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블리싱 >
만약, 아이템을 구매하기 위해서 열심히 파밍을 하다가 지쳤을 때 구매한 거라면 지금 정도의 후회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정령의 숨결은 그냥 아이템만 진열해둔 것이 아니었다. 상점을 보면서 고민을 하고 있는 유저가 있다면 그 유저에 맞는 아이템에 대한 이벤트 팝업이 뜨도록 설정이 된 것이 분명했다.
이 증거로 지금 이벤트 팝업에 나온 아이템은 5레벨이면 착용이 가능한 아이템이었다. 그뿐인가? 저 팝업창을 닫는 순간 본래의 가격으로 사야 한다는 멘트는 아이템 구매에 대한 생각이 없던 사람도 한순간에 구매 욕심이 생겨버리게 만
드는 마법과 같았다.
‘소비심리학이라도 전공한 거야? 미치겠네. GF 사업부에는 대체 뭐 하는 인간들이 모여 있는 거지?’
혀를 내두를 즈음, 사무실 한쪽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어? 어어!? 황혼의 검이다! 우와! 황혼의 검 나왔다!”
팀원 한 명이 남의 게임에 돈 주고 뽑는 뽑기에서 좋은 아이템을 뽑았다며 아주 신이 나 있었다.
“좋냐?”
“네! 좋습니··· 아닙니다!”
희희낙락하다가 눈치를 잽싸게 본다. 심진호 부장은 그 직원의 모니터를 보며 물었다.
“너, 그 황혼의 검을 먹으려고 지금까지 박스 몇 개 열었냐?”
“800개 정도 열었습니다.”
“맞아, 800개. 그런데 인마, 여기 봐라. 황혼의 검을 떡하니 세트로 파는 거 보여? 갑옷까지 해서 단돈 10만원! 우리 곱셈을 해보자. 랜덤 박스 800개는 얼마다?”
“26만 4,000원입니···다.”
무려 두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물론, 달랑 세트 아이템 하나가 전부는 아니고 그동안 기타 잡다한 아이템이 쌓이니 그 가치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따지더라도 10만 원 이상의 가치는 갖지 못했다.
“다른 놈들은?”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방금 전의 상황을 보았으니, 나머지는 입을 꾹 닫고 조용히 작업할 뿐이다. 심진호 부장은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너희 중에서 황혼의 검 이상의 아이템을 뽑은 사람? 또 없어? 높은 등급 아이템 뽑은 사람?”
그제야 여기저기서 손을 드는데 그들은 25명의 직원 전부였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들었다.
“뭐야? 최상위 장비를 전부 다 뽑았다고?”
“그러···네요?”
“신기하네.”
“거참.”
묘하다. 대부분이 30만원이 되기 전에 랜덤 박스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장비를 하나 이상은 나왔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1,000개를 뽑는 동안 상위 아이템을 못 얻으면 보상으로 상위아이템이 무조건 나오는 뽑기 상자를 줘?”
당첨운을 보장해주는 복권을 파는 장사꾼과도 같은 모양새다.
‘GF놈들은 이상한건가, 멍청한 건가?’
심진호 부장이 보기에는 정말 한심한 짓거리다. 게임에 이만큼 돈을 쓰는 게이머들은 돈을 쓰고도 못 뽑으면 포기하기보다는 돈을 아낌없이 더 써서 어떻게든 더 뽑으려는 성격을 가진 부류다. 그런데 아이템을 확정적으로 얻게끔 보정해
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만큼 게임사가 벌어들일 이득이 줄어드는 것이다.
자고로 부분 유료화의 핵심은 이런 게이머들을 쪽쪽 빨아먹는 것!
“대체 이걸 왜 준대?”
“그거야 저희도 모르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쟤들도 시행착오를 하는 거 아닐까요?”
“이런 건 GF가 여러모로 최초니까요.”
심진호 부장은 직감했다. 작금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GF의 전략 혹은 실수로 보이는 이 균열을 잘 노려야 한다.
‘뭘까?’
이런 상한선을 두는 게 의미가 있는지 다시금 되짚어 본다.
1,000개면 33만원.
어차피 세트로 사는 것보다는 이미 3배로 돈을 쓴 후다.
‘어차피 초과하는 거 3배나 10배나 그게 뭔 차이라고 이러는 거야? 아니지. 랜덤 박스에 아이템이 들었는데 세트 구성 아이템은 대체 뭐하러 파는 거지?’
그게 있으면 더 벌 수 있어도 안 버는 거 아닌가?
‘잠깐만. 어차피 도박 시스템이야.’
심진호는 본능적으로 지금 돌파구를 찾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만약 제일 좋은 아이템을 만들고 오직 이 장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게임 플레이로는 불가능하다면? 오직 이 아이템을 구하는 방법은 랜덤 박스를 구매하는 수 뿐 이라면?’
유레카!
‘돈을 쓸어 담을 수 있다. 떨어진 실적을 높일 수 있고!’
짝!
손뼉이 쳐졌다. 쾌재를 부르게 되는 상황 반전의 묘수를 찾고야 말았다.
푸른 보석의 누적 매출 300억이다. 하지만 랜덤 박스와 특별한 아이템의 구성 상품이라면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지난 3년간의 누적 매출 따위 저 멀리 보내버리고, 이제 1년에 300억 매출을 올리게 될 수도 있으리라!
“정대리!”
“네. 부장님.”
“푸른 보석 스튜디오에 연락해. 내일 오전까지 랜덤 박스 사업에 대해서 회의할 거니까 우리 회의실로 담당자들 보내라고.”
“알겠습니다.”
심진호 부장은 모니터에 뜬 유도 팝업창을 보며 조소했다.
『잠시만요! 창을 닫지 말아주세요!』
처음에는 강렬한 충격을 줬던 이 멘트가 지금은 가소롭기만 하다.
‘GF 놈들도 완벽하진 않네. 훨씬 돈을 많이 벌 방법이 있는데도 이렇게 말랑말랑한 수법이나 쓰는 걸 보면.’
다시 천국의 계단을 오를 기회를 찾은 심진호 부장.
그의 표정에는 이충현 이사로부터 받은 스트레스가 말끔하게 가셔 있었다.
*
발상은 어렵다. 그러나 모방은 쉽다. 오성전자가 크게 한 방 먹은 GF의 아이디어는 이와 같았다.
“완벽하게 새로운 것도 아니었군.”
심진호 부장은 정령의 숨결에서 대히트를 치고 있는 랜덤 박스가 사실은 창조적인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넓게 시야를 두니 이 요소는 RPG에서만 최초였을 뿐, 카드 게임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용해온 시스템이었다.
모방할 대상이 정령의 숨결 하나를 넘는 상황이다. 이러면 베끼는 시간도 단축된다.
“푸른 보석에서는 뭐래?”
“랜덤 박스를 위한 아이템은 이미 준비했다고 합니다. 수익성이 좋은 방향으로 구성하는 방법만 알려주면 바로 적용하겠다고 하네요.”
정경민 대리가 바로 대답했다. 랜덤 박스는 정말 간단한 원리라서 더 깊이 연구하고 말 것도 없을 정도다. 살짝 과장하면 초보 개발자라도 바로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심진호 부장은 ‘창을 닫지 말아주세요!’라고 치고 들어왔던 타이밍을 각인했다.
‘요체는 낚시야.’
랜덤 박스는 좋은 낚싯대이고 대어를 낚는 매력적인 미끼는 아이템이다. 여기서 GF는 소극적으로 나왔지만 그는 달랐다.
‘단숨에 치고 넘어가 주마. 따라하기만 해서는 뒤꽁무니만 쫓을 뿐이지.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겠어.’
GF의 미흡한 지점들을 보완하여 향상된 랜덤 박스를 구성한다. 이로써 물고기가 덥석 물도록 소비자의 심리를 노리고 말겠다.
“담당 PD에게 새로 추가될 아이템들의 자료를 받아와.”
“예. 팀장님.”
그것은 심진호 부장의 요구사항들이 듬뿍 담긴 아이템 명단이었다.
『☆ 드레이크의 유산 ☆
무려! 어린 용의 가죽으로 만들어 낸 갑옷.
드래곤의 가죽과 달리 안감이 부드러워 활동성이 훌륭하다.
방어력 : 28
Option
착용자의 민첩성 50 증가
착용자의 회피율 5% 증가
착용자의 방어력 20% 증가
불속성 피해의 20%를 체력으로 전환』
『☆ 스킨 브레이커 ☆
매우 강력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 톱날 검은 그 어떤 단단한 갑옷과 피부를 가진 자라도 버텨낼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공격력 20~30
사정거리 75
Option
명중률 3% 증가
데미지 30% 증가
입힌 피해량의 9% 체력으로 전환』
차원이 다르다. 감히 비교할 수 없다.
누구라도 탐낼 수밖에 없는 아이템!
‘이것이야말로 게이머를 낚는 최고의 미끼지.’
RPG에서 이것보다 완벽한 유혹이 또 어디 있으랴!
“그래! 아주 좋아! 짜식들이 소심하게 찔끔찔끔 올려주고 말이야. 이 정도는 화끈하게 높여줘야 랜덤 박스에서 뽑아낼 욕심이 나는 거 아니겠어?”
“저기··· 팀장님. 그래도 밸런스가 너무 무너지지 않을까요?”
“뭐? 밸런스?”
심진호 부장이 현실감각 없는 정경민 대리를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야. 네가 GF에서 만든 게임을 분석 좀 하니까 이제 GF사람이 된 거 같냐?”
“아닙니다.”
“근데 뭐? 밸런스? 밸런스으~? 배우라는 건 안 배우고 어디서 이상한 것만 배워와서는.”
그가 혀를 끌끌 찼다.
“너도 저 멍청이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할래?”
“멍청한 짓이라뇨? 멀티플레이 게임에서 밸런스보다 중요한 것이 또 있다고는 보기 어렵···”
“모질이 새끼 같으니. 이봐, 정대리. 지금이야. 그 2티어 무기를 구하는 것도 힘드니까. 사람들이 랜덤 박스를 구매하겠지만 머리라는 게 있으면 한 번 생각을 해보라고. 지금 나오는 저것들이 얼마나 갈 거 같아? 2티어 구하고 나면? 1티어
는 어떻게 될까?”
“그간······.”
“쟤들도 인마. 그때 되면 1티어 템 꺼내서 팔고 그럴 거야. 그렇게 팔면 유저들은 가만히 있을 거 같냐? 2티어를 비싼 돈 주고 샀는데 조금 지나고 나니까 이제서야 1티어를 파네? 그러니까 나중에 그러느니 우리처럼 처음부터 파는 게 나
아. 알겠냐?”
언뜻 들으면 그럴싸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GF에서 1티어의 아이템을 캐시 아이템으로 풀어낼 때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경민 대리의 입에서는 ‘만약 안 팔면요?’라는 물음이 나오지 못했다. 가뜩이나 멍청한 취급을 받는 데다가 지금 그리 말해봐야 상사의 의견에 대놓고 반박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무조건 상대가 옳은 상황이다.
“알겠습니다.”
“좋아.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군. 다음에는 확률표 가져와 봐.”
“네.”
이 표는 5,000만 원짜리다.
오성 전자의 게임 사업부 팀원들이 GF의 랜덤 박스를 손수 구매하여 몽땅 열었고 그 결과들을 일일이 엑셀에 기재함으로써 각각의 확률을 분석해서 완성한 자료였다.
물론, 확률이라는 건 독립시행으로 이뤄지기에 정확히 컴퓨터처럼 딱딱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 정도 돈을 쓰면 어느 정도 정해진 확률을 짐작할 정도의 자료는 얻을 수 있었다.
“인심이 아주 후한데? 이건 너무 퍼주잖아?”
정령의 숨결의 랜덤 박스에는 미끼 아이템으로 2티어 장비가 있다. 그리고 확률상 해당 아이템의 획득률은 0.125%로 나타났다.
이는 1%도 안 되는 더럽게 낮은 확률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랜덤 박스 자체의 개당 가격이 저렴했고 그만큼 사람들이 대량으로 열고 있으니 당첨자의 빈도는 높았다. 결과적으로 이 확률은 절대로 낮지 않은 셈이었다.
“밸런스는 얼어 죽을. 이거 봐라. 이 정도로 아이템을 막 쏟아내는데 이게 밸런스를 위한 게 맞냐? 이걸 무과금 유저가 무슨 수로 따라가겠어?”
GF의 이미지는 타 기업체들에게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저들만 뭐가 그리 잘났는지 착한 기업, 정직한 기업, 유저 친화적인 기업 등등의 타이틀을 차지했고 교묘하게 언론 플레이를 하며 게임 업계의 왕좌를 차지하는 중이다.
그러나 실상을 보라.
“사업하는 놈들 중에 착한 놈이 있기는 개뿔. 밸런스 파괴는 저놈들이 먼저 하고 있다고. 하여간 이놈들도 항상 말만 번지르르한데 속아 넘어가는 종자들을 보면 아주 한심하다, 한심해. 포장만 잘하면 착한기업이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라도 밸런스를 지키도록 하자. 우리는 GF랑 다르게 간다.”
“네. 확률을 어떻게 할까요?”
“더 낮춰.”
“예?”
“좋은 아이템을 막 풀어주니까 밸런스가 파괴되는 거야. 그러니 당연히 덜 나와야지.”
정경민 대리에게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으로 큰 충격을 선사한 그는 세부 지침을 더 내렸다.
“랜덤 박스의 가격은 더 높인다.”
GF가 랜덤 박스의 단가를 330원으로 정한 이유는 원하는 아이템이 나오지 않더라도, 여유로운 소모품들을 획득하게 하려는 배려였다. 하지만 심진호 부장의 눈에는 소극적이며 안이한 대처에 불과했다.
오히려 저들이 330원으로 스타트를 끊어버린 바람에 자신들도 시작 단가를 낮춰야 하는 부분이 비통할 뿐이다.
“단, 그냥 높이면 반발이 나올 테니 랜덤 박스에 등급을 매기는 거야. 3등급 정도면 좋겠군.”
금과 보석이 귀한 까닭은 수가 적기 때문이다. 명품이 시장통에 백만개씩 굴러다닌다면 그건 명품이 아니다. 이러한 논리를 고스란히 가져와서 적용한다.
“3등급의 랜덤 박스요?”
“자료는 모았다가 국 끓여 먹으려고 그래? 좋은 선례가 있으면 배울 생각을 해야 할 것 아냐. 카드 게임을 보면 커먼 등급 박스가 있고 언커먼 등급 박스, 레어 등급 박스가 있잖아.”
놀라운 그의 선구안에 정경민 대리가 비로소 따라붙었다. 단박에 이해하고 받아들인 그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름은 일례로 브론즈, 실버, 골드와 같은 식이면 되겠군요.”
“그래.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군. 그런 식이면 되고 브론즈에는 2티어까지만, 실버부터는 1티어가 나오도록 구성해. 대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지?”
“확률은 낮게 하겠습니다.”
“그냥 낮게 하는 게 아니야. 아주 낮아야 해.”
“네. 아주아주 낮추겠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가격대는 높이겠습니다.”
“좋아. 하지만 전부 높여서는 안 돼. 브론즈는 정령의 숨결보다 낮춰서 심리장벽을 누그러뜨린다. 대신 프리미엄은?”
“높입니다. 그러나 당첨 확률은 낮추겠습니다.”
“아주 훌륭해.”
역시 뛰어난 오성의 인재다웠다. 굳은 생각에 물꼬를 터주니 재치 있게 따라붙지 않는가!
< 퍼블리싱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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