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착착 >
*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래에서 아이디어를 쥐어짰는지, 치열한 논의가 있었는지, 누군가가 눈치만 보며 품고 있던 이야기를 이때다 싶어서 꺼냈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과정상의 질곡을 무시한 채 간단히 말할 수 있었다.
“빠르군요!”
“예. 마침 적극적으로 자신의 프로그램에 성우들과의 코너를 넣고 싶어 하던 PD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지는 않는다. 대신, 성우들과의 토크 쇼 비슷한 것을 내부 코너에 놓는 방식프로그램의 내부 코너로 넣겠다는 의도였다.
“지금은 성우들의 이슈가 큰 만큼 성우들로 게스트들을 초대하는 콘셉트입니다. 그러다 반응이 계속 괜찮다면 게임업계 관련자들을 계속 초청해서 게이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방식입니다. 중요한 건 임팩트이지 시간이 아니니까요.”
“괜찮군요.”
단일 콘텐츠는 다양성에서 한계가 있다. 성우라는 직종 역시 큰 프로그램을 계속 이끌어 나가기에는 어렵다. 그런데 내부 코너 정도면 딱 좋은 수준이다.
“언제 하는 프로입니까?”
“매주 목요일 오후 8시입니다.”
평일 시간대이긴 하지만 오후 8시는 황금시간이라고 봐도 된다.
“다음 주에 바로 방영될 수 있도록 빠르게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
성우 한진호는 주로 남성미 넘치는 저음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배역에서 1순위로 섭외되는 성우다. 덕분에 한 번 섭외가 되면 늘 비중이 큰 배역을 맡았고, 목소리 덕분에 업계에서는 꽤 인기를 누리고는 있었다.
이른바 해당 업계의 상위 1%에 드는 셈이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입을 다물고 만다.
“차라리 주연보다 조연이 낫지. 이건 일만 많고 돈은 안 되니까.”
조연과 주연 중에서 누구의 출연료가 많을까?
톱클래스의 연예인이 회당 출연료를 억 소리 나게 받는 신문기사를 자주 접하는 것이 대중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는 조연보다 주연이 압도적으로 나은 대우를 받는다고 여기고 대부분은 그게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성우들은 캐릭터가 주연이건 조연이건 출연료와는 차이가 없는 편이다. 이들의 몸값은 해당 작품의 비중이 아닌 성우 그 자체의 등급이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
즉, 짧은 시간에 많은 업무를 맡아야 돈을 벌 수 있고 분량이 많으며 한 작품에 올인해야 하는 주연보다 다작을 할 수 있는 조연의 형편이 더 나았다. 게다가 작품의 주인공 급은 대사도 많은데 큰 소리를 내는 일이 다반사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작위적인 대사는 문제될게 없지만 기합이나 비명을 꾸준히 내는 건 성대의 피로도가 많이 쌓인다. 그래서 주연급 성우가 다작을 하는 건 자신의 직업 수명을 갉아먹는 짓과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이 바닥에서 주인공은 명예를 위해서 하는 역할이라는 말이 있겠어.’
한진호는 항상 신께 기도한다. ‘이번까지만 주연을 하고 다음부터는 조연 위주로 받게 해주세요.’라고.
그러나 이 기도가 이뤄진 적은 별로 없다. 애당초 자신을 섭외할 때 PD의 요구사항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주연급이 싫다고 몇 번 걷어차다가는 아예 지금 갖고 있는 그나마의 인지도마저도 잃을 수도 있다.
“배역은 환상적으로 날아다니는데 현실의 나는 그저 목소리만 좋은 배 나온 아저씨에 불과하니.”
숨만 쉬고 지내는 데도 어느새 쑥쑥 자란 배 둘레를 보던 그는 걷기 운동을 하며 기분을 환기하기로 했다. 그의 산책로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중학교 인근이다.
추억이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든다. 교복을 입었을 때는 그토록 가기 싫었던 학교건만 갈 일이 없게 된 어른이 되면 아련하게 떠올리며 흐뭇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래서 교복 입은 학생들의 생기발랄함을 보는 일이 그에게는 작은 즐거움이었다.
‘막상 자기들은 저 시절이 좋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을 테지만.’
직장인은 대학생을, 대학생은 고등학생은, 고등학생은 중학생을···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은 과거를 미화하며 살아가는 사색에도 젖어본다. 그런 감상에 빠진 채로 걸으며 학생들의 대화를 들었다.
“야. 오늘은 같이 하기로 한 거 안 잊었지?”
“너 개 못하잖아. 너랑 같이하면 승률 개 떨어져.”
“노놉! 내가 인마. 예전의 내가 아니야.”
“얼씨구 그러셔?”
“그렇다니까? 내가 날밤 새우도록 각 잡고 연습 졸라게 했다는 거 아니냐. 지켜봐라. ‘내게서 숨을 곳은 없다. 독수리의 눈은 먼 곳에서도 표적을 찾아내지.’ 이 실력을 곧 보게 될 거야.”
목소리를 나직하게 깔고 하는 말에 그 학생의 친구들이 기겁했다.
“미친. 야, 문원식.”
“너 설마··· 이글아이 하냐?”
“어. 왜?”
“시발.”
“좆 됐다. 쟤 버려.”
“뭔 사람을 쓰레기 보듯 하냐? 말했잖아. 어제의 내가 아니라고.”
“미친새꺄. 하루 만에 늘긴 뭐가 개뿔이 늘어?”
“아. 빌어먹을 이글 충이 내 옆에 있어.”
“저 새끼 버리라니까. 너랑 안 해.”
“노노! 나 진짜 잘한다니까? 오죽 많이 했으면 대사도 다 외웠어! ‘피할 곳은 없다. 바람보다 빠르게!’ ‘내 안의 독수리를 끌어낼 준비가 되었다.’ ‘독수리의 눈으로 적을 향해 쏘아라!’ 게다가···”
변성기가 채 끝나기 전의 목소리다. 어른 흉내를 내는 모습에 한진호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는 기침하는 것처럼 입술을 가린 채로 웃었다.
“오오! 지저스!”
“내가 정말 이 미친 트롤과 함께 게임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러게 내가 버리자고 했잖아. 거점 점령 무시하고 혼자 RPG 할 때부터 알아봤다고!”
“벽타기 스킬을 연마 중이었을 뿐! 낙하하며 헤드샷 시키는 뽕맛을 네가 어찌 알리오?”
“옘병.”
허공에 대고 활을 쏘는 흉내를 내는 모습에 주위의 시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청춘이 보였다. 괜한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도 불쑥 들었다.
‘내 목소리를 열심히 흉내 내는 쟤네 뒤에서 ’독수리의 눈으로 적을 향해 쏘아라!’라고 하면 깜작 놀라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마스크라도 쓰고 나왔을 텐데. 그런데 게임이 재미있기는 한가 보네. 요즘은 저런 애들이 자주 보이는 걸 보면.’
성우는 인기를 몸으로 실감하기 어려운 직종이다. 천만 명이 관람한 영화라고 해도 그 영화의 배우와 스토리에 관해 이야기하지 더빙한 목소리를 칭찬하고 관심 갖는 일은 극히 적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게임 캐릭터의 목소리를 맡았다고 그 게임을 즐기는 직장인이 몇이나 되랴. 같은 논리면 한진호는 세상에서 가장 특이하고 위험한 자격증을 두루 갖췄을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열광하는 것과 달리 그는 조금은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인기보다는 돈이지.”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의 작업.
청소년과 어른의 차이가 이런 것이려나. 그건 한진호의 그간 업무 중 가장 훌륭한 일거리였다. 그래서 과거를 미화하고 ‘저때는 순수했지’라는 감상에 자주 젖는지도 모르겠다.
‘페이 좋고 목도 덜 쓰는 아주 좋은 꿀 같은 작업이었어. 게임에 애니메이션까지 세트로 주렁주렁 딸려 오기도 했고.’
보통 방송사라면 애니메이션에 참여하는 대신 게임 쪽 더빙을 후려치거나 했을 텐데 GF는 양쪽 지금까지의 관행과는 다르게 대우해주었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돈이 적힌 계약서를 보고 성우들이 당황했을 정도다.
그래서 다들 감사한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했다. 지금까지 프로페셔널하게 업무를 해왔으나 작업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정말 남달랐다.
“3대 공영방송을 다 합친 것보다 몇 배나 큰 회사라더니 확실히 다르긴 달랐어.”
덕분에 요즘은 기도문구도 이따금 바꿔서 한다. 기왕 주연으로 들어오는 일이면 GF쪽이랑 하게 해달라는 식으로.
‘그러고 보니 마이코닉스에서 개봉하는 영화 더빙을 맡은 배우들도 개런티가 장난 아니었다던데. 부럽다. 진짜 부럽다!’
듣기로 영화배우 뺨치는 출연료로 계약을 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니 더 말할 게 무엇일까. 자신도 이번에 GF와 작게라도 끈이 닿았으니 이 줄을 잡고 어찌어찌 더 관계를 지속해나갔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심정이었다.
그렇게 철학적으로 시작했지만 결말은 돈으로 끝나는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한진호의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 안녕하세요. 한진호 성우님 휴대폰 맞으신가요?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 네. 저는 GGT의 게임 맛보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작가를 담당하고 있는 박지애라고 합니다.
“GGT요? 거기라면 GF그룹에서 운영하는 곳 아니던가요?”
- 맞습니다, 한진호 성우님.
GF그룹에서 운영하는 국내 인터넷 방송국.
게다가 이곳은 자체 프로그램에 윤태식 회장이 몸소 참여하면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큰 대중의 관심을 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회장님이 항상 눈여겨보는 이른바 GF의 핵심 계열사로 알려진 방송국이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런 곳에서 자신에게 연락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마치 ‘시간 좀 있어?’라고 물어보는 전화가 뭔가 부탁할 일이 있는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듯이 프로그램 작가의 전화는 100중에서 95는 섭외가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한진호는 그녀의 목소리가 ‘개런티’로 번역되어 들렸다.
이 기회를 어찌 놓칠쏘냐.
- 이번에 저희가 게임을 말하다라는 새로운 코너를···
“하겠습니다.”
- 네? 저기, 아직 아무 말도···
“섭외 맞죠?”
- 맞긴 한데···
“하겠습니다.”
- 아··· 네. 그래도 어떤 섭외인지는 알고 하셔야···
“어떤 거든 상관없습니다.”
사회 경험이 많은 만큼 너무나도 잘 안다. 업계에서 이런 환경과 이러한 대우를 해주는 곳은 지금까지 한국에 없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진호는 그저 자신이 아닌 남이 그 자리를 가로챌까 걱정만 가득할 뿐이다. 그래서 냉큼 대답했고 확실하게 출연 확답을 받은 주장한 뒤에 코너의 세부 콘셉트를 들었다.
덕분에 지금의 열정을 넘어서서 목숨 걸고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이유도 알게 됐다. 찾아간 자리에서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결과 ‘GF를 위하여 게임홍보에 도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말에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된 것이다.
“고정 프로그램 하나 만들어내라고 압박이 어찌나 심했는지··· 어휴. 정말 말도 못 해요. 그런 플랜이 있으셨는지 아무도 몰랐다니까요?”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는지, 이 기회를 잘 잡으라는 조언이었는지 한진호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박지애 작가가 말이 매우 많은 스타일이라는 점이 감사할 뿐이다.
“회장님 특별 지시사항이 성우라는 직업과 성우님들에게 초점을 맞추라는 거였거든요. 장기적인 플랜으로 성우님들의 브랜드화를 이루고 지속적인 출연도 의중에 두셨다고 하니까요.”
“그러니까 코너 속 코너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물론이죠. 선뜻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프로게이머를 떠올려보세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희 회장님이 기획하시기 전에는 그냥 공부 싫어하는 게임폐인 정도의 이미지였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무식하다거나 수포자라는 식의 인식은 없어졌죠.”
산책로에서 장래희망으로 프로게이머를 꿈꾼다는 학생들의 대화를 들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성우는 어떻던가.
‘목소리가 좋으니 아나운서를 해보자’로 시작하지만 출중한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면 ‘목소리만 좋으니 성우라도 할까.’로 전환하는 식의 동기부여가 심심찮았다. 1지망의 목표가 아닌 후순위로 밀린 타협점인 것이다.
“하지만 큰 그림을 그리시고 회장님이 관심을 둔다고 해도 방송은 엄연히 소재가 있어야 하잖아요? 연출도 그렇고 뭐든 재료가 있어야 만들게 있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적합할지는 잘 모르지만, 제가 가진 자료들이 꽤 있고 아는 이야기들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생활에 밀접한 목소리. 너무나도 익숙한 직업.
그러나 친숙할 뿐, 막상 관심은 없다.
“게다가 성우들도 배우들이거든요. 다들 끼가 있습니다. 단지, 놀 마당이랑 적당한 무대가 없어서 그럴 뿐이죠. 아참! 너무 비하인드 스토리 말고 이런 것도 괜찮겠죠? 볼펜 물고 발음 연습하는 거 소용없다는 거요. 이게 상식적인 건데 의외로 모르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드라마가 참 사람들 여럿 망친 대표적인 일이지요.”
“좋네요. ‘그거 몰랐지?’ 같은 코너로 Q&A에 넣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생활 밀접 형의 익숙한 질문들이어야 하거든요. 그런 오해들이 더 있었나요?”
“작정하면 일주일은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발음에서도 잘못하는 사례들은 수두룩하니까요.”
돈과 인지도를 통한 대중의 명예도 두루 얻을지 모르는 기회다. 그는 놓치지 않기 위해 그간의 애환 중에서 정수를 뽑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 착착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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