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 떠나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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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차를 보내주겠노라는 쑤전팽의 말을 듣고 우리는 돌아왔다. 뒤이어 정신을 차린 최종인 의장이 내게 말했다.
“회장님. 지난 만찬회와 성격이 다른 만큼, 이번에는 꼭 선물을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중국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식사와 오가는 선물을 통해서 이들의 꽌시가 돈독해진다는 정도는 들었습니다.”
우리네 속담으로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것이 있듯, 선물 문화는 비단 어느 나라에 국한된 풍습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대부분 불로소득을 좋아하고 주기보다는 받을 때 더 기쁨을 느낀다.
일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봉사하며 만족감을 느끼지만, 이들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최종인 의장이 내게 선물을 강권하는 이유는 이러한 인간의 습성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중국은 다른 어디보다도 선물에 큰 집착을 보이는 나라지.’
한국인들은 정말 친한 관계가 아니라면 선물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괜한 선물을 했다가는 그것이 뇌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의 이야기는 93년도의 사례를 보면 그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 일정 금액 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발호했었다. 우리나라로 보면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인 셈인데 중국인들은 이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결과, 규정 자체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사업을 하기 전, LZ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잠깐이나마 중국과 거래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동료가 선물을 꼭 해주라고 추천을 해주더군요. 그런데 뭐 평소에 그런 선물을 해봤어야 선물도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선물을 사셨습니까?”
“감조차 안 오더군요. 그래서 동료에게 뭘 해야 할지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동료는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대신, 바이어에게 대놓고 물어보라고 했죠.”
“네?”
선물은 내가 무엇을 받을지 모르고 있다가 받았을 때 그 감동이 커지는 법이다. 그런데 그 선물을 받을 사람에게 뭘 받고 싶은지 물어보라니.
이건 내 상식을 많이 벗어난 조언이었다.
“그래서 물어보셨습니까?”
“네. 어색한 심정이던 제가 우스우리만큼 능숙하게 요구하더군요. 이번에 아내에게 금목걸이를 맞춰주고 싶다고 말입니다.”
“뇌물 아닙니까?”
“이곳에서는 선물입니다.”
의미는 같지만, 표현은 달랐다. 마치 언론에서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이라는 단어 대신 ‘김영란법’이라는 말로 갈음하는 것처럼 말이다.
‘꽌시도 중국이니까 그걸 꽌시라고 부르는 거지 우리나라였으면 이건 그냥 정경유착이야.’
서전 시의 중웨이나 다롄의 세이더나 모두 정경유착으로 거대한 규모를 만든 것이며 거대한 이권을 소수가 독점한다. 이런 걸 보면 한국인들이 말하는 지옥 불반도나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진짜 엉망진창인 외국을 경험할 때 애교가 되는 기분이다.
물론, 최악보다 더욱 최악인 곳과 비교하며 ‘저기보다는 우리가 낫지.’라는 식의 자위를 하는 셈일 수도 있다. 그러나 힘겹기는 해도 여타 국가보다는 살만한 나라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기 어렵군요. 쑤전팽 당위서기에게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네, 회장님. 그래도 제가 피해야 할 선물을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시계죠. 젊은 세대라면 상관없으나 60년대 이전에 태어난 중국인에게 선물할 때는 절대로 피해야 합니다.”
이유는 중국에서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 죽을 날을 받아준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거에 암살자들이 시계 폭탄을 보내는 거라도 유행했던 건가?’
역사의 맥락을 모르니 영문을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거나 피해야 할 선택지를 하나 알았으니 나는 최대한 가치 있는 선물을 고민했다.
‘명품보다는 보편적으로 환영받는 품목이 좋을 것 같아. 그 중에서 대표적인 건 딱 정해져 있고.’
원소 기호 Au이며 인류가 환장해 마지 않는 노란색의 무른 금속이 있다.
황금이다.
때마침 최근에 금 재테크가 떠오르고 있기도 했다.
“금이 좋겠습니다.”
“회장님. 그래도 상대가 쑤전팽인데 금목걸이 정도는 약하지 않을까요?”
“저는 금을 하겠다고 했지 금목걸이를 하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요?”
“아!”
그렇게 내일의 만남을 기대하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이튿날인 2008년 2월 13일.
쑤전팽이 일찌감치 호텔로 사람을 보내왔고 그를 따라 우리는 식당 내부에 들어섰다. 내부는 중국인이 좋아하는 붉은 색이 멋들어지게 꾸며져 있었는데 손님마다 각각의 방을 따로 가지고 있는 형태라는 점이 제법 특이했다.
필시 식당에서 꽌시가 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만든 구조일 것이다.
[중국 음식에 대해서는 아시는 것들이 있으십니까?]
다시 만나게 된 쑤전팽은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친근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건 기이한 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투표권을 가진 지나가던 시민 A쯤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는데 오늘은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있고 우리를 제대로 된 손님처럼 대우해주고 있었다.
‘이미지 마케팅을 하는 것 치고 이 자리는 너무 폐쇄적이지. 그렇다면 어제까지는 몰랐던 사실을 지금은 알게 되었다는 의미겠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무슨 차이일지는 누구라도 쉽게 예상할 수 있을 테니까.
[아닙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그냥 아무거나 사진이 마음에 들거나 그냥 한자가 멋있어 보이는 음식들 위주로 시켜서 먹어왔습니다. 그래서 사실 저희가 먹은 음식이 뭔지도 모르고 있죠.]
[이런. 천하에서 가장 음식이 맛있는 나라에 오셨는데 정작 제대로 된 음식이 뭔지도 모르고 계셨다니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껏 드시면 됩니다. 제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드리죠.]
[감사합니다. 기대가 되는 군요.]
그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실내의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우리끼리 편하게 식사를 하고 싶으니 자네들은 나가 있도록 하게.]
곧, 수행인원으로 보이던 이들이 줄줄이 빠져나갔다.
어제 시장에서 대화를 했다곤 하지만 사실상 오늘이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이런 판국에 사람들마저 빠져나가고 나니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찾아온다.
‘애매하게 있을 바에는 차라리 이러는 편이 낫겠지.’
음식이라도 빨리 나와 주면 그걸 소재로 대화할 테지만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준비해둔 무기를 조금 앞서서 쓸 수밖에.
[귀하신 분을 만나는 자리라 약소하지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선물이라는 건 원래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많이 해봤어야 그것도 편하게 줄 수 있는 법이다. 나나 최종인 의장 같은 한국인들은 그런 것에 약하다.
그 때문에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한 번에 테이블에 선물을 올릴 수 있도록 편하게 포장을 완료해서 가지고 왔다.
[선물이라니요. 굳이 뭐 하러 이런 걸 준비하셨습니까?]
[서기님과의 식사라는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저희도 답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물은 일단 내려두시지요.]
단호한 말투였다. 이대로 선물을 주겠다는 자세를 고집한다면 이 자리 자체가 깨어질지 몰라 그의 말대로 테이블에서 다시 내려놓았다.
‘예상보다 청렴결백한 인물일 리는 절대로 없으니 이건 그런 의미려나? 꽌시가 연결되지 않으면 공짜도 마다한다는 거?’
[그 선물을 받을지 말지는 대화를 나누어 본 후에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쑤전팽의 성향을 가늠할 즈음, 그가 말했다.
[솔직하게 대화해봅시다. 두 분은 왜 나를 만나러 온 겁니까?]
[오늘 이 자리는 서기님께서 식사에 초대를 하여주셔서···]
[다시 말씀드리지요. 우리 솔직하게 대화해 봅시다.]
곰돌이로 비유되고 있는 중국에서의 이미지와 실제로 마주한 그의 면모는 여지없이 달랐다.
단칼에 내 말을 자르고는 그가 물었다.
[젊으신 분은 GF의 윤태식 회장 맞으시죠? 옆의 분은 비서실장 정도 되려나요?]
‘역시. 하룻새에 우리에 대해 거의 대부분 파악했구나.’
권력자들에게 주인공은 항상 늦게 나타나는 법, 이라는 통념이 깔려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미리부터 와 있더니만 그 이유는 예상한 대로였다.
하지만 상대는 완벽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이 분은 바벨 엔터프라이즈의 의장을 맡고 있는 최종인 의장이라고 합니다. 넷플렉스의 이사직을 겸직으로 하고 계시죠.]
[제가 실례되는 발언을 했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정체를 숨겼으니 실례는 저희가 먼저 한 셈이지요. 저희가 다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확실히 정치인은 정치인이었다. 쉬링 서기보다 훨씬 서열이 높음에도 그는 여전히 그보다 정중한 말투를 유지한 채 부드러우면서도 압박감을 주는 기묘한 태도를 보였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되겠군.’
어제는 몰랐는데 오늘은 어떻게 알아냈느냐는 식의 질문은 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시장 나들이만 했는데도 시장 전체를 통제하는 이들이 만나기로 한 사람에 대해 기본적인 조사조차 하지 않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하시니 저도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투자를 위해 당위서기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사업이라···’하며 가볍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사업을 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오해가 있는 듯하여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적인 사업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당위서기님에게 투자하겠다는 말입니다.]
[내게 투자를 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전전대 국가주석이었던 천쩌민 전 총 서기님이 바로 이곳 상하이의 시장을 역임하면서 자신의 사람을 만들었고 이후, 그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 후진차오 주석께서는 여전히 천쩌민 전 총 서기님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고요.]
조금은 예민할 수 있는 이야기에 쑤전팽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다행이라면 그가 표정을 굳힐지언정 내가 하는 말에는 큰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요? 그게 제게 투자한다는 제안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곳 상하이의 지원을 받으면 당위서기님께서 총 서기가 되실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앙위원회의 총 서기는 중국 제일의 권력을 가진 최고 권력자의 자리다.
표현하지 않았을 뿐,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목표점이며 달콤한 열매다. 그 어느 정치가가 이런 제안에 솔깃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쑤전팽은 화색을 보이기보다는 경계하는 태도를 유지하며 내게 물었다.
[윤태식 회장께서는 중국에 대해 아시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정랑위가 최근에 실각을 했다고 해도 엄연히 이곳 상하이에서 밀어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입니다.]
‘맞아. 보히타시지.’
생각해보면 이 사람처럼 운이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중국의 정치판을 보면 지금 국가의 주석이자 4대 주석인 후진차오와 그의 세력인 공청단은 3대 주석이었던 천쩌민과 그의 세력인 상하이방보다 힘이 약했다.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면 상하이방에서 밀어주던 정랑위가 5대 주석이 되었으리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 후임자가 비리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사회보장기금 운용 비리였나 그랬지.’
성공한 범죄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건 실패했을 때의 책임을 무겁게 진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게 미래가 유망했던 정랑위는 비리가 여지없이 들통 나는 바람에 한 방에 훅 가버렸고 2번 타자로 천쩌민이 내세운 인물은 보히타시였다.
그러나 이 두 번째의 패 역시 꽝이었다.
‘아주 빅 엿을 먹었거든. 그야말로 대륙에 비리가 철철 흐른다고 봐야 하려나.’
보히타시 역시 정랑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큰 건을 터트리고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된다. 이조차도 그가 강력한 혈통을 가진 덕분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 보히타시 급이 아닌 인물이었다면 100%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것이다.
1번도, 2번도 날아갔으니 천쩌민이 어쩌겠는가.
두 명의 후임자를 잃은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안중에도 없던 쑤전팽을 지지해주게 된다. 이것이 그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는, 우스우면서도 기막힌 배경이었다. 이 촌극을 현재 시점에 예상할 수 있는 인물은 세상에 없으며 오직 나만이 그 미래를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그에게 자신 있게 배팅할 수 있다.
[당위서기님께서 이미 상하이방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면 제가 서기님을 만나러 이렇게 찾아올 필요도 없었겠지요. 저의 제안은 당신에게 매력적이지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겠군요. 제가 주석이 된다라··· 상상하기 힘든 미래이긴 한데. 정말로 가능하겠습니까?]
욕심은 나지만 가능성이 없는 미래라는 모습의 쑤전팽.
‘진짜 사람 속내는 아무도 몰라.’
얼핏 달관한 것처럼도 보인다. 곰돌이 같은 이웃집 아저씨의 느낌과 이따금 보이는 예리함, 묵가의 사상에 따라서 취할 때 취하고 내려놓을 때 내려놓는 겸손하며 현학적인 이미지도 가졌다. 그러나 이렇게만 보이던 인물이 훗날 무자비할 정도로 완벽한 독재 체계를 만든다.
‘혹, 그런 부분에 재능이 특화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나에게 그는 가성비 높은 투자상품이었다.
[혹시 중국에는 저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나오지 않습니까? 투자의 귀재라거나 뭐 그런 것 말입니다.]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하는 이런 멘트는 썩 좋아하지 않지만, 무기로 쓸 때는 아낌없이 사용하는 편이다. 바로 지금 같은 때가 그렇다.
[왜 안 나오겠습니까? 행운을 부르는 사나이로 유명합니다. 투자만 했다 하면 대박을 이루어 낸다고 하더군요.]
[중국은 운이 좋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사실 오늘 이 자리도 혹시 그 운을 조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만든 자리였죠.]
[맞습니다. 저는 투자만 했다 하면 무조건 대박을 이루어 내어 왔습니다. 이건 큰 운을 타고났고 안목이 좋은 편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당신에게 투자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같은 표정 속에서 오늘 쑤전팽이 처음으로 웃는 느낌을 받았다.
< 집 떠나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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