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72화 (372/577)

< 질러 >

게이머스 포럼이 내 소유다. 사이트는 물론이고 서버까지 몽땅 다 말이다. 그런 만큼 국내 게임 여섯 개의 자료를 취합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테크랜드에 전화 한 통으로 해결했고 나는 무려 A4용지 7,000장의 자료를 전달

받았다.

“너무 많아서 출력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파일로 보냈습니다.”

“그냥 읽으면 5월이 그냥 지나갈 정도네요.”

제대로 다 읽는 일은 버겁다. 하지만 전부 확인해서 문제점을 파악하는 일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랜덤 박스의 확률 조작이라는 핀 포인트를 짚은 채다. 그렇기에 직원들을 비롯하여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

“회장님의 지시 사항대로 자료를 취합했고 발견한 공통분모를 일부 정리했습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분량이 많은 관계로 사례는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대략은 이러합니다.”

“인증 글들이군요.”

유저들이 최상위 아이템을 획득했다고 인증한 글들의 통일된 부분. 이름자만 보면 그 게임의 게이머들은 누구나 알법한 네임드들에게는 일관성이 있었다.

“전부 골드 등급의 박스를 130개에서 150개 사이로 오픈했을 때, 아이템을 획득한 것으로 나옵니다.”

“100개 미만의 상품일 때는 없습니까?”

“있습니다만, 이들 중에는 유명한 플레이어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사이트에 가입하고 활동한 이력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푸른 보석에서 유난히 도드라진 부분이죠.”

“오호라.”

“그리고 이 게시판 자료는 월광세계라는 게임의 겁니다. 여기서는 강화를 위한 필수 아이템인 월석의 획득률이 천차만별입니다. 특히나 과금이 많은 사람이 오히려 더 낮은 획득률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서도 기묘

한 상관관계가 있었습니다.”

개개인의 사례일 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파편화된 자료를 깡그리 모으는 수고만 감내한다면, 그리고 이를 대신할 수단만 있다면 자료 분석은 누구나 해낼 수 있다. 대단한 능력 없이 상식의 잣대로 보면 되기 때문이다.

“우선, 인증 글을 올린 아이피 확인해 보세요. 한국인가 일본인가.”

“그건 이미 확인을 해보았는데 일본으로 나타났습니다.”

‘하긴. 이 정도로까지 멍청한 실수를 하지는 않겠지.’

원래 똑똑한 사람이 사기를 친다. 당하는 사람은 몰라도 되지만 치려는 이는 잘 알아야 한다. 이런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모두에게 직접 보여주는 거다. 명명백백하게 말이다.

“좋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네, 회장님.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성대현 팀장을 내보낸 뒤, 나는 배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사무실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온 녀석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째려봤다.

“이봐요, 윤태식 회장님. 저 이제 같은 건물 아닌데. 혹시 잊고 계신 건 아니시죠? 호출하시면 제가 차 타고 달려와야 합니다만?”

“그걸 왜 잊어. 당연히 알지.”

“그런데 이렇게 막 불러도 되는 겁니까? 윤태식 회장님?”

“에이. 둘만 있는데 자꾸 회장님이라고 하지 마라. 어째 욕처럼 들린다.”

“기분 탓일 테죠, 윤태식 회장님.”

“미안하다, 배추야. 그런데 도움 받을 사람이라고는 너 말고 떠오르지를 않더라.”

언제나 ‘네가 맡긴 일 때문에 내가 바쁘다고!’라며 어필하던 친구는 그제야 내게 편히 말했다.

“뭔데 그래? 개인적인 일이야?”

“겸사겸사지. 우선 이거 좀 봐. 얘들이 재밌는 짓을 하고 있더라고.”

배추에게 조금 전 성대현 팀장과 나눴던 대화와 그에게 받은 자료를 보여주었다.

“확실히 의심할만 하네. 근데 이거랑 나를 부른 거랑 무슨 상관이야? 이 이상의 자료를 구해달라고?”

“아니. 내가 지금부터 이 게임들을 결제해서 랜덤 박스를 일일이 열어보려고 하거든.”

“굳이? 쟤들에게 돈까지 바쳐가면서? 뭐하러?”

게이머스 포럼의 자료들은 대외비가 아니다. 단지, 지나치게 방대하고 개인이 취합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즉, 관계자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랜덤 박스의 의문들’이라는 글을 올리면 그것으로도 같은 파급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나는 더욱 자극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고 본다.

“퍼포먼스지.”

“사기 행위를 밝혀내기 위해서 돈을 쓴다······. 랜덤 박스의 결과물 분석이나 아이템 통계자료 보다는 확실히 직관적이겠네. 그런데 그러려면 한두 푼으로 안 될 텐데?”

“물론. 그래서 2억 정도 긁어볼까 해.”

“···우와. 회장님이시네.”

기가 차다는 얼굴을 하는 배추였지만, 어쩌겠나. 제대로 확인을 하려면 이 정도 돈은 써야 할 거 아닌가. 될 놈과 안 될 놈의 행운을 찍어눌러 버리려면 압도적인 물량을 보여주는 게 좋다. 물론, 모든 확률형 도박은 이전의 시도가 다음에 영

향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절대로 이성적인 기계가 아니다.

‘그래서 이걸 찍는 거지.’

누군가는 300원에 당첨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앞 사람이 2억을 퍼부었는데 꽝이라는 사실을 보고서도 ‘나는 다를 거야.’라며 시도할 담대한 이는 극히 적다.

“우선 그쯤이고, 상황 봐서 더 쓸지도 생각 중이야. 보여줄 때 제대로 보여줘야 하니까.”

“네가 2억이 어느 정도 돈인지 모르나 본데, 태식아. 그 돈은 내가 1년을 빡세게 일해야 겨우 버는 돈이야. 그걸 허공에 붓겠다고?”

“너야말로 모르나 본데, 밖에서 그런 소리 했다간 배때기가 불러서 터져야 한다고 누가 칼 들고 찾아올 수도 있다. 너님이 자꾸 까먹는데 연봉 2억 직장인은 흔치 않아.”

“친구가 그룹 회장으로 있는 일은 더 희귀하겠지.”

말을 주고받고는 같이 웃어버렸다.

“알았어.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뭐야?”

“이거 결제해서 아이템 개봉하는 그걸 전부 영상으로 만들고 싶어.”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

“······.”

단언컨대 나는 지금까지 배추가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황당함, 헛웃음, 무표정, 싸늘함, 그리고 분노!

이러한 감정들이 시시각각 전해지는 데 그 대상이 배추여서 더욱 깜짝 놀랐다.

“태식아. 존경하는 우리 회장놈아. 그러니까 너는 지금 영상을 찍는 거. 달랑 그거. 고작 그거 때문에 나를 호출한 거야? 같은 건물도 아니고 저~기 있는 사람한테? 진심으로?”

“어.”

“야!”

그래. 나도 안다. 배추는 지금 매우 과중한 업무로 인해서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고 또 이런 고급 인력에게 시키기에는 너무나도 하찮은 일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어쩌겠나.

“너도 알잖냐. 내가 명색이 국내 최대 IT그룹의 회장이거든. 그런데 겨우 이런 것도 할 줄 모른다고 물어보면 어쩌겠어? 직원들이야 잘 알려줄 텐데, 소문이 쫙 날 걸? 그럼 진짜 쪽팔릴 거라고. 안 그래도 다들 나를 무슨 고수에다가 대단

한 전문가로 보는데. 그러니까 요거 좀 해줘.”

“그래도 그렇지 꼴랑 영상 편집이라니······.”

어이가 없는지 배추는 앓는 소리만 냈다. 그러다 어깨만 으쓱하는 나를 보고는 결국 혀를 차더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부터는 굵직굵직한 일에 불러 달라고. 일이 하찮으니까 기분이 안 나잖아.”

“오냐~ 파이팅.”

녀석은 이리저리 인터넷 사이트들을 빠르게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프로그램을 다운받고는 내게 사용 방법들을 알려주었다. 별로 배울 게 없을 정도의 사용 설명이다.

“엄청 쉽네? 그냥 켜고 내 할 거 하면 되는 거였어?”

“그래. 얼마나 쉽냐면 그냥 검색 몇 번으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지. 그런 거에 회장님께서 나를 부른 거고.”

“고맙다, 친구야.”

“그럼 나는 이제 진짜 업무 하러 간다.”

“잠깐만!”

“왜? 또 뭐?”

“이거. 다 하고 나면 편집도 해야 하는데 편집도 해주···”

“야! 그건 창피할 거 없잖아! 그냥 마이코닉스에 보내!”

“그런가?”

“그럼. 진짜 간다. 제발 별일 아닌 거로 부르지 말아줘. 별일이어도 안 불러주면 고맙고!”

녀석은 ‘이 자식은 천재인지 바보인지 모르겠어.’라며 확 나가버렸다.

영상을 찍기 위해 착착 일을 진행했다. 우선 일본 법인을 통해서 푸른 보석과 월광세계의 계정을 만들고 결제까지 끝마쳤다.

‘우선은 1억만 써보고.’

여기서 확신이 안 생기면 더 결제하는 방향으로 잡았다. 여기서 내 강화운과 관련된 능력은 발휘할 마음도, 그럴 의도조차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필요한 건 희박한 확률을 뚫고 얻어내는 광경이 아니라 대다수가 겪는 지독한 불운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타깃은 푸른 보석!

가장 말이 많은 상품인 골드 등급의 랜덤 박스만 구매해볼 예정이다.

“개당 가격이 비싼 덕분에 오래 걸리지는 않겠네.”

아이템 단가가 높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지금 뿐일 거 같다. 그렇게 구매한 골드 등급 상자는 150개였다. 현금으로는 75만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플레지의 경우 최상위의 아이템은 현금가로 그보다 훨씬 비쌌지만 이건 같은 선상에 두고 볼 수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유저간의 거래라서 비싼 아이템을 사더라도 후에 다시 유저에게 현금으로 되파는 일이 가능했다.

반면에 푸른 보석에서의 유료 결제는 거래가 불가능하다.

‘작정하기는 했지만, 상자 개봉은 참 돈을 물 쓰듯 쓰는 일이라니까.’

이제 매출 120억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직접 확인할 시간이다. 의혹들이 사실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한다.

치르르르···

아이들 요술 장난감처럼 부르르 떤 상자가 팡파르와 함께 연거푸 열렸다. 절대 다수가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잡다한 물건들이다. 그러던 중 살짝 다른 이펙트와 함께 ‘짜잔’하며 아이템아 나왔다.

『모험가의 꿈

모든 모험가들이 꿈꾸는 천 옷.

귀족들만이 입을 수 있는 붉은색과 금색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그들이 입는 모든 재료를 활용해서 만들어진 옷이다. 훌륭한 내구도와 다양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

방어력 : 13

Option

착용자의 민첩성 50 증가

착용자의 회피율 5% 증가

이동속도 5% 증가

착용자의 매력 10% 증가

고급 재료 아이템 드랍률 10% 증가』

드디어 1티어로 분류되는 아이템 하나가 나왔다.

‘이 게임을 안 하니까. 이게 뭐 어떤 아이템인지를 모르겠네. 그냥 제작 노가다용 아이템인가?’

숫자를 파악 중이었으니 체크도 꼭 해둔다. 이건 딱 130개를 열었을 때 획득한 아이템이었다.

“남은 20개는 전부 꽝.”

이러면 150개로 하나 건진 셈이다.

“다시 150개 구매.”

다시금 줄줄이 랜덤 상자를 개봉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윽고, 이번에는 140개쯤 개봉했을 때 『스피로 대거를 획득하였습니다!』라며 1티어의 장비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득템의 환호성 따위는 없었다. 카운트한 뒤 다시 75만원을 결제할 뿐이다.

- 치르르르···

- 짜잔!

『바이넬 웨일을 획득하였습니다!』

“다시 130개째.”

- 치르르르···

- 짜잔!

『새벽의 청옥을 획득하였습니다!』

“또다시 140개째.”

- 치르르르···

- 짜잔!

『블랙캣의 망토를 획득하였습니다!』

“150개째에 나와?”

130, 140, 150의 반복이다. 하지만 ‘설마 다음에도 130번째? 이렇게 유치하게?’라는 의심은 곧 사그라들었다. 119번째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에 실소하면서 나는 다른 지점을 짚었다.

‘이쯤 개봉했으면, 누적으로라도 한 번 쯤은 2개가 나올 법도 한데 무조건 1개만 나오고 있어.’

75만원을 거듭 결제했다.

그 결과, 150개 내에서 2번의 1티어 아이템이 나오는 경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에만 750만원을 썼으니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이를 보고 150개 골드 상자를 구매하면 1개는 득템한다고 여길지, 1개만 득템할 수 있다고 볼 지는 유저에게 맡겨둔다.

다음 스탭을 밟을 차례다. 이번에 구매하는 랜덤 박스는 대량이 아닌 소량이다.

10개, 20개, 30개, 40개 상품들로 차근차근 늘려간 것이다.

“10개는 모두 꽝.”

괜찮다. 개봉한 숫자가 적으니 누구나 ‘운이 없네’로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10개짜리를 반복해서 10번 구매하여 개봉했는데 아무것도 안 나온다면 어떨까?

다음 20개.

“이 역시도 안 나올 수 있지.”

몽땅 꽝이지만, 이 역시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저 결제를 10번 반복했고 개봉한 상자의 수는 200개인데도 그랬지만 말이다.

“환장하겠네. 어떤 정신병자가 구성한 거냐?”

30개, 40개, 50개 상자 구매.

모두 실패!

그리고 대망의 100개를 반복 결제할 순서다.

“미친. 이 패키지까지도 안 나온다고? 150개일 때는 따박따박 나오던 게?”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혹시나 하여 초심으로 돌아가 150개를 구매했다.

아니나 다를까.

- 치르르르···

- 짜잔!

『스킨 브레이커

매우 강력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톱날 검.

강력하면서도 난폭한 의지가 돋보이는 이 검은 어떤 단단한 갑옷과 피부를 가진 자라도 버텨낼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공격력 20~30

사정거리 75

Option

명중률 3% 증가

데미지 30% 증가

입힌 피해량의 9% 체력으로 전환』

골드 상자 개봉 140개째.

“각 나왔네. 너무나도 올곧아서 어떤 바보라도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야.”

1티어 장비는 무조건 75만원짜리이며 100개 이하의 상자로는 획득할 수 없다.

이 이상의 반복이 필요할까?

물론, 극히 희박한 확률을 뚫고 어느 누군가는 득템을 이뤘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못 경험했고 내가 찍은 영상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 질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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