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74화 (374/577)

< 질러 >

서로 말이 안 통했다. 하지만 덕분에 최근 생긴 기이한 눈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다들 내가 무시무시한 모략을 펼쳤다고 착각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걸 바로잡는 게 참 어정쩡하다.

못 믿겠다는데 굳이 믿으라고 열심히 설명하려고 할 만 한 문제도 아니고, 우연찮게 소가 뒷걸음질 치면서 쥐 잡았다고 하듯 우연이라고 하면 내 능력을 외려 깎아 먹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럼 건전한 게임문화 정착은 이뤘잖아. 다음에는 뭐 할 건데?”

“여기는 크라비티에서 잘 알아서 할 테니 나는 다시 바벨 쪽에 신경 써야지.”

“바벨?”

“어. 라이언 맨 영화가 실패하면 천억이 그냥 허공으로 날아가는 거잖아. 그럴 일 없게 해야 할 거 아냐.”

“거기는 내가 할 거 없지?”

“글쎄다. 일이 생긴다면 또 모르겠지?”

음흉하게 웃자 배추가 질겁을 했다.

“회장놈아. 제발 좀 살려줘라. 나 진짜 할 일 많단 말이야.”

“그런 놈이 툭하면 커피 얻어 마시겠다고 사무실에 찾아오고 게시판에 글 올라가는 거 구경하러 오냐?”

“그야 네가 말한 다음에 여론 돌아가는 거 구경하는 게 재밌어서 그런 거지. 사령탑에서 딱 내리면 거기에 맞춰서 판이 돌아가는 거잖아. 이게 옆에서 보면 은근히 쾌감도 있는 거 넌 모르지?”

“변태냐?”

“그게 아니라···”

“오냐. 일거리가 필요하다면 내가 맡길 건 얼마든지 만들어줄 수 있지. 빅 데이터···”

“어? 응? 아냐! 나 지금 바빠서 바로 가려고 했어! 진짜야!”

뭐에 놀란 듯이 후다닥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원 샷하고는 재빨리 사무실을 벗어났다. 그러다가 멀리에서부터 비명이 들렸다.

“으아아! 뜨··· 뜨거! 뜨거워!”

커피를 단번에 들이켠 뒤에야 사무실 바깥에서 비명을 지르다니 저놈도 연구대상이다. 나는 배추의 비명에 혀를 찬 뒤 전화기를 들었다.

“김강철 실장님. 사무실로 좀 오시죠.”

- 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를 위해 일해 볼 시간이다.

*

기술이 발달할수록 게임을 개발하고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졌다. 효과적인 도구와 선진적인 시스템이 더해졌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답은 완성도의 기준점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게이머스 포럼을 런칭했던 초창기 시절.

뉴 온라인이 처음 베타 테스트를 시작했을 그 즈음의 뉴 온라인 클라이언트의 용량은 고작 34메가 바이트였다. 하지만 지금은 메가가 아닌 기가바이트가 기본 단위다.

향상된 그래픽! 세세하면서도 많아진 오브젝트!

다채로운 광원 효과를 비롯한 현실적인 요소들이 게임 세상에 구현될수록 게이머는 매혹을 느끼고 깊이 몰입하게 된다. 훗날 가상현실과 체험이라는 말을 쓰는 일이 결코 과장이 아닌 지경에 이르도록 말이다.

이는 그만큼 개발과정이 복잡해지고 다변화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김강철 실장을 불러서 진행상황을 확인하면서도 나는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직 한창 개발 중일 테고 중간보고를 받으며 몇몇 가지를 지시하는 일이 고작일 테니 말이다.

‘2008년 즈음이라고 했었지.’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의 베타 테스트는 그때가 되어야 외부에 공개할 수준에 도달할 것이다.

그런데 김강철 실장이 뜻밖의 말을 했다.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의 알파 테스트를 끝마친 상태입니다. 이제 베타 테스트를 했으면 싶습니다.”

나는 달력을 다시금 보고는 그에게 되물었다.

“지금요? 이제 겨우 6월인데?’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소 2년으로 잡은 개발 기간이 대폭 단축되었다는 뜻이다.

‘고작 1년도 안 되어 게임을 개발했다고? 혹시 내가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에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고 대충 한 거 아니야?’

내가 깐깐하게 구는 타입이라는 것을 잘 알 텐데 ‘설마 그랬을 리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황당해하는 나를 보며 김강철 실장은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회장님이 이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하긴, 막상 개발실에서 살고 있던 저도 이 속도에 적응이 안 되는데 회장님은 오죽하시겠습니까?”

“농담이 아니었나 보군요. 진짜로 베타 테스트라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 않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한 번 확인하러 가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다. 안 그래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다.

“그래요. 가서 좀 봅시다.”

바로 개발실에 이동했다. 그리고 재차 놀라고 말았다.

모니터에 출력된 게임은 그냥 눈으로만 봐서는 이미 완성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상이 아니고 플레이 중인 거 맞죠?”

“네. 지금 여기에 있는 지원과 저쪽 끝에 있는 직원이 직접 플레이를 해보는 중입니다.”

게임은 초기 목적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그래픽을 가지고 있다.

2004년 즈음에 출시된 캐주얼 레이싱 게임 수준의 그래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픽의 수준이 낮다고 해서 게임의 수준이 낮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캐릭터는 몇 개나 됩니까?”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게 몇 갠데요?”

“총 7가지의 캐릭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들입니까?’라고 물으려다가 질문을 거두었다. 게이머로서 안달이 난 것이다.

“제가 직접 해봐야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김강철 실장은 이미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날 비어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보아하니 미리부터 내가 플레이 해볼 수 있도록 준비를 다 마친 것 같았다.

“우선 AI와 해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직원 아무나 골라서 해보셔도 됩니다.”

본래는 AI대전을 먼저 해볼 계획이었는데, 취소다.

‘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니까. 괜히 직원을 상대로 해보고 싶어졌어.’

대한민국의 남자는 온갖 욕설은 참을지언정 ‘게임 허접’이라는 말에는 발끈하는 특성이 있지 않던가.

“애초에 PVP게임으로 기획된 건데 사람이랑 해봐야지요. 아무나 해봅시다.”

그렇게 1대 1 대결이 시작 됐다.

현재 고를 수 있는 일곱 개의 캐릭터는 라이언맨, 스파이더 가이, 헐커, 캡틴 실드, 이글 아이, 천둥 군주, 그린 코볼트였다.

초기 기획에 참여 했던 만큼 캐릭터들의 기본 특성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원래 이런 게임은 저격충이 진리지. 정확하게 맞출 컨트롤만 된다면.’

이글 아이는 활을 사용하지만, 저격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그거 어려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런. 김강철 실장님. 서운합니다. 제가 누굽니까? 회장님과의 한판으로 GGT를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플레이어가 바로 접니다. 웬만한 게이머들과 맞붙어도 쉽게 지지는 않을 아마추어 중의 고수라고요.”

“웬만한 정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이건 처음 플레이하는 거잖습니까?”

“괜찮습니다.”

정통 FPS도 아니고 이런 캐주얼한 FPS에서 처음 하는 거라고 클래스가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게 대결을 시작했다.

맵은 장난감을 콘셉트로 한 것답게 대형마켓과 테마파크가 있었다. 어디가 좋겠느냐는 물음에 대형마켓을 내가 골랐다.

잠시 후, 로딩 화면이 끝나고 마켓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기자기한 장난감으로 꾸며진 덕분에 고전의 그래픽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래픽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생각보다는 진짜 장난감 세상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해보니까 더 괜찮네.’

아직까지는 매우 만족에 점수를 주고 싶다.

‘그래도 일단 테스트 정도는 해 봐야지.’

이글 아이의 특성은 총 세 개가 있다.

기본 베이스라 할 수 있는 일반 화살, 지형지물을 활용할 수 있는 로프가 달린 화살, 활시위를 빼어 봉처럼 사용하는 근접기다.

‘테크니셜하면 중거리 저격으로 이용하는 편이 가장 좋고.’

로프 화살이나 근접기술은 곁가지와 같다. 자고로 저격의 백미는 헤드 샷과 일발필중의 살상력 아니겠는가.

‘이글 아이가 지금은 유일해.’

하이퍼 FPS의 특성을 따르는 이 게임에서 헤드 샷은 오직 저격 특성을 가진 캐릭터에게만 적용된다. 다른 캐릭터로는 백날 머리를 맞춰봐야 그냥 타격을 준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캐릭터를 조작해서 화살을 몇 번 쐈다.

“곡사도 되는군요. 이런 것까지 다 적용시키면서 벌써 이 수준으로 개발을 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래픽을 조금 포기하는 것으로 정말 다양한 것들이 게임에 들어갈 수 있었나보다.

“원래 게임이라는 게 ‘어떤 게임을 개발할 것인가’가 까다롭습니다. 즉, 이 부분이 명확하면 그 이후는 순탄하게 진행되죠. 대부분은 이게 명확하지 못하고 콘텐츠의 문제, 수익화의 문제 때문에 갈피를 못 잡다가 개발 기간이 늘어납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놀라운 건 놀라운 거다.

그 사이 대형 마켓에서 안내 문구가 들렸다.

『적이 A 거점을 점령하는 중입니다.』

‘거점 점령하는 맵이구나.’

대충 테스트는 해봤으니 이제 실전을 경험할 차례다.

지형 구조는 단순했다. 맵을 전혀 모르고 처음 플레이 중인 내 입장에서도 길을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쉬웠고 그 덕분에 상대가 자리 잡고 있는 거점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얼추 이 정도의 거리에서는 이런 느낌으로······.’

감각적으로 이쯤이면 되겠다 싶을 때 마우스를 클릭!

『헤드 샷!』

바로 명중이다.

『라이언 맨 사살』

『+90 Point!』

“어엇! 뭐야?”

맞은편 끝자리에서 플레이 중이던 직원의 놀란 음성이 내 자리까지 들렸다.

“크흠.”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김강철 실장도 당황한 표정으로 내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화살을 세발 밖에 안 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게 바로 맞습니까?”

“이런 계산쯤이야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요.”

라이언 맨의 리펄서 건이나 스파이더 가이의 거미줄 같은 무기와 달리 이글 아이의 화살은 탄도 계산이 필요한 무기다. 이는 일전에 대화했던 오버 레이냐 발사체냐의 차이였는데 리펄서와 거미줄은 오버 레이고 화살은 발사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오히려 게임 경험이 없어도 감을 잡기 쉬웠다. 화살은 발사체의 특성을 살려 탄도학이라는 물리법♣? 적용시켰기에 날아가는 화살의 탄도학 계산을 해야 정확히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제아무리 게임을 많이 해도 계산을 못 하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이런 디메리트 없이 헤드 샷 판정을 주면 밸런스 파괴지. 나야 복잡한 계산 없이 그냥 감으로 때려 맞추면 그게 정답이지만, 나 같은 부류는 세상에 둘도 없을 테니까.’

김강철 실장은 지금 고작 세 발의 화살을 실험적으로 쏘아 본 것만으로 정확하게 상대를 저격하는 내 플레이에 질린 표정을 짓는 것이다. 이런 시선은 예전에 송진호한테 많이 받아봤던 것 같은데, 참 오래간만에 느껴본다.

『A거점을 점령했습니다.』

가볍게 미션 달성.

이제 상대 거점으로 이동할 즈음, 잠시 후 이름 모를 직원은 부활한 캐릭터를 이끌고 전장으로 복귀 했다.

『헤드 샷!』

『라이언 맨 사살』

『+90 Point!』

물론, 0.5초 컷에 불과했다.

“아악!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누가 그랬던가?

고민과 반성 없는 역사는 반복 되는 법이라고.

『헤드 샷!』

『라이언 맨 사살』

『+90 Point!』

화살 한 대에 바로 리타이어다.

“진짜 뭐지? 아! 나 지금까지 회장님 캐릭터 한 번도 못 봤어! 이게 말이 돼? 지금 B거점까지 점령 됐는데! 상대 캐릭터랑 마주 본적도 없어!”

“민호야. 조용히 좀 하자. 회장님 다 들으신다.”

혼란에 빠진 직원에게 김강철 실장이 말했다.

“헙! 죄송합니다!”

“잘 좀 해봐.”

“넵!”

그러나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다.

민호라 불린 직원은 최대한 내게서 안전한 자리를 잡아보겠답시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글 아이 역시 로프 화살을 사용하면 건물 위로 올라가기 좋은 캐릭터다. 경쟁사의 박쥐 맨처럼 화살을 쏘면 로프가 당겨져서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기에 높은 지형을 선점하기 수월

했다.

‘덕분에 높은 곳으로 올라오면 오히려 맞추기가 더 쉽답니다.’

『헤드 샷! 라이언 맨 사살 +90 Point!』

‘이거 너무 쉽잖아.’

하여간 우리 개발자들은 정말 게임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정작 그 게임을 플레이하는 재능은 어지간히도 없어 보인다. 연습생들 통해서 전문 테스터들을 키우지 않았으면 자기들이 만든 캐릭터를 개발자가 이해 못 해서 밸런스가 무너지는 황당한 일들이 정말 많이 생겼을 거다.

『승리!』

아이 손목을 비틀 듯이 너무나도 쉽게 이겼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직원은 나와 마주한 시간이 3초를 넘긴 적이 없었다. 접대 플레이건 뭐건 시도조차 불가능했으니 짱짱한 내 실력은 여전한 셈이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승패가 아니니까.’

핵심은 이 게임의 완성도다.

평점은?

‘퍼펙트.’

놀라울 만큼 빠르게 개발된 이 게임은 그보다 더 대단하리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훌륭합니다. 다른 캐릭터들은 언제쯤 업데이트가 가능하죠?”

“우선 3개의 캐릭터들이 지금 테스트를 통해 업데이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추가로 2개 캐릭터의 개발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럼 그 3개의 캐릭터는 조만간에 업데이트되는 겁니까?”

“네, 회장님. 2주 안에 베타 테스트가 가능합니다.”

“10개의 캐릭터라··· 아주 좋군요.”

이 게임의 성공에 확신이 들었다.

“베타테스터 진행하세요. 클로즈 없이 바로 오픈 베타로 진행합시다.”

“알겠습니다.”

내가 봤을 때, 이 게임은 오픈 베타를 길게 해서 많은 사람이 우리 게임에 익숙하게 만드는 편이 나았다. 그만큼 잘 빠진 상품이었다.

그렇게 2007년 6월 8일.

갑작스럽게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의 오픈 베타 테스트 시작 날을 결정했다. 일반적인 게임사가 오픈 당일 특수를 위해서 일찍부터 홍보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행보였는데 이건, 게임의 성공 자신도 있었거니와 애당초 수익을 위한 게임이 아니라는 점이 큰 이유였다.

“흥해라! 라이언 맨!”

우리의 영화는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를 통해 제대로 홍보될 것이다.

< 질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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