으면 지루해서 죽는 병이라도 있나 싶었다. 문자 그대로 산해진미가 가득하지만 정작 음식에는 집중하기 힘든 매우 불편한 식사 자리다!
“청와대 경제인 만찬회······. 이름부터 갑갑하네요. 도대체 제가 거기 가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자꾸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겁니까?”
미국과 중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바뀌었다. 그와 함께 나라의 정권을 잡은 여야가 달라졌고 그 탓에 새로운 정부에서는 꾸준히 나에게 청와대 만찬에 참석하라는 초대 겸 협박을 꾸준히 취해왔다.
‘사업이든 인생이든 그 어떤 것에도 별 도움도 안 되는 꼬장꼬장한 노인네들과의 만찬회는 영 질색인데.’
혹시라도 사대강 운하를 만드는 거국적인 사업에 대해 내게 질문이 오면 나는 어찌 대답해야 할까.
중국의 장래 정치구도는 오히려 단순해진다. 독점적인 절대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의 정치판에 내가 함부로 끼어들고 줄타기를 절묘하게 할 자신은 없었다. 그저 최악을 막을 뿐이지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낼 능력은 내게 부족하다.
‘돈이야 내가 많다지만, 국내 정계와 재계의 카르텔은 무턱대고 손대기에 너무 위험해. 수틀리면 떠나버린다는 식의 강짜를 부릴 수는 있지만, 사실 이건 고슴도치 전략이거든.’
‘나는 성질 더러운 놈이니 건드리려고 하지 마라, 나도 그리하겠다.’는 방식이다. 게임 기획이야 내가 허물고 다시 세울 수 있다지만, 이건 스케일이 다른 문제였다.
“골치 아프군요.”
모르면 차라리 낫다. 꿈속 미래지식으로 애매하게 아니 여러모로 난감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멀리까지 내다보고 다양한 사건들을 두루 감안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김유천 비서실장의 의견은 명쾌했다.
“회장님께서는 정부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권이 바뀌었고 바뀐 정권에서 의욕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치고 싶으니 기업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자리에 불과합니다.”
나는 내심 쓰게 웃었다.
“글쎄요. 그저 체면치레만 할 뿐, 제게는 안 그래도 지루한 자리인데 막상 가면 아쉬운 소리나 들어줘야 한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막말로 정부에서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발목이나 잡고 늘어지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지요.”
“도움받을 일은 없겠지만, 이번 정부의 정책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정보를 얻게 되는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정부를 상대할 방법 한 가지가 생기는 거니까요.”
‘객관적인 시선이 딱 김유천 실장의 말과 똑같겠지. 그럼 내가 지나치게 피하려고 드는 게 오히려 저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겠고.’
나라 밖에서 정치 때문에 줄타기하고 왔더니만, 이번에는 안쪽에서 비슷한 처지가 됐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큰돈 되는 시장이던 중국과 달리 한국은 내가 아까워서 설설 길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요. 가 봅시다.”
일찌감치 나왔어야 할 당연한 결론을 나는 긴긴 심사숙고 끝에 내렸다.
*
청와대 경제인 만찬회.
말이 만찬회이지, 일종의 정치계와 재계의 인사들이 모이는 회담 자리인 만큼. 단순하게 파티나 만찬회의 형식으로 진행이 되지는 않는다.
만찬회는 크게 2부로 나눌 수가 있는데, 1부는 오후 4시 30분부터 청와대 접견실에서 진행된다. 2부는 6시 30분부터 본격적인 만찬과 함께 2시간 동안 추가로 진행되는 방식이다. 2부의 장소는 충무실이었다.
“이런. 얼굴 한 번 보기가 대통령보다 힘들다는 귀하신 분께서 자리에 참석하시는 걸 보니, 오늘 만찬에 오길 잘했다 싶군.”
이회진.
올 해 67세로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내게 묘한 웃음을 지었다. 영락없는 잘 차려입은 보통 노인네의 모습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그를 그저 그런 노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선박, 전기, 반도체, 전자, 요식업 등 대한민국에서 돈이 된다는 사업이란 사업에는 다 발을 뻗고 있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 재계의 거인이다.
‘법조계 쪽도 장난 아니라던데.’
오죽하면 꿈속 미래에서는 물론이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까지 오성전자 공화국이 곧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거물의 말에 나 역시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 나는 자네 얼굴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초면이라는 생각이 들질 않는구먼.”
“저도 비슷한 심정입니다.”
과거였다면 오직 미디어로만 봤을 인물들의 면면이 이 자리에 다 모였다. LZ그룹의 총수, GL그룹의 총수 등등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대거 이 자리에 참석했다. 기이한 건, 대기업의 회장이고 이 시대의 거인이라는 이들을 처음 보았는데 딱히 무시무시한 아우라나 카리스마 같은
걸 느끼지는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그래. 나랑은 관계없는 분야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아니면 나도 돈이 많아서 자신감이 생겼나? 빌 게이트나 쑤전팽을 봐서 무덤덤해진 건?’
추측 들 중에서는 아마도 첫 번째 이유가 맞을 것이다. 내가 오성 전자의 직원이었다면 회장님 재채기 한 번에 직장생활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협력업체의 관계자라면 벌벌 떨며 비위를 맞춰야 했으리라.
반면에 나와 저들은 접점도 없었을뿐더러 크게 이권으로 얽히지도 않았다. 게다가 딱히 존경스럽거나 우러러보는 마음가짐도 아니었으니 그냥 유명 인사를 보는 정도의 감정이 전부였다. 게다가 인사치레라고 나누는 말들도 변변찮다.
“TV나 사진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실물로 보니까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외모로구먼.”
“GF의 회장이 젊다는 이야기는 익히 잘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실물로 보니 더 놀랍네. 참으로 젊어. 시대가 달라졌다는 뜻이겠지.”
“아직 결혼은 안 했다고 들었는데, 어떤가? 우리 손녀가 아주 참한데.”
“예끼! 자네 손녀는 아직 열여섯 살 아닌가?”
“열여섯살이 뭐 어때서 그래? 부모의 동의만 있으면 결혼도 가능하네!”
이쪽에서는 생각도 없는데 자기들끼리 누구의 손녀가 더 나와 어울리겠네 어쩌네 하는 요상한 소리들이 귀를 간지럽게 했다.
“에잉. 누가 노인네들 아니랄까 봐 죄다 주책이로군. 여기 젊은 회장이 불편해 하는 거 안 보이나? 조용히 좀 합세.”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각자의 기업의 총수들이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염연히 서열은 존재했다.
고준표 회장.
그는 이회진 회장과 함께 이 자리에서 최고 서열을 가진 자 중 하나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에 다른 총수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한편,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속셈인지 고준표 회장이 개구지게 웃으며 말했다.
“이 회장님. 꽤 오래 1위를 유지하시다가 젊은 친구에게 자리를 빼앗기셨는데, 기분이 좀 어떠십니까?”
“경쟁이란 바람직한 일이지. 천년만년 변함이 없다면 발전 역시도 없는 것 아니겠나. 그간의 여유를 덜어내고 긴장감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니 좋은 기회일 뿐이네.”
“아무렴, 옳으신 말씀입니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세월 따라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기도 하고 전통의 강호가 빛을 발하는 것 역시 순리이지요.”
은근히 이 상황이 재미있는가 보다. 그리고 역시나 그의 농담을 들은 이진회 회장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지만, 미약하게나마 얼굴 근육이 굳어졌다.
도저히 서로가 친한 것인지, 사이가 나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대화가 한창 이어질 무렵.
“대통령께서 오고 계십니다.”
드디어 이번 정부의 인사들이 자리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 부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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