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퍼블리싱 >
139. 퍼블리싱
배추가 GF 내부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들을 긁어모으는 동안 성대현 팀장은 일본 시장 자체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찾는 중이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중에 나는 놀라운 사실
을 알게 됐다.
오성의 강력한 카메라 마케팅에 힘입어 승승장구하는 푸른 보석!
이 게임은 2003년도에 국내 출시, 2005년도에는 일본에서 출시한 게임이다. 그런데 그래픽의 수준은 2000년대에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긍정적인 의미
로 대단한 게 아니라 형편없는 정도다.
“믿을 수가 없군요. 고작 이런 게임에 우리 게임이 밀리고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이벤트 상품이 좋다고 해도 게이머에게는 게임이 중요하다. 주관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정령의 숨결이 훨씬 나았다. 그런데 푸른 보석한테 패배하고 있는 상태
다.
이유가 뭘까?
바로 여기서 내가 깜짝 놀란 지점이 나왔다.
“한국이나 북미를 기준으로 하자면 게임의 그래픽이 한참이나 뒤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런 그래픽이 주류입니다.”
“주류라고요?”
게임 강국인 일본의 게이머들은 뒤떨어지는 그래픽의 게임에 애착이라도 갖는 걸까.
이 의문에 대해 성대현 팀장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최근에 새로 출시되는 게임도 그래픽의 수준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컴퓨터 보급 상황 때문입니다. 회장님, 이 보고서를 보시겠습니까?”
현재 일본의 PC 보급과 관련한 내용이 담긴 서류였다.
무려 전체 보급 PC의 50%가 98년도 이전에 나온 것들이라는 내용이다.
“일본이··· 이렇게까지 열악했나요?”
이웃 나라 경제 대국은 게임기와 컴퓨터를 아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 같다.
‘이놈들은 컴퓨터로는 정말 워딩만 쓰는 거야? 이게 말이 돼? 쿼드 코어가 나오고 있는 이 시대에 여전히 팬티엄3를 쓰고 있다니!’
정말 몰랐다. 지금 일본 PC의 절반은 나그네로크를 가동시키는 것조차도 무리가 아닐까 싶은 그런 수준이다. 이런 판국에서 정령의 숨결을 플레이 한다?
‘불가능해.’
그냥 포기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 게임은 시작부터 무려 50%나 되는 엄청난 시장을 포기하고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래서 월드 오브 워드래프트가 일본에는 진출을 안 하는 거였군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아무래도 일본은 PC의 성능이 많이 부족하니까요. 적어도 PC 보급 상황은 작금의 중국이 일본보다도 우월합니다.”
“그 중국이 저품질의 그래픽을 장착한 게임만 무진장 출시하는 실정인데 말이지요.”
“덕분에 저희 크라비티가 GF엔진을 써보지도 못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픽을 낮추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GF엔진은 기본적으로 몬스터 프레데터스를 개발하기 위해서 제작된 툴이 베이스다. 어떻게 개발을 해도 기본적인 3D 그래픽의
수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걸 팬티엄 2, 3에 들어간 3D 카드 수준으로 제대로 가동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알아야 할 게 너무 많아.’
충격 그 자체였다. 아울러 반성할 부분이기도 하다. 명색이 게임사의 회장이라는 놈이 이런 것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막연하게 게임 강국이라는 이미지로
싸잡아서 대충 이해했던 게 이런 식으로 문제 될 줄은 몰랐다.
‘확실히 크라비티 쪽에는 내가 소홀하긴 했구나.’
살짝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솔직함 심정으로 정령의 숨결은 개발 과정을 지켜보면서 영 마뜩잖았던 게임이다. GF 엔진을 써서는 일본에 어필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부터 GF의 다른 게임들과 달리 아기
자기한 2D 그래픽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사실 그 내부 콘텐츠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아예 개발 자체를 엎어버렸을 수도 있는 게임이었다.
‘그래서 자꾸 관심을 끊고 그랬지.’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나도 모르게 그냥 ‘크라비티의 능력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했고 일본에서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다행히 일본의 취향과는 맞았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랬는데 이 정도까지 성공했으니 그냥 얻어걸린 이득으로 여겼다.
지금도 사실 정령의 숨결을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고군분투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회에 오성전자와 한 번 붙어보자는 것도 있고 빅 데이터를 위한 노하우를 기르기 위함도
있었다.
‘이러니 여러모로 난항이지. 내가 엉성하게 마음을 써서 그래.’
정령의 숨결의 점유율 문제 때문이었다는 그냥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 진심이었다. 그리고 이제 반성했으니 제대로 지휘할 요량이다.
“좋습니다. 문제점을 알았으니 해법도 달리해야겠군요. 이렇게 되면 그냥 단순히 부분 유료화로만 바꾸는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게임의 스타일까지도 새로 개편해 봅
시다.”
“네? 스타일을 싹 다요?”
내 말에 성대현 팀장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보통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라면 엄청난 양의 일거리가 떨어지니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성대현 팀장이 놀란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정확히 일본 취향에 맞춰서 그와 어울리는 것들을 잘 섞어보는 겁니다. 정령의 숨결이 푸른 보석에 비해 갖는 어마무시한 장점이 있잖습니까.”
“혹시, 그래픽을 말씀하시는 건지······.”
“맞습니다. 비교적 실사화에 가깝게 만들어진 푸른 보석과 달리 정령의 숨결은 나그네로크의 영향을 받아서 애니메이션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 게임입니다.”
그뿐이랴, 스토리 역시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온라인 게임이지만 내부의 스토리는 패키지게임 못잖았다.
“그럼 이 그래픽을 어떤 방식으로 살리라는 말이십니까?”
“애니메이션을 하나 제작합시다.”
“예?”
“길게 할 필요는 없고, 그냥 적당히 5편 정도면 좋겠군요. 이쯤으로 기획해서 하나 만드는 겁니다. 예산으로는 10억이면 충분하겠네요.”
TV 송출용 애니메이션을 1편 제작하는데에 1억에서 2억 정도의 제작비가 필요하다.
5편이면 최소 5억에서 최대 10억으로 잡으면 된다.
“회장님. 그 돈이면 오성전자에서 뿌리는 카메라를 500대··· 아니지. 1,500대가 넘게 뿌릴 수 있는 금액입니다. 심지어 오성전자에서는 자체 제작한 카메라니까 그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가능할 거고요. 그런데 본사 차원의 이벤트는 불허하셨으면서 10억으로 애니메이션이요?”
그가 황당해했다.
카메라 500대로도 엄청난 효과를 얻었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몇 배나 돈을 투자해서 고작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내 생각은 너무나도 터무니없어 보일 것이다.
“오성이 왜 카메라를 뿌렸을까요?”
“그거야 일본은 카메라를 좋아하니까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일본은 카메라를 좋아하니까 이벤트를 통해 오성은 카메라 브랜드를 제대로 알리려고 뿌린 겁니다. 당장이야 공짜로 뿌리는 셈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는 잠재
고객을 더 많이 만드는 홍보의 역할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지점에서는 무슨 이득을 얻는 건지를요.”
“우리에게는 넷플렉스가 있습니다. 하나의 이벤트로 두 개의 사업을 마케팅하는 상생 전략인 셈이죠.”
성대현 팀장이 이해하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
“저희 게임에서 넷플렉스를 직접 홍보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럼요?”
“해당 애니메이션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해서 CD로 보내줘야죠.”
“그렇다면 넷플렉스 홍보가 안 되지 않겠습니까?”
“왜죠?”
“그거야, 볼 사람들은 CD로 볼 테니까요?”
틀렸다.
“모든 사람이 이벤트 상품을 구매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결국, 아쉽게도 이벤트를 진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후에 넷플렉스로 모이게 되는 거죠.”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애니메이션이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다가스칼을 시작으로 연타석 홈런을 때린 내가 아니던가.
“이런 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 성대현 팀장님은 지금 하시는 것에 집중해주시면 됩니다.”
특별팀에게 방향을 제시한 뒤 나는 새로 만들어낸 일거리를 전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처음 폭탄을 터트린 곳이 크라비티였다면 다음은 마이코닉스였고 이후에는 GF
홀딩스까니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내 움직임에 오성이 반응했다.
“푸른 보석에 대한 기사가 국내 인터넷 신문에 연신 비판적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달려와서 상황 보고를 한 사람은 국내 게임 유통의 책임자인 김지애 사장이다.
【푸른 보석, 일본을 점령하다!】
【오성전자 게임 퍼블리싱 매출 300억 돌파!】
“오성에서 제대로 작업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내용들입니다.”
제목만 보면 단순히 자신들의 게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좋은 마케팅을 해냈다는 식으로 비친다. 그러나 실상은 일본을 중심으로 오성 전자의 게임이 GF를 누르고 있다
는 점을 콕 짚어서 비교하는 식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익숙하네요. 언제는 언론이 우리 편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다른 기업도 아니고 국내 최대 기업인 오성전자가 기수 역할을 하니 그동안 우리 GF의 독주에 불만을 가졌던 업계 관
계자들 역시도 모두 오성 전자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예전부터 그랬지만 우리는 워낙 해외 마케팅에 중심을 두고 있고 게임 커뮤니티까지도 자체 운영을 하고 있다. 몇 개 언론사를 제외하고는 광고를 내보내지 않았고 그 탓에
대부분의 언론사 중 GF에 호의적인 기업이 적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누차 언급했지만, 국내에 연연할 필요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중소 개발사들입니다.”
“중소 개발사들? 그들이 왜요?”
“대부분의 중소 개발사들이 오성 전자에 신규게임의 퍼블리싱을 맡기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워낙 자체 게임이 인기 많아서 그렇지 GF는 엄연히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유통사다. 당연히 자사 게임보다 투자 후 배급하는 게임이 더 많다. 그런 유통사에 신작이 추가되
지 않는다면 당연히 장기적으로 썩 좋지 않게 된다.
‘그런데 말이지. 나는 알거든. 이 시기에 새로 등장하는 게임 중에는 좋은 게 없어. 개천에서 용 난다? 신데렐라 형의 성공신화? 그런 걸 중소 게임사에서 떡하니 내놓는 게 자
주 일어나겠냐?’
냉정하게 볼 때, 중소 게임사에서 개발하는 대부분의 게임은 관심을 가질만한 상품성을 가진 게 없다고 판단한다. 그런 와중에 중소 개발사의 이탈이 일어나봤자 내가 ‘어이
쿠!’ 하며 당황할 리 만무하다.
‘그래도 나름 급한 소식이라고 전해준 건데 뚱하게 대꾸하면 민망하겠지?’
김지애 사장의 면을 봐서 되물어주었다.
“이탈한 개발사가 얼마나 됩니까?”
“열일곱입니다.”
총 23개의 개발사 중에 17개 개발사가 이탈했다. 이것이 GF의 매출에 큰 타격을 줄 리는 없으나 숫자와 그래프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큰일이 난 것마냥 호들갑을 떨기 참 좋
은 일이 될 것이다.
“다행히 국내 개발사들 한정이라서 주가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부터 주가 문제는 걱정도 안 했다.
외려 저들의 어리석음에 혀를 찰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 덕분에 안 망하고 벌어먹던 게임사들이 한 순간에 뒤돌아서 오성전자로 넘어갔으나 이는 정말 큰 실수다. 삼가 애도
를 표한다.
“기업이 많이 빠졌으니 투자 예산에는 여유가 더 생기겠군요?”
“네.”
대답하는 김지애 사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별 일 아닌데 뭘 그리 죽어가는 목소리를 내고 그러세요? 어차피 그 회사들의 매출을 모두 합쳐봐야 우리 회사 매출의 2%도 안 됩니다. 국내로만 따져도 20%조차 안 되고
요. 그 정도는 지금 남아있는 개발사 그리고 새로 개발사를 발굴해서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어차피 기업은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 그러니 그들에게 우릴 배신했다며 단죄를 내리거나 뒷공작을 한다거나 뭐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냥 우리와 함께 하는 기업들이 성공하는 모습만 보여줘도 배 아파서 죽을 수 있는데.’
“참신하고 능력 있는 인디 게임들을 알아봐 주시고. 또 그런 개발자들을 정리해서 보고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개발사들은 중형 이상의 규모를 가진 개발사와 소형 개발사를 나누고 이를 기술 수준에 따라서 또 나눠주세요.”
앞으로는 이들 수준에서 PC게임을 개발해봤자 답이 없는 시대가 찾아왔다. 어차피 큰 수익을 내는 PC게임들은 죄다 우리 게임이기도 하다.
‘이들에게는 이제부터 스마트폰 게임을 개발하게 하자.’
올해 출시할 레이폰은 1세대 스마트폰답게 허접한 스펙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아직까지는 우리 GF에서 직접 게임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
‘대충 퍼즐 게임이랑 카드 게임 같은 것들에 투자를 해주면 알아서 구색은 맞추겠지.’
거물급 상대인 오성전자가 이빨을 번뜩이고 있으나 결과는 자명하다. 어차피 이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이길 것이다.
< 퍼블리싱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