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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두 사람의 반응이 나뉘었다.
“굉장합니다! 그런 발상의 전환이라니!”
장난감으로 바꾼다는 설정에 김강철 실장은 얼굴이 확 펴졌다. 반대로 이종만 과장은 까맣게 죽어버렸다.
“저는 세계관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는 거군요.”
이거다.
이미 이종만 과장은 게임에 맞춘 세계관과 스토리, 설정에 관한 것들을 짜임새 있게 전부 준비해둔 상태다. 그런데 이것들이 장난감으로 변경된다면?
‘실존하는 인간의 스토리를 장난감에게 넣을 수 없지.’
번거롭고 수고롭다. 하지만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이종만 과장님.”
나는 체념하며 울상을 짓는 그에게 말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런 건 그냥 바벨에 보내서 스토리 짜라고 하세요.”
“네?”
“바벨이랑 이야기하는 건 어려우실 테니까 그냥 마이코닉스에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마이코닉스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 일해 온 상대다. 거기다가 지금은 마이코닉스의 최종인 사장이 바벨의 회장직을 겸하고 있지 않던가.
“걔들이 알아서 잘 만들어주겠죠. 게임에 어울리는 디테일이야은 물론이고요. 그러니 저들이 만들어 준 세계를 가지고 제작하면 기존보다 탄탄하고 쉽게 만들어질 겁니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방법을 바꿨다. 과연 성과는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
“지금 기획한 대로 게임을 개발하면 어느 정도의 PC까지 우리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완전 고물 컴퓨터로 즐기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요?”
“대충 2004년 이후의 보급형 컴퓨터 정도면 충분히 권장 사양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07년의 하이엔드 컴퓨터로만 가능했던 게임이 2004년의 보급형 사양으로 떨어졌다. 고작 3년이지만 이 3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무지막지한 속도로 컴퓨터가 발전하는 시기니까.’
정확히는 2007년의 하이엔드과 2004년의 보급형이니까 최소 4년의 시간으로 봐야한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는 장점만큼 단점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사양의 저하는 게임
의 완성도와 직결하고 이는 그만큼 무시 못 할 정도로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를 대비해야 한다.
“이종만 과장님. 옛날 수준의 그래픽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콘셉트를 잘 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길가에 버려진 고물을 주워서 그것을 의도했던 엔틱인 것 마냥 고상하게 바꿔달라는 주문이었다. 어쩌면 지금 내색은 못하고 있지만, 이종만 과장이 속으로 내 욕
을 엄청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강철 실장님도 아트 파트에 우리가 의도적으로 그래픽을 다운하고··· 뭐 그거 있잖아요. 예전에 예능 프로에서 복고 댄스가 한창 떠올랐듯이 우리도 복고 열풍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어야 합니다. 그런 거 아시죠?”
말하는 나부터도 당최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른바 ‘느낌적인 느낌’이고 ‘내 마음 알지?’라는 식으로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원래 아트 파트는 이런 개소리를
듣고 멋지게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결과물을 보고 다시 이야기하면 되겠지.’
우리 회사의 전문가들을 이제부터는 믿어보자.
*
바벨 이터널 스트라이프를 처음부터 새로 갈아엎기로 결정한 덕분에 당장 급하게 만들어졌던 팀이 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졌다.
언제까지냐면, 바벨에서 기본 틀을 만들어서 보내줄 때까지의 휴가인 셈이다. 적어도 기본 틀이 와줘야 일을 시작하든가 말든가 할 수 있다.
단, 아트 파트는 제외다. 그런 거 상관없이 그냥 장난감 캐릭터로 다시 그림을 그리라고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개발과 기획은 그럴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생긴 휴
가 아닌 휴가인데, 이를 가만히 두자니 내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고용인이 아니라 고용주라서 그럴까?”
마냥 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거라도 시키고 싶어진다. 며칠이 아니라 길게 잡으면 무려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을 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시키자니 마땅한 일거
리가 없었다.
‘새로운 구성이 완성될 때까지 원래 팀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지.’
일이라는 게 그렇다. 업무가 진행 되고 있는 팀에 사람을 보내서 일을 새로이 일을 분담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사람을 빼내고 다시 분담시키기는 쉽지 않다. 심지어
인력에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도 사람을 빼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저들을 본래 팀으로 보냈다가 나중에 다시 불러내려면 꽤 많은 진통이 생겨날 것이다.
“한 달이나 놀고먹는 모습은 내가 배 아파서 보기 싫다.”
나도 잘 안다. 직원 몇이 한 달을 논다고 해서 회사가 망하거나 휘청휘청하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그러나 이곳은 기업이다. 직원들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면서 월급을 주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없는 곳이다.
‘어떻게 할까?’
화두를 끌어안은 채 집에 왔을 때였다.
태희가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회장님~ 고민이 많으신 얼굴이시네?”
소파 옆자리에 앉은 은근한 말투에 흠칫 놀랐다.
“집에서 회장님은 무슨. 게다가 웬 마담 같은 목소리를 내고 그래?”
“됐고. 이 누님에게 말해봐. 고민이 뭐야?”
‘어쭈? 한참이나 어린 꼬맹이가 누님은 무슨.’
영화에서 뭘 보고 오기는 한 것 같다. 엉덩이라도 톡톡 두드려줄 어설프게 농익한 연기에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별 거 아니야.”
“에이~ 오빠가 별 거 아닌 거로 집에서도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보면 태희의 말대로 내가 별일 아닌 거로 집에서 내색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걸 막상 큰 문제랍시고 말하려고 하니 괜스레 멋쩍어 졌다.
‘다시 생각해봐도, 이건 진짜 별 거 아니잖아.’
어쩌면 진짜 내 고민을 나 스스로도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내 표정만으로도 고민거리를 읽어낸 동생이 아니겠는가. 숨길 필요가 없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나
는 태희에게 회사 사정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생의 표정이 바뀌었다. 어울리지 않게 음흉하게 샐쭉한 시선을 보냈었는데 지금은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고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바뀌었다.
“아. 뭐야. 완전 실망. 실망! 대실망!”
“응? 뭐? 실망?”
“실망. 실망. 대실망이라고!”
“도대체 왜? 뭔데?”
“난 또. 오빠라 오랜만에 이런 심각한 표정을 짓고 그러니까 당연히 여자 문제인 줄 알았는데 직원들 노는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였다니. 우와 진짜 실망했어. 무슨 사람이 이
렇게 재미없게 살아?”
“욘석이. 그럼 넌? 뭐 재밌게 살고 있냐?”
“맨날 일하고 아닐 때는 방콕해서 게임만 하는 오빠보다는 훨씬 화려할걸?”
“우리 태희가 게임의 참 재미를 모르는구나. 오빠랑 켠 김에 엔딩까지 날밤 새우고 해보지 않으련?”
“됐거든요~”
말은 최고의 셀러브리티처럼 하지만 실상 윤태희도 딱히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냥 회사와 집, 여가는 게임으로 만족하는 나와 마찬가지로 태희도 학교와 집을 반복하는
게 일상이니까. 쉴 때는 책을 본다는 게 나 같은 겜돌이에게는 기겁할 노릇이고 말이다.
‘정말 모범생의 전형이지. 게다가 얘는 무슨 대학생이 방학도 없어.’
대학생은 원래 방학이 길고 그래서 놀 시간도 많다고 알고 있었는데, 수의학과가 그런 건지 아니면 태희의 대학이 그런 건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콘서트나 여타 문화생활
은커녕 잘 놀 줄 모르기로는 남매가 똑같았다. 서로 나무라봐야 자기 욕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재미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왕 얘기 나온 거니까 내가 상담해줄게. 오빠가 고민하는 게 정확히 뭐야? 직원들을 그냥 놀게 두는 게 싫은 거?”
“아마도?”
“그거 한 달을 그렇게 두나 아니나 오빠가 고민할 고민거리는 아니잖아.”
“그렇지?”
“그럼. 고민의 방향을 그 앞으로 더 가보자고. 나도 학교에서 애들 데리고 프로젝트를 많이 해봐서 아는데. 지금 오빠처럼 일해서는 답이 없어요.”
‘얼씨구? 대학 생활 좀 했다가 이제 다 큰 것처럼 이러네? 나도 이제는 어른입니다, 뭐 그런거냐?’
내심 웃었다.
세상 어디를 봐도 부사관 퇴직금으로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회사로 키운 사람에게 조언해주는 대학생은 없을 것이다. 이게 다 가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들어는 줘야지.’
고작 대학생이 하는 말이다. 그런 말에서 뭐 들을 것이 있겠냐? 그냥 오빠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떠드는 거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들어주기로 했다.
“잘 들어봐. 처음에 우리가 인천에 살 때는 이런 오빠 방식이 최적이었을 거야. 오빠같이 능력 좋은 대표가 딱딱 일거리 주고. 직원들은 그대로 해오니까 얼마나 좋아. 근데 지
금은 회사가 엄청 크다며? 얘기 들으니까. 막. 저기 L사 뭐 그런 곳이랑 경쟁하는 규모라던데?”
여전히 태희는 게임에 큰 관심이 없다. 여자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성향과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국내 9위다. 그래도 오빠 회산데 관심 좀 갖지?”
“우와~ 대단하네~ 내가 잘난 오빠 두고 있어서 공부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 그런 자랑 못 할 걸?”
“그건 인정.”
미안한 부분이다. 예나 지금이나 기자들의 집요함은 알아줘야 한다. 아직 알려진 것이 적은 나라는 사람을 파헤치기 위해서 기자들이 가족부터 여기저기 많이도 따라다닌 모
양이다. 한심한 것은 미디어 환경이 바뀌며 저렴한 기자들은 더욱 양산된다는 씁쓸한 미래였다.
“알았어. 이야기 삼천포로 새지 말고. 그 프로젝트가 뭐 어쨌는데?”
“소규모 프로젝트일 때에는 그냥 나 혼자 아이디어 내고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각자 위치에 맡게 주면 끝이었거든. 근데 이게 프로젝트가 커지니까 그게 아니더란 말이야~”
“오호라!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이게 나 혼자 하는 건 한계라는 게 있어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뭐 해? 같이 하는 애들이 따라와 줄 수 있어야 말이지.”
맞는 이야기다. 사실 게임이라는 분야가 하나를 가지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내놓는 거니까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미래에 성공하는 게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
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같은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작 대학생이 하는 프로젝트도 이래요. 더군다나 오빠는 대기업이라며? 근데 오빠가 일일이 오더를 내리고 그걸 직원들이 수행한다는 게 말이 돼? 대기업의 회장이?”
확실히 GF는 외부의 인사가 보면 영 이상한 회사가 분명하다.
회장이라는 인간이 하는 일이 사업성에 대한 분석을 듣고 그것에 대한 방향을 결정하는 그런 것보다 일단 오더부터 내리고, 별 사소한 것에 직접 나서는 주제에 또 회장다운
업무처리는 부사장들이 다 하고 있는 괴상한 형태니까.
하지만 여기에는 다 사정이 있다.
“나라고 그런걸 생각 안 해봤을까? 우리 회사의 복지 중 하나가 ‘능력 있는 인물이 괜찮은 게임 기획을 만들면 스튜디오도 차려주겠다. 그러니 아이디어만 잘 가져와라.’이거
일 정도인데? 그런데도 아직 이 복지가 쓰인 적이 없어.”
“왜?”
“아무도 내 눈에 차는 아이디어를 안 가져오더라.”
GF라는 이름도 사용하기 전 게이머스 포럼이라는 명칭으로 계속 가고 있던 때에 만들었던 복지.
그런데도 활용하는 직원이 한 명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 회사에는 뛰어난 기술자는 있어도 충격적인 창의력은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건 GF만의 문제가 아
니다. 한국의 공통분모였다.
“알잖아. 이 나라의 고질적인 문제. 아직 우리나라에는 창의력 있는 인재가 없어. 그러니까 그런 아이디어가 안 나오고 있겠지.”
“오빠. 창의력은 만들어주지 못해도 모방을 통한 응용력은 만들어 줄 수 있더라.”
‘아이고, 사랑하는 내 동생아. 그런걸 한 단어로는 표절이라고 한단다.’
그리고 내가 지금 숱하게 하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다만 아직은 개발되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은 미래의 작품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완전범죄를 실행 중일 뿐이다.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이런 주제에 직원들한테 ‘창의력이 없어!’ ‘아이디어를 가져오라고!’라는 말을 하는 제법 찔리는 일이기는 했다.
‘괜찮아. 이런 양심에는 무뎌지기로 한 지 오래니까.’
뻔뻔함으로 다시 무장해보자.
그런 내게 태희가 말을 이었다.
“애들한테 처음 오더를 내리면 다들 딱 시키는 것만 하거든? 근데 오더 말고 꾸준히 경험을 쌓게 하다 보면 가끔 기존의 자료를 토대로 멋진 재해석을 하는 애들이 생겨. 그
··· 뭐더라?”
“혁신?”
“아! 혁신. 맞아. 혁신을 일으키려면 온전한 창의력이 필요하지만, 세상에는 혁신만 필요한 게 아니잖아?”
‘어쭈? 대학에서 한 것도 나름 사회 경험이라더니.’
태희의 말이 맞다. 와이폰이 세상에 혁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21세기의 편리한 삶은 와이폰 하나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직원들
이 스스로 와이폰을 만들어 낸 스티븐과 같은 창의력을 발휘하길 기다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불가능한 것에 욕심을 내고 기다린 거였나?’
모두가 스티븐일 필요가 없다.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필요할 때는 내가 나서면 된다. 지금은 와이폰을 만들어 낼 직원들이 아니라 갤럭시를 만들어 낼 직원들을 키
워낼 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시간 많다고 했잖아. 그럼 최대한 모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쏟아 부어. 다들 모방할 자료에 아주 파묻히게.”
“오호.”
소리장도다. 웃으며 깊숙이 지르는 말이었다.
일거리 폭탄을 안겨주는 격이니 GF의 직원들이 들으면 곡소리를 낼 지시니까. 그렇게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부분이 명확해지니 머릿속도 덩달아 맑아졌다.
“그래. 고맙다. 큰 도움이 됐어.”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정말 기특한 조언을 들었다.
< 최적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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