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47화 (347/577)

< 넓은 세계를 보라 >

심사숙고 끝에 되물었다.

[특별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그림을 공개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유? 윤 회장님. 나는 고작 게임 하나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해 달라는 딜을 받아들인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보는 것조차도 곤란하다고 하는 겁니까?]

친절한 미소는 여전했다. 하지만 탁 내려놓는 포크의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분위기는 냉랭하게 바뀌었다.

[진심으로 그리 여긴다면 지금까지의 이야기 자체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군요.]

[이해합니다만, 아무쪼록 제 사정도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잇속을 차리기 위한 얄팍한 수법을 부릴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런데 왜 이토록 경계하는 거죠?]

[이 그림은 공유해서 볼만한 그림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보물섬이 그려진 지도와도 같지요. 그러니 쉽게 공유를 못 하겠다는 겁니다]

이 대답은 ‘보여주기 어려우니 참아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장고 끝에 내린 결정대로 내어 줄 것을 내어주고 받을 것을 최대한 취하기로 했기에 한 대답일 뿐이다. 예상대로 빌은 더욱 관심을 보였다.

[보물섬이라. 그런 말을 듣게 되면 더욱 그림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이런 말씀을 하신 건 그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맞아. 어차피 오래 숨기지도 못할 그림이고 내가 설계한 판은 이미 위태해.’

홀로 완성하지 못할 거라면 함께 완성해줄 파트너를 붙잡겠다.

[보물섬에 있는 보물의 양이 상당합니다. 그러니 지도를 가진 저희의 우선권을 인정해주신다면 탐사에 끼워드릴 용의 정도는 있습니다.]

[그건 지도를 보고 결정···할 수는 어렵겠군요.]

상대는 보물섬을 향한 지도만 보고 독자노선을 가버릴 수 있으므로 지도를 보여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사업은 상세한 방향을 듣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아이디어에 불과하다.

그러니 말해주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너무 꽁꽁 감추기만 해서도 협상을 제대로 이끌어나가기 어렵지.’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더군다나 앞에 있는 빌 게이트는 세계적인 부자이자 거물로서 끌려다니기보다는 이끄는 데 익숙한 인물이었다. 압박감을 줘서 불쾌함을 느끼게 만들면 손해가 크기에 나는 단서를 알려주기로 했다.

[사실 지도는 이미 시중에 풀려 있습니다. 그 지도를 보고 보물섬을 찾은 사람이 아직까지는 와플과 GF 둘뿐일 따름이지요.]

[뭐요? 와플?]

의도했던 대로 그는 와플이라는 말에 크게 반응했다. 마이크루는 와플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지만, 태생적으로 와플에 열등감을 피할 수 없는 기업이기도 했다.

‘인간은 감정적이지.’

내심 만족하는 채로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계획은 저희가 먼저 했지만, 아마도 그들이 앞서서 완성할 겁니다. 그리고 이미 충분할 정도의 단계에 이르렀겠죠.]

[대체 그들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겁니까?]

[스마트 폰입니다.]

빌 게이트는 코끝을 찡그렸다. 꽁꽁 감추고 있던 답변이 고작 그것이냐는 반문이 곧 날아왔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스마트폰이요? 그건 이미 한참 옛날부터 만들어지고 있는 기기 아닙니까?]

[중의적인 말을 드리지요. 맞습니다만 분명히 다릅니다. 그건 지금 있는 스마트폰은 전혀 스마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와플은 이런 스마트폰을 몇 단계나 뛰어넘은 스마트폰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미 스마트폰 시장은 두 개의 기업이 완전히 붙잡고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기기가 등장한다고 해도··· 가만. 설마··· 윤 회장님은 이 시장이 변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잠시 생각한 빌 게이트가 내게 물었다.

[보물섬의 보물이 많다고 하셨었지요. 그 양을 얼마나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감히 장담하건대 섬에서 가장 많은 보물을 가져올 수 있는 자가 향후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겁니다.]

‘너무 대놓고 말했나?’

살짝 우려도 했으나 효과는 충분했다. 빌 게이트는 내 말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애초에 내 입에서 와플이라는 이름이 나온 그 순간부터 그는 이미 이 싸움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신중했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전부 이야기하기엔 그 이야기가 너무 큰 것 같군요. 이건 저희도 검토를 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뜻하지 않은 자리에서 정보를 들었다고 하여 쉽게 결정하는 이들을 우리는 호구, 귀가 얇다, 남의 말에 휘둘린다 라는 등으로 폄하하기 마련이니까.

[시간과 장소를 잡으시면 저희 쪽 사람들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번 행사에 대해서 승인을 해주실 경우입니다.]

그렇게 식사를 가장한 회담을 마쳤다.

이후 2006년 5월 26일.

마이크루 소프트와 GF그룹은 비밀리에 제휴 협약을 맺었다.

*

본격적으로 라이언 맨의 촬영 준비가 시작될 즈음, 이상하리만큼 유쾌한 남자가 자주 찾아왔다.

[회장! 나 왔어!]

[또 왔어?]

알버트다. 근래 뉴욕보다 LA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기 때문인지 나를 친근하게 여겨서인지 그는 심심하면 제집 드나들 듯 회장실에 방문했다.

[또 왔냐니? 내가 LA에 놀러오는 거처럼 말하네?]

[누가 봐도 놀러오는 거처럼 보일걸?]

오해하면 곤란하다. 라이언 맨의 촬영을 시작한 게 아니라 촬영에 대한 준비가 시작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대본과 연기를 맡은 알버트가 일일이 따라올 일이 과연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배우들의 마이페이스는 내 생각 이상이다. 내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자기들만의 색깔로 주변을 물들였다.

[거참. 이번에는 진짜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아~ 그러시구나~]

[정말이야. 라이언 맨 슈트 제작에 들어갔다고. 당연히 내가 있어야 나에게 딱 맞는 슈트가 제대로 제작이 되지 않겠어?]

[어? 그러네?]

예상외로 이번에는 정말 알버트가 와야 하는 게 맞았던 모양이다.

[알았어. 일하러 온 거 인정. 그런데 여기는 왜 왔어?]

[그거 나온다며?]

오늘은 2006년 9월 8일. 사이버 쇼크의 발매일이다.

의외로 그는 게임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왜 우리 직원들보다 네가 더 기대하는 얼굴이냐?]

놀려줘야지, 여기고는 물었을 때 알버트가 슬쩍 뒤를 가리켰다.

[사실은 이 녀석이 너무 관심을 보여서 말이야.]

그제야 존재감 뚜렷한 그의 뒤에 가려져 있었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장발이 되다만 어설픈 길이의 단발머리를 한 고등학생쯤 되는 남자였다.

[인사해. 내 아들 안디오 다우니야.]

아빠와 같은 헤어스타일이라서 그런지 더욱 닮아 보인다.

“안뇨하세이요.”

아무래도 알버트가 만나면 하라고 가르친 모양이다. 정작 본인도 한국어를 모르니 발음이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를 거고.

덕분에 미소가 지어질 만한 순박한 어투의 한국말을 오래간만에 들었다.

[어때? 오는 동안에 한국에서는 이렇게 인사한다는 걸 책만 보더니 바로 이렇게 인사하는 거야. 내 아들이지만 진짜 천재라고. 한국어 진짜 잘하지? 완전 똑똑하지?]

‘딸 바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들 바보도 있구나.’

칠푼이 같다.

[아빠라는 건 민망함을 잊어야 될 수 있는 거냐? 뭔 자랑을 그렇게 대놓고 해?]

[왜? 민망할 게 뭐 있어? 내 아들 잘난 건 사실인데. 아참. 그것보다 여기 내 아들에게 말 좀 해줘. 아빠가 오늘 게임 나오는 그 회사에 취업했다고 했는데도 얘가 절대 안 믿어. 무려 그 라이언 맨인데!]

‘아빠가 오죽 아들에게 신뢰를 못 줬으면, 아들이 아빠 말을 안 믿어 줄까?’

어린 시절 내 기억을 떠올려보면, 나는 늘 아버지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 거짓말에 몇 번이고 속아도 아버지는 늘 믿음직한 존재였고 그래서 사소한 거짓말에는 늘 속곤 했다. 물론, 지금 알버트의 규모와는 사뭇 다르기는 하다.

‘그래봤자 RC카를 사주신다고 했던 거랑 컴퓨터를 사주신다고 했던··· 뭐, 그런 류의 거짓말이지만.’

어쨌건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신뢰를 가지는 법인데 알버트가 이번에 실패한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우리 게임사에 취업했다니. 거짓말 맞잖아.’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어디까지나 바벨 엔터프라이즈 소속이다. GF가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밉상처럼 굴긴 해도 절대 진짜로 미운 건 아니고 게다가 회장이라는 타이틀이 생긴 이후로 이렇게 편하게 다가와 주는 사람도 알버트가 처음인 마당이다. 그래서인지 정말로 나이를 떠난 친구 같은 생각도 슬슬 들기는 했다.

‘알버트랑 있으면 회장이라는 무게도 좀 잊게 되는 것 같고.’

오늘도 플레지에서 골드 팔아 현금 벌기 바쁜 진수와 성찬이를 오래간만에 떠올려 본다.

나는 좋은 선물 꾸러미를 건넸다.

[자! 이거면 아버지의 신뢰가 좀 회복되겠어?]

오늘 발매되기로 한 사이버 쇼크 패키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 발매도 안 된 이 패키지가 내 방에는 몇 개나 쌓여 있다.

[오! 역시!]

좋은 건지 어떤 건지. 잘 모르는 알버트는 일단 밝은 표정을 지어보지만, 그와 비교가 될 정도로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안디오를 보고서 알았다. 아빠가 아들의 취향에 맞춰서 열심히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안디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서 점점 알버트 역시도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웃음과 긍정적인 감정이 전염되는 좋은 사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근데 하나 더 가능해?]

[뭐가?]

[이거 말고··· 그··· 대회에도 참가시켜줄 수 있어?]

‘이게 목적이었구나?’

레이컴의 신형 MP3P를 참가 선물로 주는 대회는 이미 한참 전부터 온라인 참가 지원은 인원이 꽉 채워졌고, 현장 지원 역시 그 경쟁이 매우 뜨거울 거라고 보고 있었다.

‘청탁이기는 한데, 이쯤이야 쉽지. 다만······.’

내가 무려 회장님이시다. 현장 참가 지원자의 목록에 이름을 넣고 무조건 당첨자에 넣어버리면 끝! 뒤탈도 없다.

그 대신 확인은 해야 한다.

[안디오라고 부르면 되나?]

[네.]

[그래, 안디오. 너는 왜 대회에 나가고 싶은 거야? 게임을 잘하거나 많이 좋아해서?]

권력을 쓸 때는 신중해야 한다. 작은 일이 반복되면 무뎌지고 큰 범죄로 발전한다. 또한, 내 위치가 위치인 만큼 작은 행동 하나가 지금 막 도약하고 열심히 하려는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빼앗는 격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불합리한 일을 꿈속의 소시민이던 나는 자주 보았고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며 한 소리씩 떠들어대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이 아이에게 타당한 이유가 이끼를 바란다.

안디오의 눈을 똑똑히 보고 있으니 녀석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냥요. 무대에 올라가면 재미있어서요.]

‘이런.’

게임 대회를 원하는 게 아니다. 대회의 상품도 아니었다.

그저 무대였을 뿐이다.

[오늘 있을 대회에 너를 올려주는 건 어렵지 않아. 그런데 안디오가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 어쩌면 이 게임에 미래를 건 다른 누군가가 그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

이러면 곤란하다.

[네가 이 대회에 그만큼 깊은 의미를 가졌다면 참가하게 해줄게.]

알버트와 비슷한 체격을 갖춘 안디오는 대충 봐도 중학교 고학년에서 고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무작정 하고 싶다고 떼쓰는 나이는 지난 것이다.

아이는 나름대로 깊게 생각을 해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다행이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고 이성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자식 싸움이 부모 싸움 되는 법이고 이는 알버트처럼 애착이 클수록 더욱 그러하다. 꽤 시끄럽기는 해도 나이를 떠난 좋은 친구가 하나 생겼었는데 이런 식으로 멀어지지는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대신에 안디오를 위한 좋은 무대를 만들어주도록 할게.]

[무대요?]

[그래. 좋은 무대를 만들어 줄게. 그러니 오늘은 재미있게 구경만 하는 거다? 알았지?]

[네!]

기대에 찬 아들을 보며 알버트 역시 내게 고마움의 시선을 보냈다. 나 역시 웃음으로 답하고는 안디오의 어깨를 두드리고 알버트에게 말했다.

[나가자.]

[나가다니? 어딜?]

[대회에 안 나가더라도, 구경은 해야 할 거 아냐.]

< 넓은 세계를 보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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