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73화 (373/577)

< 질러 >

다음은 또 다른 국산 게임인 월광세계의 차례다.

가입 후 캐릭터 생성, 랜덤 박스를 구매한 뒤 첫 개봉을 했다.

짜란!

『월석

고대 달의 주민들의 힘이 담겨 있는 신비한 돌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이것을 이용해 장비를 강화할 수 있다.』

이쪽의 과금 시스템은 푸른 보석과 다르다. 높은 등급의 아이템 획득이 목표가 아니라 강화재료인 월석이 중요했다.

“한 방에 당첨이니 시작은 좋아.”

이후 박스 개봉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불쾌한 민낯이 드러났다. 첫 상자에서 획득한 것과 별개로 이후로는 10개째에 획득, 그다음은 100개째에서 월석이 나왔다.

이후에는 랜덤 박스 백 수십 개를 열어도 월석은 구경조차 못 했다. 처음에는 쉽게 주고 나중에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확률이 낮아지는 기분이다.

‘이 자식들은 또 무슨 농간을 부린 거지?’

어차피 돈을 쓰기로 작정한 몸 아니랴. 현금이라는 총알을 아낌없이 쏘면서 테스트를 반복했다. 그 결과, 이 게임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유저를 농락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인벤토리였구나.”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율을 방법은 이렇다. 일단, 캐릭터를 새로 만들거나 자신의 인벤토리에 있는 모든 월석을 싹 비워야 한다. 상점에 팔건 어찌하건 간에 계정에서 월석을 몽땅 없애야 했다.

그다음에 랜덤 박스를 구매하면 달랑 몇 개만 랜덤 박스를 개봉해도 무조건 월석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 1개라도 월석을 가진 상태로 추가 구매하면 곤란해진다.

월석이 0개일 때는 랜덤 박스 3개 이하에서 획득.

1개 일 때는 랜덤 박스 10~20 중에서 획득.

2개일 때는 80~100개를 개봉해야 획득.

‘3개 이상부터는 불가능!’

나는 이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 끝에 거듭 증명했다.

랜덤 박스를 만들 때 가장 우려한 게 이런 거다. 그냥 정직하게 판매해도 수익이 몇 배로 증대되는데 사업가의 욕망은 정도라는 것을 모른다. 정직함을 살포시 내려놓은 대신 몇 곱절의 이익을 볼 수 있다면 주저 없이 그 길을 선택하고 만다.

‘고작 한 달 반 만에 이 정도까지 해내다니. 진짜 다이내믹 코리아. 스피디하게 베껴서 업그레이드까지 하는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중국 욕할 게 아니라니까··· 시발.’

사실 자괴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딱히 한국의 의식수준이 부족하다거나 우리만 욕심이 들끓어서 이러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도 실망감을 느끼는 건 악어의 눈물 같은 심정으로 ‘내가 첫 포문을 개념 있게 열면 다들 잘 따라와줄 거야.’라는 막연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줄 알면서도 일말의 희망은 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씁쓸하게 영상을 계속 찍었다. 하나씩 적나라한 랜덤 박스의 검은 속내가 드러났고 결과들은 전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어느덧 2억을 다 썼고 남은 게임은 딱 하나가 됐다.

정령의 숨결.

“대놓고 저격을 하는 거긴 해도 달랑 우리 게임만 빼놓으면 그건 너무 노골적이지.”

이번에는 남한테 돈 주는 게 아니니까 속이 덜 쓰리다. 추가로 결제한 5,000만원으로 랜덤 박스 개봉 영상을 찍었다.

‘혹시라도 나 모르게 조작이 있거나 한 건 아니겠지?’

이런 걱정에 살짝 쫄리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는데.

달그락달그락··· 짜잔!

달그락달그락··· 짜잔!

달그락달그락··· 짜잔!

···

“앞의 게임들이 생 양아치라서 그런가? 이건 완전 혜자잖아.”

‘사장님이 미쳤어요!’라며 옷을 팔아 재끼는 상인처럼 랜덤 박스에서 별별 아이템이 다 나왔다. 정령의 숨결은 확률 조작 같은 게 없었던 것이다. 이걸 확인하고 나니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이다.

수가 많았던 만큼 촬영은 장장 12시간이나 이어졌다. 나는 이 긴 영상을 마이코닉스에 보냈고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편집본이 완성됐다.

“이제 터트려볼까.”

두근두근하는 심정으로 열의와 성의를 다해 완성한 폭탄을 게이머스 포럼에 올렸다.

그리고 5월 2일.

일본의 커뮤니티는 큰 충격과 분노에 빠졌다.

- 이번에 게이머스 포럼에 올라온 영상 본 사람?

- 미개한 조선 놈들 게임 물고 빨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

- 제길. 이거 단체로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완전 우롱한 거잖아.

-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냥 한국게임에 빠져서는 병신머저리들처럼 굴더니. 쯧쯧.

- 조선 놈들이 우리 대일본제국에 와서 사기치고 그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그걸 왜 당해주냐? 머저리들~

- 한국 새끼들은 다 사기꾼이야! 혐한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 웃기고 있네. 지금 영상 속 게임 중에 정령의 숨결도 있는데. 그건 뭐 일본 게임이냐? 거긴 완전 깨끗하거든?

- 달랑 하나? 겨우 그거로 용서를 해? 더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냐?

- 확대해석하지 마. 각각 다른 건데 한꺼번에 싸잡아서 그러는 게 더 멍청한 거지.

- 원래 대부분의 조선놈들 민족성이 음흉한 거야. 네가 핥는 정령의 숨결이 변종인 거고.

- 맞아. 사기꾼들!

클린한 게임 문화를 위해 했던 작업은 다른 방향으로 불씨가 튀어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한국 게임의 약진을 못마땅해 하던 이들이 혐한 운동과 뒤엉켜 일이 복잡하게 번진 것이다.

온라인상의 영상은 재가공이 손쉽게 일어난다. 자극적으로 동영상의 일부를 잘라서 일파만파 퍼뜨렸고 여기에는 정상적으로 아이템이 나오는 정령의 숨결은 빠지기 일쑤였다. 그 탓에 ‘한국 게임은 전부 사기’라는 프레임이 강화됐다.

“그나저나 저 우익 놈들은 툭하면 조센징 타령이야.”

질 떨어지는 놈들에게 빌미를 준 기분이라 썩 달갑지 않았다. 살판났다고 활개 치는 녀석들의 행태를 보면 괜히 이런 걸 공개했나 하는 생각도 삐쭉 솟는다.

‘무시하자. 상대해봐야 내 수준만 똑같이 떨어지는 거지. 그보다 마냥 손 놓으면 안 되겠어.’

선입관이라는 것은 무섭다. 한번 인식이 그리 잡혀버리면 그 방향을 되돌리는 데에는 몇 곱절의 노력이 필요해진다. 나는 민감하게 대응했고 풀 편집본을 최대한 퍼뜨리거나 정령의 숨결만 따로 자른 영상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또한, 돈 많은 익명의 제보자가 움직일 턴은 끝났다. 이제 회사 차원에서 대응하고 홍보팀에서 본격적으로 나설 차례다.

긴급하게 회의를 소집했다.

“지금 화제가 된 영상으로 일본에 많은 파문이 생긴 거 알고들 계실 겁니다.”

“네.”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일본 언론 쪽에도 보도자료를 보내세요. 그리고 GF는 늘 정직하고 바른 게임 문화를 만들어갈 거라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잡으십시오.”

“알겠습니다!”

전력 대응 이후 혼란과 소란의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바쁜 물밑 작업은 정의로운 결말을 빚어냈다.

『그동안 저희 월광세계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월광세계의 서비스 종료 공지!

『랜덤 박스의 확률과 관련하여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푸른 보석은 대대적인 사과와 함께 누가 봐도 혜자스러운 이벤트를 진행했다. 성난 군중을 달래주기 위한 살을 도려내는 결단이었다. 그러나 분노한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콘크리트 층으로 보일 정도로 굳건했던 골수팬이 이탈하며 점유율은 15% 아래로 계속 떨어진 것이다.

*

산불이 났을 때의 진화 작업에는 잔불 제거가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불만 꺼뜨리면 언제 불씨가 날아가서 다시금 큰 화재를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일어난 랜덤 박스의 이슈 역시 이와 같았다. 일본에서 일어난 대형 산불은 월광세계의 서비스 종료와 푸른 보석의 백배사죄를 통해 누그러지기는 했다. 그러나 작금의 세계는 인터넷을 통해 국경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 오래 아니겠는가.

한풀 꺾인 듯 여겨졌던 랜덤 박스 오픈 동영상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아시아 바깥의 세계로 뻗어나갔다. 그 탓에 잊을만 하면 회자되었고 특히 단순히 푸른 보석이라는 게임 하나를 넘어서며 오성 전자 자체의 브랜드 이미지에 손상을 가하는 지경에 치달았다.

“이 모자란 새끼!”

“이사님. 이건 GF의 농간이 분명합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게이머가 1억 넘게 과금한 영상을 올린단 말입니까?”

“누가 그걸 몰라? 중요한 건 그 새끼가 무슨 짓거리를 했느냐가 아니야. 네 수작질이 들켰다는 거지!”

“저··· 저요?”

“그래! 너!”

이충현 이사의 일갈은 모든 책임을 심진호 부장이 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실로 눈앞이 캄캄해질 따름이다.

“당장 책임지고 꺼져!”

반론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심진호 부장은 일자리를 잃었다.

“시발! 윤태식!”

오성 전자는 들끓는 비난 여론을 식히기 위해 랜덤 박스 담당자인 그에게 공개 사과를 지시했고 그는 강제로 사퇴하게 됐다. 실적에 눈이 먼 한 명의 일탈로 말미암은 일이고 오성 전자는 단호하게 대처했다는 이미지를 확실하게 주기 위함이다.

대기업에서 이런 공개 사과를 진행한다는 것이 이례적이었고 또, 오성 전자의 대처는 신속했기에 불같은 여론을 빠르게 식힐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기 마련 아니겠는가.

-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 참담한 심정~ 눈물이 흘러~ 아이곸~ 우리 부장님 우짜누~

- 저게 다 일본이니까 부장급이 눈물 사과도 하는 거임. 울 나라였으면··· 어이쿠~

- ㅇㅇ 한국에서 저런 일은 있을 수 없엉~ 여긴 오성나라 짱짱~

비교되는 대응은 세계의 여론을 잠재웠을망정 국내 게이머들의 불만을 키우고 말았다.

이러한 기사들을 읽은 배추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내게 물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2억 들여서 박스 오픈 영상 하나 찍겠다고 했을 때는 그냥 미친 줄만 알았거든? 그런데 겨우 그거 하나로 오성 전자를 무너트리네?”

“무너지기는. 그냥 흠집을 냈을 뿐이지.”

“월광세계처럼 바로 종료만 안 했지, 푸른 보석도 식물인간 상태 만들었잖아.”

“고작 영상 하나에 무너질 사업을 하고 있었던 저놈들이 오히려 대단한 거야.”

“천재적인 네 눈에는 죄다 허접해 보이긴 하겠지.”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째려봤다.

“너, 말투가 진수성찬 닮아간다? 요즘 같이 노냐?”

“어느 회장님이 일거리 폭탄을 안겨줘서 놀 시간이 없어. 그보다는 걔들도 이런 심정이니까 그랬을 거야.”

“뭔 심정?”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로만 공부했다는 인터뷰를 하는 걸 구경하는 심정. 휙휙 붓질하고는 ‘어때요, 참 쉽죠?’라고 하는 파마머리 화가를 보는 기분.”

‘진짜 잘난 놈이 헛소리하고 있네.’

틀린 소리다. 게다가 이번 일이 이 정도로까지 퍼져나가고 바라던 결과를 이룬 것에는 운과 타이밍이 큰 몫을 해주었다. 만약, 시간이 더 많이 지나고 확률 조작이라는 행태가 게임계에 완전히 자리 잡은 후였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꿈속 미래에서는 확률 조작이 터지건 말건 멀쩡히 유지 되는 게임들이 넘쳐났으니까. 오죽하면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게임사가 한국 유저들을 개 돼지 취급해도 할 말 없다는 자책이 나오곤 했었지.’

의심되는 상황이 반복 되더라도 공개적으로 터지지 않으면 그냥 의심만으로 끝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런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 익숙해지고 쉽게 적응하고 만다.

하지만 지금은 랜덤 박스 초창기다.

‘개발자와 게임사들에게 경종이 되어주는 좋은 선례가 됐어.’

그릇된 익숙함에 적응하기 전, 게임계를 향한 경고는 제대로 이루어지며 암묵적인 룰이 완성됐다.

유저를 대상으로 사기를 치지 말 것!

‘이제 랜덤 박스가 매출 극대화에 좋기는 하지만 유저를 농락했다가는 게임도 몰락한다는 걸 확실하게 알았을 거야.’

회사는 패배의 기억.

게이머들에게는 승리의 기억!

‘좋은 처방전을 완성했어.’

아직은 나오지 않은 유명 드라마의 대사 중에는 ‘인간의 존중이란 두려움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있다. 꿈속 미래와 달리 현실의 게이머들은 이겨본 경험이 있으니 이제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게임사도 쉽게 장난을 칠 시도조차 하지 못하리라 본다.

캐시 아이템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면, 진짜 큰코다칠 테니까.

만약 어떤 강심장이 이 선을 넘는다면?

업계 종사자인 내가 조짐을 아는 순간 얼마가 됐건 돈과 시간을 들여서 영상을 찍은 뒤 확 터트려 버리겠다.

“이번 사태 때문에 크라비티의 주가도 많이 올랐다며?”

일반적인 사람들은 게임 점유율이 오른 것보다 주가 상승에 더 기쁨을 느낀다. 이유는 게임 점유율의 상승이 곧 주가 상승으로 인한 재산 가치의 증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분한 부를 달성했기 때문에 오히려 돈은 목표를 달성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옵션이 된 지 오래다.

“주가가 오르는 것보다 일본 온라인 게임계의 점유율이 오른 게 중요하지.”

내 대답에 배추는 ‘어련하겠어.’라며 내게 되물었다.

“그럼 이제 계획대로 판을 만들었으니 본격적으로 일본 게임 시장을 확 휘어잡을 거지?”

“계획이라니?”

“윤태식 회장님이 그린 큰 그림말이야. 동영상 폭탄 터트려서 일본에 뿌리박은 경쟁 기업들을 전부 작살냈잖아. 이게 다 우리의 독주로 가려고 판 짠 거 아니었어?”

지금까지의 내가 했던 행동들을 보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 이런 거였나 보다.

“아닌데?”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배추는 서운해하는 눈치였다.

“영상 편집 못한다는 비밀도 아는 친구사이인데도 그럴 거냐? 나한테까지 네가 직접 나서서 이런 사건을 만든 걸 숨기려는 건 아닐 테고, 뭐 때문에 그래?”

“오해가 있는데, 내가 이런 건 어디까지나 건전한 게임 문화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야.”

“아. 뭐래. 되도 않는 소리 할 거면 차라리 말을 마라. 말하기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될 걸 무슨 건전은 개뿔이.”

“진짠데.”

“완전 메소드네. 안팎으로 클린한 이미지를 벌써부터 준비 중이니.”

“아니라니까?”

“알았어. 그런 셈 칠게.”

< 질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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