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넓은 세계를 보라 >
닌텐두의 콘퍼런스는 짧게 설명할 수 있다.
소미의 콘퍼런스의 입장을 위해서 가장 긴 시간을 대기한 사람은 5분.
마이크루는 1시간 30분.
닌텐두는 무려 6시간이다.
‘소미에 사람이 왜 이리 없나 했더니 이게 몽땅 닌텐두에 몰렸던 거더라.’
내가 메이저 게임 제작사의 오너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도 닌텐두의 콘퍼런스는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메이저 제작사라는 점 덕분에 이미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저 꽉 채워진 인파를 뚫고 자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문제는 자리가 아니라 인파 그 자체다.
[오늘 비교체험이 정말 엄청나네. 소미랑 달리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
들어갈 때, 나올 때, 이건 뭐 그냥 가을에 한강 불꽃 축제를 끝내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기분이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꽤 있으려나 싶다.
[진짜. 이걸 뚫고 들어갔었다는 게 대견하다.]
[그러게.]
닌텐두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별다른 게 아니다.
게임스테이션과 완전히 동일한 모션센서. 그것을 열정적으로 시연하는 시연자.
그런데도 닌텐두는 열광의 도가니 그 자체다. 소미는 시연자 혼자 신났다면 닌텐두는 다 함께 신이 났다는 차이였다.
「땡큐 소미! 우리를 모방해주다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게임계의 빅3 모두가 콘퍼런스를 끝마쳤다.
135. 넓은 세계를 보라
사우스 홀은 E3 행사를 보러 온 관람객들이 입구를 통해서 입장하면 가장 먼저 방문하게 되는 곳이다. 맨 처음 관객들을 맞이하는 장소이니만큼 이곳은 E3 행사에 참여하는 업체 중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게임사들의 부스가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감회가 새롭네.]
[왜? 오랜만에 루저 시절 기억이 막 떠올라?]
[뭐, 딱히 루저였던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저 구석에 자리를 잡았었거든.]
사우스 홀의 다른 이름은 메인 전시관이며 이곳만 관람해도 E3의 80%는 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영향력 있는 업체들의 부스가 있는 만큼 일반 관람객들은 물론, 업계 관계자들에게도 가장 매력적인 기업은 죄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처음 우리가 E3에 진출했을 때는 당연히 이 사우스 홀에 발도 못 붙였다.
[구석? 어디? 저기 구석?]
[아니. 여기에서는 구석이라고 해도 같은 사우스 홀이니까 구석이랄 것도 아니지. 아까 콘퍼런스 보러 갔던 곳 있지? 그쪽 구석.]
[여기 맨 끝에 있는 홀?]
[그래. 거기.]
[거기는 사람들 별로 안 가던데.]
[그러니까 감회가 새로운 거지.]
굳이 홀의 등급을 나누자면 사우스 홀, 켄티아 홀, 패트리 홀, 웨스트 홀 순인데 첫 출전은 저기 세 번째에 있는 패트리 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당당하게 사우스 홀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의 500평 넘는 아주 큰 규모를 가지게 된 것이다. 실로 감개무량하다.
흐뭇하게 웃는 내게 알버트가 물었다.
[그 처음이 언젠데?]
[4년 전.]
[이야~ 4년 만에 이렇게 오다니. 성공했네.]
[아니. 1년 만에 왔어.]
[···에이~ 뭐야. 그래놓고 감회가 새롭긴 뭐가 새롭다고. 이런 게 성공 히어로의 기만이라는 건가!]
틀림없다. 이건 다 에밀리가 문제다.
[어? 저기 한국 게임이다!]
알버트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한국 공동관이 있었다.
GF가 패트리홀에서 처음 E3에 데뷔하던 그 시절 우리와 같은 패트리 홀에 자리 잡으면서 당당하게 E3에 진출했던 기업 중 하나였던 큰빛 소프트는 당시에 국내 최상위의 게임 유통사로서 10개가 넘는 게임들을 가지고 E3에 진출했을 정도로 굉장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독립 부스를 마련할 여력이 없는 회사가 되어버려 한국공동관을 통해 다른 15개의 게임사와 함께 진출하는 처지로 변모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사우스 홀로 왔으니까.’
이게 업그레이드일까? 다운그레이드일까?
[한국에서 만든 게임이라는데. 한 번 해보고 갈까?]
[하지 마. 재미없어.]
[재미없다니? 내가 여기 오기 전에 공부를 좀 했는데 한국은 게임으로 엄청 유명하다더라고.]
‘게임도 안 하시는 분이 그런 것도 예습하고 오셨어요?’
귀여운 구석이 있다.
[게임으로 유명은 한데 종류가 달라. 한국은 게임을 잘하는 나라지 잘 만드는 나라가 아니거든.]
[우리 회사는?]
[···정정할게. 한국도 솔직히 꽤 괜찮은 게임들은 만들기는 하는데 저기에는 그런 게임이 없어.]
시기와 질투로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게 아니다. 정말로 한국 공동관에는 듣도 보도 못한 회사에서 개발한 휴대용 콘솔부터 시작하여 게임 컨트롤러, 그리고 여러 게임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알버트에게 추천할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어라? 서킹어갓도 있네?’
물론 이 별명은 지금 저기서 전시 중인 게임이 아니라 저 게임의 후속작의 별명이다. 한국에서는 이미 상용화되고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국내 FPS들을 빠르게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게임.
‘해외 진출을 제대로 노리고 있는 모양인데, 헛물켜겠군.’
애석하게도 외국에서 잘 통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이 게임의 수준이 국내에서만 통하는 수준이라서가 아니다. 국내 FPS 게임 중에는 가장 게임성이 있는 잘 만든 수작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이는 고증이나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조작 덕분에 얻은 강력한 어드밴티지다.
‘초보에게 접근성이 좋지만, 쉽게 배울 수 있는 것과 달리 고수가 되기까지는 꽤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게임이지. 이 정도로 레벨 디자인이 잘 되어 있는 게임은 정말 드물어. 의도한 건 아닐 테지만.’
그런데도 알버트에게 권하지 않으면서 내 평가마저 박한 건 게임의 태생 때문이다.
‘표절이 어마어마하거든.’
오죽하면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 총을 잘못 들고 있는 것까지 똑같이 베꼈겠는가. 처음부터 대놓고 다른 게임을 베껴서 만들었으니 그 게임들이 이미 자리를 잡은 나라에서 성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저기도 한국 게임 있다! 저거는 어때?]
MCSoft.
사우스 홀에 독립 부스를 가지고 참가한 한국 기업은 우리 GF와 MCSoft 딱 둘 뿐이다.
[신작 게임 공개하나 봐. 보자.]
[신작게임?]
오늘 MCSoft에서 공개할 신작 게임이라면 와이온 온라인일 것이다.
와이온 온라인.
엠씨소프트에서 출시한 게임들이 늘 그래왔듯이 이 게임 역시 현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게임이다. 그 덕분에 국내의 게이머들 사이에서 엄청난 욕을 먹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엠씨는 다른 그 어떤 게임사보다 1세대 온라인 게이머들을 잘 이해하는 회사야.’
현질이 지배하는 게임은 기본적으로 돈 많은 아재들이 느린 손으로도 게임을 즐길 수 있으며 PVP든 뭐든 나름대로 제법 괜찮은 타격감을 가지고 있다. 즉, 컨트롤하는 재미가 있었던 게임인 것이다.
물론, 이 역시도 ‘월드 오브 워드래프트를 베낀 게임’이라거나 ‘오토가 많아서 계속 1위를 하고 있다’라는 등등 논란이 되는 이야기는 아주 많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국내에서 160주간 정점을 찍게 되는 게임이다.
‘다이너스티가 상대해서 이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불가능하겠지.’
애석하게도 팔이 안으로 굽는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무조건 진다. 2005년에 출시한 다이너스티와 2008년에 출시될 와이온은 경쟁작이라고 볼 수 없다.
와이온 온라인이 출시되면 다이너스티는 고전 추억을 통한 게임으로 남게 되리라.
그런데 이를 잘 알면서도 내가 마냥 방치하고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엠씨를 인정하고 와이온 온라인을 추켜세우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오직 한국에서만의 패배이기 때문!
‘우리 회사는 국제적이거든.’
다이너스티의 패배는 어디까지나 한국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다. 해외까지 포함하면 와이온 온라인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가장 큰 이유로 한국 게임은 RPG라고 게임을 개발하고 있는 주제에 롤플레잉에 대한 이해도가 바닥이다.
와이온 온라인 역시 이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임이다.
RPG가 역할 분담 게임이라고 하니까 그냥 ‘탱딜힐’의 역할만 분담시키면 되는 줄 알고 게임을 만든 것이 바로 플레지2였다.
그런데 지켜보니까 ‘아이템 제작이라거나 이런 역할도 분담을 해야겠네?’ ‘오? 월드 오브 워드래프트를 보니까 제작부터 시작해서 양쪽 두 진영을 찢어버리니 PVP의 정당성이 훨씬 확보되네?’라며 복사 붙이기를 해버린다.
이러니 문제인 것이다. 국내 개발사들은 ‘도대체 왜 진영을 나누어서 싸우는가?’ ‘왜 아이템을 제작하게 만들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마스터할 수 없는가?’ ‘대체 왜 직업을 구분해서 역할극을 해나가는가?’와 같은 부분에 대한 고찰이 없었다.
그저 ‘저래야 RPG라고 부르더라’라고 여기고는 따라 하는 것뿐이다.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애초에 TRPG에 익숙해서 그런 역할극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는 서양의 유저들과 달리 한국은 그냥 빨리 레벨 올리고 아이템 업그레이드해서 더 강력한 적을 사냥할 수 있게 되고의 패턴이면 장땡이니까.’
익숙해지면 사냥이야 그냥 라면 먹으면서도 할 수 있는 PVE는 이제 지겨우니 PVP로 눈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다. 아울러 굳이 이런 고찰을 하지 않아야만 하는 웃기면서도 중요한 이유가 있다.
‘매출에 도움이 안 되니까.’
깊은 고민을 백날 해봐야 한국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다.
반면, 국외로 시야를 넓힌 우리 게임에는 여기에서 차별화가 된다. 다른 국내 게임사가 전투에 집중했다면 다이너스티와 정령의 숨결은 세계에 집중했다. 이 차이가 결국 해외 수익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 사이 알버트의 감탄사가 들렸다.
[이거 진짜 재미있어 보인다. 저 봐. 하늘을 날아다녀~]
다른 건 몰라도 MCSoft가 배경 하나만큼은 정말 아름답게 잘 꾸밀 줄 안다. 알버트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경관과 그 경관 위로 날아다니는 캐릭터이니 누구라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리 없다.
[여기는 부스가 엄청 크네? 저기 한국게임들 엄청 모아둔 것보다 이 회사 하나가 더 커.]
[그야 쟤들 매출 다 합쳐도 엠시 하나만 못하거든.]
[우리 회사는? 우리 회사는 어떤데?]
‘아, 글쎄. 대체 왜 이렇게 우리 회사라는 게 자연스러운 건데?’
그래도 뭐 듣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럴 때는 콧대를 높여줘도 된다. 나는 심드렁한 투로 또박또박 전달되게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한국의 모든 게임사가 다 합쳐도 우리 회사 하나에 안 되지. 참고로 부스도 여기보다 두 배는 더 커.]
[오오! 역시! 근데 여기 말이야. 엠씨? 이 게임을 해보고 싶은데··· 왜 이건 없어?]
[아직 개발이 안 됐으니까.]
[응? 왜? 아까 보니까 게임을 직접 하는 거 같던데?]
[그냥 개발자 영상이야. 직접 플레이할 정도로 완성이 된 건 아니고.]
[아! 이번에 우리가 게임 공개하는 그런 거랑 같은 거구나?]
[정확해.]
나보다도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알버트였지만, 참 순수하게 나이를 먹었다. 어찌 보면 냉철한 계산과 이런 천진함이 공존해야 배우를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켜지면 나 자신이 다른 인물이 된 양 연기한다는 것을 나는 때려죽여도 못 할 테니 말이다.
세상에,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다니. 이보다 민망한 게 또 어디 있으랴.
‘연예인을 천직으로 타고나는 사람은 분명히 따로 있는 거야.’
내 성격이랑은 정말 다르다.
그렇게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을 즈음이다.
“회장님.”
“에? 여긴 웬일이세요?”
넷젠의 길남주 대표와 크라비티의 임학규 대표를 MCSoft의 부스에서 만났다.
“그동안 엠씨에서 개발한다는 신작에 관한 이야기가 엄청 많았지 않습니까?”
“아하. 두 분이서 같이 염탐하러 오신 거예요?”
“에이. 염탐은 몰래 보는 게 염탐이지요. 저희는 당당히 보러 온 거니까 염탐이 아닙니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태식.]
[응?]
[보아하니 회사의 높으신 분들인가 본데 나는 저~기 가서 너희 게임이나 좀 즐기던가 하고 있을게.]
‘어이. 저들보다 내가 더 높거든?’
< 넓은 세계를 보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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