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46화 (346/577)

< 넓은 세계를 보라 >

그리 말을 마치고는 한동안은 게임이나 즐기면서 여가를 즐기기로 했다.

‘이쪽도 나름 거대 규모 기업의 회장이 나서는 자리이니 빌 게이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회장 정도는 나서줘야 그림이 맞을 거야. 그러니 야속이 잡힐 때까지는 조금 놀아야지.’

하지만 내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틀 후, 빌 게이트 회장이 직접 오겠답니다.”

“직접이요? 아니··· 그 사람은 안 바쁘답니까?”

고작 게임 발매로 얼굴을 보는 자리다. 초기에 후발주자로서 어떻게든 게임스테이션을 따라잡아야 했던 시절도 아니고 지금 시기에 빌 게이트가 직접 나온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빌 게이트가 이토록 쉬운 남자였는지 내가 같은 급이 되면서 거물과의 만남이 수월해졌는지 참 모를 일이다.

*

5월 18일 목요일.

LA 비벌리 힐스에 있는 최고급 호텔의 미팅 홀에서 마이크루의 회장인 빌 게이트와의 식사 시간을 가졌다.

‘역시 적응이 잘 안 돼. 달랑 두 명이 식사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공간이잖아.’

홀의 크기는 약 20평 정도로서 아담한 규모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20평이라는 공간 전체에 오직 테이블의 숫자가 달랑 1개라는 사실을 되새긴다면 20평은 광활한 여백의 공간으로 이미지가 확 바뀌게 될 것이다.

돈은 정말 많이 벌었지만 이런 식의 씀씀이와는 거리가 먼 나다. 그래서인지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다.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상영관 전체를 빌려서 연인과 둘이서만 관람하곤 하던데, 아무래도 나는 그런 이벤트는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빌 게이트는 이런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만.’

마주한 그는 매우 편안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도 금방 적응했고 비싼 호텔 음식에 대해 품평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맛있다!

‘돈 값한다. 이러니 고작 밥 한 끼 먹으면서 3시간씩 걸리고 그러는 거지.’

대화의 속도에 맞춰서 아주 느리게 나오는 서양식 코스 요리. 하지만 천천히 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음식의 맛은 정말 훌륭했다. 너무 맛있어서 뷔페처럼 잔뜩 쌓거나 감질나는 양 대신 접시 가득하게 나왔으면 싶을 따름이다.

어쨌거나 놀러 온 자리도 아니고 영업하러 왔으니 사업이라는 공통분모를 대화하면 된다.

[조금 놀랐습니다.]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보통 저희 쪽에서 뵙자고 이야기를 하면 늘 대리인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먼저 보자고 연락이 올 줄은 몰랐거든요.]

[하도 얼굴을 안 보여주시니 제가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젊은 사업가를 만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소한 이야기.

안부를 묻고 가볍게 ‘하하’ ‘허허’ 웃기 좋은 무게감의 대화를 편안하게 나누었다. 일견 참으로 따분하고 재미없는 형태일 수 있으나 이런 게 사회생활이고 사람 사이의 윤활유와 같다.

[윤 회장님이 굳이 이렇게 얼굴 보고 식사라도 하자는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번 신작 게임 때문입니다.]

[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다들 난리더군요. 어떻게든 우리 독점 게임이 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들 하던데···]

향후 1년 이내에는 게임스테이션으로 발매할 예정이 없으므로 사실상 독점으로 발매해도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개발에서 지원을 받은 것도 없이 무작정 ZBox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게 좋은 선택지일 리가 없다.

[아시겠지만 독점 게임이라는 건 애초에 개발과정부터 많은 지원을 받고 가는 겁니다. 다른 플랫폼으로의 이전이 없는 대신에 다른 이익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GF는 이번 게임 개발에서 저희의 도움을 받은 것이 없었죠?]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신 것은 따로 저희에게 제안할 것이 있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럴만한 제안이 될지 모르겠지만요.]

ZBox 360의 지금까지 판매량은 전 세계 총합 600만대 정도다. 사이버 쇼크의 경우 정말 엄청난 성공을 해냈을 때 올해 100만 장 정도를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껏해야 마이크루가 가져갈 수 있는 매출은 100억 정도.’

일반 기업으로서야 100억이면 엄청난 매출이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던가. 세계 굴지의 대기업인 마이크루 소프트다. 즉, 고작 100억 때문에 빌 게이트가 직접 움직일 리 없으니 그는 액면가 이외의 무게를 재야 옳다.

이는 그가 ZBox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어떤 제안인지 기대가 되는군요.]

[별거 아닙니다. 저희 게임의 발매와 동시에 ZBox의 퍼포먼스 자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한 번 가져보면 어떨까 해서 말이죠.]

[ZBox의 퍼포먼스 자랑이라. 어떤 식으로 퍼포먼스를 자랑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냥 담백하게, 대회를 해보자는 거죠.]

[예전에도 대회를 여시고 지금도 게임 하나는 세계적인 대회로 키우고 있다고 들었는데··· 윤 회장님은 대회를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군요.]

‘대회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대회가 가지는 파급력을 좋아하는 겁니다.’

웃으며 대답했다.

[결국, 그 대회들이 늘 좋은 결과를 냈었죠.]

[그랬지요. 그렇다면 저희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제가 구상하고 있는 건, 발매 일에 맞춰 대형 전자상가에서 대회를 여는 겁니다. 미리 정보를 듣고 온 사람이든 그냥 지나가다가 구경을 하던 사람이든 모두가 참여가 가능한 그런 대회지요. 즉, 북미 전체에서 한 번에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대회. 바로 이 대회를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오호. 북미 전체라······.]

내가 제안했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규모의 확대는 곧 투여자본의 미칠듯한 증가와도 같다. 북미 전체에서 동시에 오프라인 대회가 이루어지려면 못해도 500만 달러는 족히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돈이면 사이버 쇼크로 얻을 수 있는 매출의 절반을 가볍게 초과하는 수치다. 애당초 콘솔 시장의 구조는 기기로는 손해를 보고 수익은 게임의 라이선스로 돈을 번다는 사실을 따져볼 때, 이건 비상식적이며 정상적으로는 들어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이를 잘 알면서도 화끈하게 말한 이유는 간단하다.

‘원래 협상은 이런 거니까.’

자고로 5억에 물건을 팔려면 10억부터 지르며 맞춰나가는 것 아니겠나. 일단 크게 질러 놓고 그다음 합작으로 대회를 진행하자고 하는 것이 내 본래 계획이었다. 그리고 거절의 답변에 대비하여 대응하려는 내게 빌 게이트가 말했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응? 콜이야? 이걸 받아줬다고?’

블러핑 같은 게 아니다. 그의 표정은 ‘정말 그것만 해주면 돼?’였다.

나는 멈칫했다가 메시지 전달이 잘못됐나 싶어 다시금 알려주었다.

[북미 전체입니다. 그냥 쉽게 그거라고 할 수는 없을 텐데요?]

그러자 국내 재벌에 불과한 나와는 달리 미국의 재벌은 싱겁다는 투로 대답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셨듯이 늘 좋은 결과로 이어졌지요. 이번에도 그렇게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게임스테이션이 발매되기 전에 확실하게 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화통하군.’

천조국의 기상은 남다르다. 나 역시 크게 동조하며 ‘좋다’ 여기고는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조건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어떤 거지요?]

[2년. 사이버 쇼크는 기간 독점이 될 겁니다. 발매 후 1년까지는 ZBox로만, 그리고 1년 후에는 PC와 닌텐두에도 발매할 수 있으며 2년 후에는 소미에도 발매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동의하십니까?]

기간 독점제.

완전 독점이면 더 좋겠지만, 사실 이 제안도 그리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일단 가장 까다로운 상대인 소미에게는 2년 후에나 발매한다는 조건은 완전 독점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은 조건이지 않은가.

‘1년 후에는 테일로3가 발매가 될 거고 2년 후면··· 뭐, 사실상 사이버 쇼크도 철 지난 게임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지.’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마이크루의 입장이다. 우리의 입장을 이야기하자면 2년간은 어차피 게임스테이션용으로 발매를 못 하는 게임이며 기한에 불과했다.

즉, 개발 노하우를 쌓고 부족한 퀄리티를 보완, 업그레이드하면서 안정적으로 컨버전을 할 수 있는 시기가 2년 정도 걸릴 거라고 보았다. 그래서 내가 2년의 시간을 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만 좋은 계획이고 듣는 빌 게이트의 입장은 달랐다.

[2년간의 독점이라는 건 나쁘지 않지만, 기간 독점이라는 것 자체가 저희의 투자 대비 손해로 보이는 군요.]

‘역시.’

그는 PC와 닌텐두의 시장은 애초에 배제하고 본다.

PC는 애초에 경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시장이 작고 닌텐두는 같은 세대이며 콘솔 자체로는 경쟁을 하고 있지만, 여긴 경쟁 방식이 다르다.

진짜 경쟁자는 소미의 게임스테이션3이지 닌텐두의 vvii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단락되는가 싶던 대화가 빌 게이트의 물음과 함께 더 이어졌다.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다른 대화를 조금 더 해보고 결정을 해보고 싶군요.]

[다른 대화요?]

다른 대화를 해보고 결정을 하겠다는 건, 새로운 대화 안에 빌 게이트가 원하는 제안이 있다는 의미.

[윤 회장님의 최근 행보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죠.]

‘최근 행보?’

넷플렉스와 바벨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윤 회장님의 사업은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고리가 부실합니다. MP3P 사업과 게임을 함께 하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애니메이션에 투자를 시작하셨지요. 그러다가 또 갑자기 반도체 회사를 인수하더니만 이제는 넷플렉스와 바벨을 인수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 회사들은 굳이 연결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연결해서 사업을 구상하는 기업들이 아니거든요.]

그가 직접 찾아온 이유는 이 물음을 위해서였다.

[윤 회장님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까?]

질문과 함께 빌 게이트 회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볍게 대답해서는 곤란한 물음이라고 하겠다.

‘이런 거물이 내 사업을 알게 된다면, 꿈속의 미래는 약간이 아니라 완벽하게 흔들릴 수가 있어.’

특히, 스마트폰이라는 사업을 생각하면 당연히 둘러대야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도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지금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빌 게이트라는 이름에 주눅이 들어서?

전혀 아니다. 현실적인 계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개발하는 OS로는 한계가 있지.’

이것이 문제다.

현재 GF는 태블릿 PC까지 개발을 완료하여 시중에 그 모습을 보인지 한참이 지났다. 나름대로 이쪽 분야에서 인정받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기준으로만 그러할 뿐, 표준을 차저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우리 태블릿 PC는 우리가 맞춤용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야만 하는 수준이지. 냉정하게 보면 그만큼 엉망이야.’

그래도 이것만 문제였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하우는 차차 쌓이기 마련이고 느리더라도 스타트를 일찍 끊고 선점하면 대성공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두 번째 난관은 정말 극복하기 어렵다.

‘특허를 피할 수가 없어.’

꿈속 미래의 나는 사용자일 뿐이다. 그런 일반인에게 미래의 윤곽을 안다고 해도 어떤 OS를 개발해야 기존의 특허들을 모조리 피하면서 동급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MP3나 PMP 수준의 개발이 가능한 회사에서 지나치도록 큰 그림을 그린 탓이야.’

생각해보면 OS를 개발한 회사들은 다들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이다. 기업의 규모가 작더라도 꽤 오랜 경험을 축적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쌓아온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 고민의 마지막 이유!

시간 여유가 없다.

‘당장 내년이면 와이폰이 등장할 테니 지금으로서는 경쟁 자체가 불가능해.’

하드웨어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하드웨어가 아닌 OS였다. 이런 모든 상황을 돌이켜보면서 앞을 보면 누가 앉아 있는가? 바로 빌 게이트다.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니 고민을 깊게 할 수밖에 없다.

< 넓은 세계를 보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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