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77화 (377/577)

< 착착착 >

바쁘다면서도 자주 놀러 오는 배추를 돌려보낸 뒤 나는 고민에 잠겼다.

‘지속력은 없지만, 폭발력은 있어.’

얼굴은 모르지만, 목소리로는 가족만큼 친숙한 사람들이 바로 성우다.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전철이나 버스에서 들리는 알림 메시지, CF, 영화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등 우리는 온갖 장소에서 저들의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다.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를 통해서 부각된 요소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어? 나 이 목소리 아는데?’라는 호기심에 찾아보았더니 정말로 S급으로 분류되어 유명한 그 성우의 목소리인 것이다.

게임을 아는 사람이 발견한 목소리만 익숙한 이들에게 전파되고 마침내 성우 그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기회는 아무나 거머쥘 수 있는 게 아니지. 이슈가 생겼어도 역량이 부족하면 그냥 휘발되고 말아. 성우들도 마찬가지야.’

대중의 관심은 무섭게 모여들었다가 냉정하게 빠져나간다. 볼 가치가 있으면 지켜보지만, 더 구경할 게 없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는다. 성우들에 대한 관심이 이와 같다. 지금 당장은 게임이라는 이슈를 통해서 관심이 생겼다. 그간 쌓아온 커리어가 콘텐츠로 작용했다.

하지만 동창회는 10년 만에 만나야 반갑고 대화가 끊이지 않는 법이다. 자주 만나서 케케묵은 옛날얘기만 하다 보면 소재가 떨어지고 흥미도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고 최근 얘기를 하자니 잘 나가는 녀석만 떠들고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나 정치에 대해서만 비평하기 일쑤다. 편하게 모인 자리이니 불편한 이야기를 빼면 알맹이 없는 잡담만 주고받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꿈속 미래 역시 고급 시계라는 게임의 인기가 꺾이기 무섭게 엄청난 폭발력을 보인 성우에 대한 관심과 각종 플랫폼들은 흔적만 남기고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좋지 못한 표현이지만, 게임의 흥행에만 기대서 연명한 식이 되었으니까. 게이머 못잖게 이쪽 직업군도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어라? 내가 왜 이렇게 공익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 거지?’

생각을 이어가다가 조금 늦게 자각했다. 발상의 시작은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의 마케팅과 관련한 거였는데 어느덧 폭 넓게 시장을 바꾸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일이 개인적으로 자주 생기는 편이다.

큰 힘에는 큰 역할이 주어진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넓게 보고 두루 퍼지는 파급력을 고려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대의명분을 따지게 되는 식이었다. 참 재밌는 부분이 거룩한 마음가짐이 없어도 전체의 파이를 키우려고 머리를 굴리면 이런 형태를 갖는 일이 잦았다.

“각 분야에서 자기 활동을 할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내게도 이득이 되는 선순환 구조.”

성우만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상대의 입을 통해 우리 게임이 계속 거론되고 상생하게 만드는 거다. 그러자면 꿈과 현실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정확히 알 필요가 있었다.

나는 게시판의 글들을 읽어 보았다.

- GF에서 이 게임을 포기했다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게, 아직 고를 캐릭터가 7개밖에 안 되잖아. 그런데 캐릭터의 성우들이 전부 업계에서 몸값 비싸기로 유명한 S급들이라는 거야.

- ㅇㅈ 그냥 그런 B급 게임을 만들려고 한 건데 이런 성우들을 기용할 이유가 있을까?

- S급? 누가? 어디?

└ 내가 추억의 만화랑 CF들을 소환해주지. 이 중에서 단 하나도 본 적이 없다면 내가 손을 지진다.

이후 한참 각종 제과류와 카드, 은행 CF, 일본 애니메이션의 이름이 한 뼘은 될 정도로 나왔다. 저걸 찾아내는 정성도 대단하지만 확인하고 올리는 끈기도 무시무시했다.

‘저 중에서 하나도 안 봤으면 그건 한국에서 살지 않았다는 뜻이지. 아무튼, 지금의 관심도는 이제 막 불이 붙으려는 정도군. 더군다나 꿈속 미래에서는 위튜브가 있어서 개인이 방송을 시작하기 용이했었지. 그런데 아직은 위튜브의 영향력이 꿈속과는 다른 정도니까······.’

앞당긴 미디어 문화 역시 마케팅에서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대중이 모여들 큰 공터가 없는 셈이라서 꿈속 미래보다 훨씬 작은 폭발에 협소한 영향력만 남길 수 있다.

- 몸값이 비싸다고 해봤자 꼴랑 성우지.

- ㅇㅇ 목소리 정도를 못 살 만큼 GF가 거지는 아니잖슴. 윤태식 지갑만 열어도 충분할걸?

- 그 새끼 엄청 부자라더라. 나랑 나이도 똑같은 새끼가······ ㅅㅂ

└ 아, 좀 닥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 맞아. GF에서 그 돈이 있느냐 없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저예산 게임이라서 홍보도 안 한 게임에 성우는 최상급으로 계약한다?’라는 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기업은 이익을 위한 곳이다. 애초에 성우의 목소리가 크게 중요한 게 아니라. 게임의 재미가 중요한 장르이니만큼 성우 비용을 조금 줄여서 그걸 마케팅에 활용한다면 GF입장에서 더 이득인 상황이 아니겠느냐?’ 이런 골자의 대화가 커뮤니티에서 굉장히 떠들썩해진 것이다.

‘알에서 이제 막 병아리가 나왔는데 나는 다 큰 시점을 내다보고 있는 셈이지.’

너무 이른 고민이라서 쓸데없다?

그럴 리 없다. 먼저 알기 때문에 미리 준비할 수 있고 때가 되면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미래를 아는 자의 힘이다.

이 업무는 GGT와 관련이 있다. 나는 김선일 사장에게 내 방으로 오라고 지시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의 성우들과 관련한 이슈가 제법 있더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괜히 자료나 모니터의 댓글을 보여주는 등의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됐다.

“재밌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이십니까?”

“우리는 생각도 안 했던 건데 유저들은 그게 막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하면서 각종 추리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덕분에 성우라는 화제도 이렇게 생겼으니까요.”

“그런가요? 저는 당초부터 회장님이 다 계획하셨고 게이머들이 이제 막 움직이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아, 그래요?”

“아니셨던 겁니까?”

하여간 김강철 실장도 그렇고 배추, 눈앞의 김선일에 이르기까지 죄다 나를 지나치게 고평가하고 있다.

극구 아니라고 하기도 멋쩍으니 그냥 웃어넘겼다.

“김선일 사장님.”

“네.”

“이런 화제가 높은 사건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야 ‘화제를 통해 우리가 얻어 타고 갈만한 무언가가 없을까.’ 정도의 고민을 하기는 합니다. 다만, 이번 건은 초점이 성우에 맞춰져 있고 이제 막 베타 서비스를 진행 중인 우리 게임에 관한 내용이니 어떤 식으로 건드릴지 아직은 유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 좋은 분위기를 망가뜨릴까 저어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더 건드려야지요..”

“네?”

“성우에 대한 이슈가 전에 없을 만큼 커졌고 당분간은 더 확장될 겁니다. 그렇다면 이게 얼마나 지속할 것 같습니까?”

“지속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유명 연예인들의 이슈도 한 달에서 두 달이면 시들해지는 마당에 성우들 이슈가 오래 갈 리 만무하죠. 화제는 곧 가라앉을 테고 그나마 유지하는 일도 오직 게임의 업데이트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냉정한 말이었다.

“그래요. 사장님 말씀대로 수명이 아주 짧은 이슈입니다. 아차 했다가는 휙 꺼지기에 십상이지요. 그러니 바로 움직입시다.”

“역시 복안이 있으셨군요. 지시하시면 바로 이행하겠습니다.”

그가 뭐라고 리액션을 하건 나는 내 할 말을 이어서 했다.

첫째는 소재 제공이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관심을 가지긴 하지만 성우들의 정보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원래 덕질도 무슨 떡밥이 있어야 덕질을 하는 거라서 떡밥이 없으면 시들해지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법이거든요.”

“네? 그게 무슨?”

“덕질을 몰라요?”

혹시나 덕질이라는 단어가 아직 사용이 되지 않는 건가 생각을 해봤는데 그건 아니었다. 기존에는 ‘열의를 띈 행동=버닝’이라고 표현해왔지만, 요즘은 버닝이라는 단어가 사라져가고 덕질로 변하는 중이었다.

“오리 같은 건가요? 아니면 군자의 덕···은 아니겠군요. 거기에 ‘질’이라는 글자를 붙일 리가 없으니.”

‘회장한테 사장이 치는 부장님 개그라니.’

김선일 사장님의 나이를 간과했다.

“그냥 오빠부대로 보시면 됩니다.”

“아! 이해했습니다. 덕질이 팬심, 팬질, 이런 식이었군요.”

무시한다.

“일본의 경우는 성우 자체의 인기가 대단하지만 한국은 아직 성우보다 캐릭터만 유명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니까 이참에 우리 성우들을 물밑에서 끌어올려 봅시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런데 말씀을 들어보니 지금 당장이라는 말씀은 특별 편성을 빼라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고려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선일 사장의 표정은 곤란함 그 자체였다.

똑같은 말도 누구에게 하느냐에 따라서 전달력은 달라진다. 만약 내가 ‘성우를 물밑에서 끌어올려 봅시다.’라는 말을 배추에게 한다면 ‘자료 찾아서 글 올릴까?’라고 되물을 것이다.

김선일 사장의 업무와 직함이 무엇이던가. 그는 GGT의 사장이며 내가 그를 불러서 말했으니 의도는 간단했다.

채널 하나 내놔.

“지금의 GGT는 초기와 상황이 다릅니다. 내년 초까지 편성이 미리 짜여 있고, 그에 따른 방송도 촬영이 이미 다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래서요?”

“예?”

“지금 방영하고 있는 방송이 전부 공중파를 잡아먹을 정도로 시청자가 많습니까? 아니면 광고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오는 게 있던가요?”

“아닙니다.”

“좋은 시간대를 차지하고는 있는데 인기가 없는 방송. 딱 하나만 빼서 특별 편성합시다.”

“혹시, 계획해 두신 방송 포맷이···”

“만들어보세요.”

이건 ‘답정너’의 상황이다. 무슨 말을 해도 무조건 내 방식으로 이끌어 갈 거라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였다.

김선일 사장도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시키시면 즉각 따르겠습니다.’와 같은 처음의 태도와 달리 주저주저하는 이유는 성우나 게임 홍보 수준의 일거리가 아니고 그간 내가 이끌어 온 운영방식 때문이었다.

내가 상세하게 아는 분야는 누가 뭐라고 하건 게임에 국한되어 있다. 그것도 업데이트 방향이나 게임성을 강조하기 위한 각종 요소를 운영자가 아닌 소비자의 시각에서 정확하게 본다. 나머지는 꿈속 미래라는 정보에 맞춰서 방향을 결정해 왔다.

즉, 특정 분야가 아니면 실무자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고 이건 때로 답이 안 나오는 것 같은 상황도 더러 있었다. 김선일 사장에게 성우들이 여기에 들어간다.

“회장님. 성우들을 데리고 방송을 제작한다는 것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포맷을 만들어서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준비를 갖춰서 방송할 수 있을 수준이 되면 지금의 화제는 묻혀버릴 겁니다. 저도 화제를 이용하고 싶었지만, 너무 수명이 짧은 화제라 고민만 계속하고 있었

고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한 마당입니다.”

“김선일 사장님. 그러니까 방법을 찾아야죠.

“그 방법이···”

“그냥 ‘없어요, 안 돼요, 찾지 못했어요.’라고만 하실 겁니까? 각 부장들의 아이디어는 확인해 봤습니까?”

“네.”

난색을 표하며 말을 이어가려는 그에게 나는 차갑게 식은 눈과 목소리로 말했다.

“PD들의 의견은? 현장에 있는 직원 그 어느 누구도?”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김선일 사장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취합하여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경직했던 표정을 다시금 미소로 바꿨다.

“김선일 사장님이 굳이 번거롭게 두 번 수고할 필요가 없죠. 회장실도 보여줄 겸 우리 다 같이 여기서 회의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 친구들은 제 앞에서도 의견을 말하라고 하면 자기 의견을 다 말하기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사장도 아닌 회장님 앞에서요? 어휴. 의견이 있어도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못 할 겁니다.”

압박이 잘 들어간 모양이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계급 사회라는 건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점들이 있기 마련이다.

갓 들어온 이등병한테 ‘침대에 누워서 편하게 쉬어.’라고 하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편하게 눕고 미라처럼 쉬게 된다.

직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회장?

말은 좋고 그림은 예쁠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합참의장이 말단 중대장들에게 직접 보고를 받겠다고 하는 소리와 똑같고 나 하나만 좋지, 저들에게는 스트레스일 뿐이었다.

‘예전부터 같이 작업을 하는 일이 많았던 게임 개발자들이랑은 다르지.’

거긴 회사의 초창기부터 나와 계속 얼굴을 마주했던 집단이지만, GGT는 ‘회장님과 한 판’ 때를 제외하면 거의 내 얼굴을 볼 일조차도 없었던 곳이다.

즉, 이건 명령이다.

편성 하나 빼서 포맷 마련해와.

지금 당장!

안 그러면 무서운 망태 할아버지가 아니라 회장이 내려갈 거다.

이 의미를 듬뿍 담아서 목소리만 부드럽게 전달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보고를 기다리죠.”

“넵!”

< 착착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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