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 떠나와 >
추리 만화나 명탐정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상대의 옷차림이나 손만 보고도 ‘이 손은 펜을 많이 잡은 손이다.’ ‘이 옷깃은 전직 군인의 옷깃이다.’와 같은 대사를 한다. 실로 점쟁이 같은 과거사 꿰뚫기를 발휘하는 셈인데, 내 생각으로 그건 인공지능 컴퓨터나 가능한 영역
이거나 사기가 틀림없다.
왜 이리 장담하느냐면, 향상된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는 내가 놀라운 눈썰미로 옷과 신체를 모조리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도 못 알아내고 있지. 보면 뭐 해. 머릿속에 든 게 부족해서 분석이 안 되는데.’
두뇌에 도서관이나 당대의 모든 지식, 경험을 입력해두어야 가능하리라.
아닌 말로 때가 탄 부분이 오다가 흙이 묻어서일 수도 있고 직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유일 가능성이 99%다. 그런데 그중에서 오늘의 날씨, 걸음걸이의 모양새, 빗방울이 튄 모양 등을 분석해서 정답만 콕 짚어 낸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게임 퀘스트면 자신 있지만 이런 건 젬병이라고. 뭐··· 분석할 수 있는 분야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하등 쓸모없게도 ‘누가 명품을 몇 개나 갖고 있냐?’’로 재력이나 가늠할 뿐이다.
비교적 상석에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인물.
그의 손목시계 브랜드는 브레케다. 못해도 이천만원은 하는 물건이었다.
‘아무리 짝퉁이 넘쳐나는 중국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인물이 짝퉁 시계를 착용했을 리는 없겠지.’
또 다른 쪽에 앉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까발리로서 대략 오백만 원짜리 옷이었다. 최종인 의장도 대충 웃어주다가 배불리 먹으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분위기가 이러하여지자 자본주의의 미소를 가득 짓고 있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미소라니. 표현이 좀 이상하네.’
손님을 왕으로 모시는 서비스 정신이니 틀리지는 않았으리라. 아무튼, 이런 식으로 중국 권력자들의 정체를 추리하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준비 된 상석에 앉을 인물이 도착했다.
모든 손님이 자리를 잡은 뒤, 오늘 만찬회의 주최자인 마천소가 앞으로 나섰다.
“뭐랍니까?”
“회장님. 저도 중국어는 모릅니다.”
“앞으로는 만찬회 자리에 통역사도 데리고 와야겠습니다.”
“네. 꼭 신경 쓰겠습니다.”
만찬회에서 굳이 영어로 연설할 이유가 없다. 당연하게도 저들의 언어가 중국어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알아듣는 척, 연기만 하고 있었다.
그때, 웬 젊은 남성이 말했다.
“이런 작은 만찬에 대단하신 분들이 이렇게 찾아주시니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만찬입니다.”
놀란 얼굴로 뒤를 보니,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대기를 하고 있다. 그 곁에는 마화슈 회장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혹시 몰라서 두 분을 위한 통역사를 미리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마움의 표시로 가볍게 고개를 움직이고 다시 마천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분들은 서로를 소개할 필요가 없으니, 여기 새로운 인물 먼저 따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그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이 두 분은 제 아들 마화슈의 친구로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시려 저 먼 곳에서 여기까지 찾아와 주셨습니다. 소개드립니다. GF 그룹의 윤태식 회장입니다.”
통역사의 번역은 마천소의 소개가 전부였지만, 나머지 인물들이 하는 말은 굳이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다. 주위 인사들이 웃으며 중국말로 나를 반겨주었으니 대략 ‘환영하오.’나 ‘반갑소’와 같은 말일 것이다.
다만 이들의 환대보다 나는 다른 지점에 주목했다.
‘내가 올 거라는 걸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군.’
마천소의 소개 멘트로 봐서는 나를 소개했을 때, 놀랍다거나 뭐 그런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전혀 그런 반응이 없었다. 그즈음, 가벼운 인사 정도를 건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가장 상석에 앉은 인물은 영어를 사용하면서까지 꽤나 적극적으로 대화를 걸어왔다.
[통역사가 있는 걸 보니. 중국어는 하지 못하는 가보군? 그럼, 영어는 가능한가?]
[네. 가능합니다.]
[다행이로군. 반갑네. 나는 쉬링일세. 부족하지만 선전시의 서기를 맡고 있지.]
‘서기!’
나는 물론이고, 최종인 의장도 마찬가지로 옆에서 놀라 입을 떡 하고 벌려버렸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서기의 직책이 늘 가장 높았다. 즉, 중국의 총 서기라고 하면 ‘중국 최고의 권력자’가 되고 성의 서기라고 하면 ‘해당 성에서 가장 높은 권력자’라는 의미다.
선전시의 서기라고 밝힌 쉬링은 이곳 선전시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공산당원이라는 말이었다.
‘중국 4대 도시 중 하나의 권력자였다니.’
중국은 땅덩이가 넓어서 관리를 위해 각 도시를 세분화하고 등급을 정할 필요가 있다. 이 넓은 대륙에서도 1선급 도시는 베이징, 상해, 선진, 광저우로서 총 네 개의 도시가 전부다. 이런 도시의 서기라는 것은 그만큼 공산당 권력의 중심에 가까이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다.
어떻게 이 정도의 인물이 이 만찬회에 참석한 걸까?
‘마천소의 인맥은 절대로 아니야.’
그는 선전시의 항만관리자일 뿐이다. 인구 16억의 중국에서 8천 명밖에 없는 공산당에 소속된 인물이니 꽤 고위직이라 볼 수는 있으나 선전 시의 서기를 부를 정도의 급은 결코 되지 못한다.
‘거물이랑 만나서 좋기는 한데 영문을 모르겠으니······.’
내가 주도했던 빌 게이트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아무튼. 그가 자신을 소개하고 너무 늦어지기 전에 인사를 받아야 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윤태식입니다.]
[그래. 내가 오늘 자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굳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네.]
‘응?’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 친구들 역시 원래 저 자리의 주인이 아니었을 걸세.]
그 말을 하고는 그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 상황이 웃긴 것인지. 나름대로 호방하게 웃었다.
나로서는 긴장이 탁 풀리면서 잔뜩 기대하고 있던 반전 드라마의 결말이 식상하게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너님이 나를 궁금해 해서 이 만찬회에 온 건데, 그걸 따라서 저 치들이 움직였고 그 결과, 마천소의 만찬회가 이렇게 급이 올라간 거다, 이거였어? 겨우?’
허탈했다. 무슨 대륙의 음모나 어마어마한 계획의 틈바구니에 끼인 건 아닌가 했는데 전부 아니었다니.
‘거참. 나쁘지는 않은데, 너무 시시하잖아. 이 몸이 능력을 발휘해야 상대할 수 있는 무림의 고수라도 등장하나 싶었는데. 하긴, 그래 버리면 갑자기 영화의 장르가 제멋대로 바뀌는 셈이 됐겠지.’
생각해보면 더 긍정적인 상황이다. 자기들끼리의 중요한 이유가 있는 곳에 끼어 들은 거라면 내 처지야 깍두기 또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아니었겠는가. 그게 아니라니 그냥 편하게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면 될 일이다.
[자네가 마화슈의 회사를 지금의 위치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준 은인이라지?]
[은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마화슈 회장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났던 것이니까요.]
[굳이 그렇게 겸양을 보일 필요 없네. 사내의 능력은 당당히 내보일 것이지. 굳이 숨겨야 할 것이 아니야. 그리고 이번의 라이언 맨 영화도 자네가 만들었다지? 재미있게 잘 봤네.]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선전의 서기는 공학자가 아니면 맡지 못한다네. 나 역시 지금은 이렇게 서기를 하고 있지만, 당장이라도 공대의 교수로 들어갈 수 있는 공학자일세. 덕분에 더욱더 재미있었어.]
뒤이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예는 어떤 일로 온 겐가? 이미 영화는 개봉했으니 그것 때문은 아닐 테고, 진짜로 이 만찬회에 참석하려고 왔다는 건 더더욱 아닐 테니 사업 때문일 터. 그대는 어떤 사업 때문에 방문했지?]
그가 간을 보지도 않은 채 대뜸 직구를 던졌다.
‘나야 땡큐지.’
어차피 이번 방문 목적을 그렇게 돌려서 숨길 필요가 없기도 하고 대충 보아하니. 이 자리에서 잘만하면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영화 때문에 방문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극장 개봉 같은 부류는 아니지요.]
[그럼?]
[저희가 지금 전 세계에 운영하고 있는 넷플렉스 서비스 때문에 현지 방문차 왔다고 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넷플렉스라······,]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하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러자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인물이 쉬링의 귀에 대고 중국어로 무언가를 말했다.
‘영감탱이. 아는 척만 열심히 했지 넷플렉스가 뭔지는 모르나 보군.’
옆 사람에게서 대충 배운 쉬링.
그는 고민이 지금 막 끝난 척 근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겠지만, 넷플렉스 같은 서비스는 중국에 들어올 수 없네.]
당연하다. 중국처럼 미디어 검열이 심한 나라에서 넷플렉스를 인정해줄 리가 없다.
일단 기본적으로 그런 방송 송출이 되려면 중국의 광전총국에서 송출 허가를 내어주어야만 하는데 넷플렉스는 미국의 서버에 업로드된 걸 전 세계에서 보는 방식이다.
처음부터 검열이 불가능한 형태라는 것이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이 부분은 제가 잠시 끼어들어도 되겠습니까?]
그즈음 마화슈 회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중국 최대 규모의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회장임에도 그는 우리 둘의 대화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이는 그만큼 공산당의 힘이 강력하다는 이야기기다.
한국이었다면 재벌가의 오너가 고작 시장의 눈치를 엄청나게 보거나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안 그래도 이 부분은 기회가 된다면 제가 먼저 윤태식 회장님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순서를 놓쳤군요.]
[저와 이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긍정적이다. 중국에 직접 들어올 수 없으니, 대안으로 생각한 게. 텐션의 유통망을 활용하는 것이었는데, 마화슈 회장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저희 텐션에서도 요후라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거 알고 계실 겁니다.]
요후는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지 못한 채 마화슈가 시작한 사업이다.
그리고 결과는?
[나름대로 의욕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사실 딱히 내세울 만한 성과가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채팅 서비스처럼 막대한 서버 비용을 지불하고 있을 뿐, 수익을 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이런 걸 보면 쉬링이 내 덕분에 텐션이 지금 정도로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도 영 근거 없는 건 아니게 보일 것이다.
[이번에 라이언 맨이라는 영화를 보고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요후에 부족한 것은 핵심 콘텐츠라는 것을요. 그리고 윤태식 회장님은 바로 우리에게 부족한 콘텐츠를 보유하고 계시죠.]
‘역시 마화슈 회장. 딱 내가 원하는 걸 준비하고 있었네.’
내가 중국까지 온 이유가 딱 나왔다. 목적은 ‘넷플렉스를 직접 스트리밍하지 못하니까 우리가 보유한 콘텐츠를 중국에 수출하는 형식으로 수익을 만들어내자.’는 거다. 이러면 수출한 영화가 영화관에도 걸린다.
그들이 검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플렉스가 검열을 받을 수 없다면 우리 말고 텐션이 대신 검열을 받아주면 될 일이지.’
즉, 그 기준만 맞춰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런데 함께 있는 쉬링 서기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그는 무언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조금 전, 자신에게 귓속말했던 이와 알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쉬링이 그를 부르는 이름을 듣고 저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렌칭파이라면 종웨이 회장의 이름이잖아.’
텐션이 선전에서 제일 큰 기업이라면 그다음으로는 종웨이가 있다. 즉, 1인자가 주최한 만찬회에 2인자는 서기라는 든든한 인맥을 앞세워서 들어온 거였다.
‘전형적인 꽌시로 성장한 회사라더니 이 영감탱이랑 친분이 보통 있는게 아닌가 보군. 이러면 마화슈의 말이 탐탁지 않을 수밖에.’
서열상 쉬링 서기가 더 위의 취급을 받는 것 같기는 한데, 또 쉬링 서기를 보면 마화슈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보면서 옆의 렌칭파이는 동급처럼 대우하는 것이 느껴진다.
‘꽌시는 복잡하다니까. 근데 저기는 네트워크 기업이잖아. 애초에 나와 함께할 수 있는 그런 기업이 아닌데?’
중국 최대의 네트워크 기업인 종웨이가 당장 스마트폰 사업에 뛰어든다면 혹 모른다. 그러나 중국은 나라의 스마트폰 사업을 배척한다. 인민들을 통제하는 데 악영향을 주는 물건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강하게 압력을 주는 탓이다.
그래서 중국은 ‘스마트폰이 없기에 세계에서 뒤떨어지고 있다’는 자료가 나오기 전까지 이 분야에 진출하지 않고 GF의 사업에 조금도 지장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거냐고.’
쉬링 서기와 렌칭파이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미안하네. 우리끼리 대화가 너무 깊어지는 것 같군. 그래서 말인데 혹, 다음에 약속을 한 번 더 잡아줄 수 있겠나?]
[서기님과 만날 기회가 더 생긴다면 영광이지요. 물론, 가능합니다..]
[고맙네. 그럼 일정을 준비해서 내일쯤 다시 연락을 줌세.]
뭐가 그렇게 급한 것인지. 쉬링과 렌칭파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겠다는 통보 정도만 하고 만찬회를 떠났다. 그리고 아부하려던 거물 인사가 빠져나가자 만찬회에 참여한 이들 대다수는 마천소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말았다.
[하하··· 이거, 금방 휑해지네요.]
머쓱했는지 마화슈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하며 웃었다.
[뭐, 어떻습니까? 우리끼리라도 만찬을 즐기면 되는 거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마화슈의 본의와는 달리 그는 맛있는 식사를 정말 불편하게 대접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인물은 틀림없었다.
< 집 떠나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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