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급 시계 >
그 탓에 올해 E3에서 아이스 스톰은 부스도 소규모로 준비했고 볼 것도 없는 형편이다. 당연히 이들의 팬이 대거 불참했을 가능성이 높다.
[프레스 콘퍼런스? 이건 뭐야? GF에서도 하네? 오! 마이크루도 있어! 차세대 콘솔?]
[자세히 설명하자면 복잡해. 그냥 새로 나오는 게임기에 대한 설명회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우리는? 우리 회사는 콘솔 게임기 없어?]
‘엥? 이제는 그냥 우리 회사냐?’
저래서 연예인인가 싶을 만큼 정말 친화력이 높다.
‘따지고 보면 바벨 필름스의 임원급으로 채용이 된 상태이니 우리 회사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 번에 쑥 들어와서 살짝 당황했다.
[우리는 게임을 만드는 회사지 게임기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야.]
[전자기기도 만들잖아. 그런데 게임기는 못 만들어? 그거 만들기 어려운 거야?]
‘안’과 ‘못’의 차이는 참 겪을 때마다 크게 와 닿는다.
별거 아닌데. 괜히 자존심이 상하는 발언이다.
[못 만드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거야. 돈이 안 되거든.]
[게임기도 만들고 게임도 만들면 두 배로 더 벌 수 있는 거 아냐?]
[아니야.]
[왜 아닌데?]
게임기를 만들어서 팔았는데 그 게임기가 엄청나게 잘 팔린다면 알버트의 말처럼 두 배로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공상이며 망상이다.
[이미 자리 잡은 회사들 이름을 봐. 소미에 마이크루야. 후발주자로 시작해서 얘네와 경쟁을 해야 하는데, 솔직히 쟤네가 돈이 없어서 장사를 접을 일은 없어 보이지? 즉, 평생 혈투를 해야 하는 시장이야.]
[그래서 기기를 만들어봤자 돈이 안 된다는 거구나.]
[맞아. 차라리 돈 되는 다른 시장에 집중하는 게 낫지.]
[다른 시장? 무슨 시장?]
[그걸 네가 물어보면 어떻게 해?]
[응?]
[너 출연할 영화.]
[아하!]
사실 여기서의 내 말은 약간 비튼 것이다. 알버트는 물론이고 누구나 영화 자체로 알아들을 테지만 정말로 내가 노리는 시장은 영화가 아닌 소품이다.
라이언 맨은 부자이고 또 미래와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즉, 나는 그 속에 진짜 미래를 보여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컴의 전자제품이 보여줄 진짜 미래 말이다.
[그럼 우리 회사는 콘퍼런스 그거 안 해?]
[그거 다시 읽어 봐.]
[오후 1시 소미, 2시 마이크루, 3시 닌텐두, 4시. 5시 GF. 오! 우리는 5시에 하는구나?]
[그래.]
ZBox의 콘퍼런스에 얹어서 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우리의 콘퍼런스도 진행할 정도로 성장했다.
“회장님. 저는 준비가 잘 되고 있나 먼저 확인 좀 해보겠습니다.”
“아. 그러세요.”
오늘 콘퍼런스의 전체 진행은 김유천 전무가 맡게 되지만, 사이버쇼크를 소개할 사람은 방금 인사를 하고 들어간 팬더그램의 김현섭 실장이다. 그는 이런 큰 자리에서의 행사를 처음 맡아보는지라 지금 온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발표까지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 저러면 어떡해?’
손을 조금만 높게 들었다가는 겨드랑이부터 옆구리는 물론, 배와 등까지 흠뻑 젖는 담샘 노출의 신기원을 이룩할 기세였다. 알버트 역시 우려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친구. 저러다가 무대에서 지리는 거 아냐? 얼굴이 완전 나 지리겠소. 이러고 있는데?]
[겪어야 성장하는 법이지.]
[냉혹한 회장님이구나!]
[처음이라 긴장해서 그래. 그리고 어차피 중요한 건 김유천 전무가 다 하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
[하하! 대단하신 회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나저나 우리 게임 말이야. 그거 트레일러 좀 먼저 보여주면 안 돼?]
[엥? 너 못 봤어?]
[응? 누군 봤어?]
바벨 필름스와 완전히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케인 파이기에게도 미리 보여줬었다. 투자은행의 담당자들도 영상을 보고 아주 만족해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말이다. 그런데 주인공인 라이언 맨이 정작 모른다?
‘따돌림··· 일 가능성은 그야말로 1도 없지.’
알버트가 나랑 있을 때야 팔푼이 같고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데 저 가운데 예리한 구석을 필요할 때는 딱딱 보이는 인물이다. 절대로 사내에서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모르거나 혹은 그걸 계속 당해주고 있을 유순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영화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니 보여줄 필요가 없어서 보지 못했다는 편이 옳았다. 아닌 말로 이게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쉬쉬하겠는가.
[지금은 곤란해. 나중에 봐]
[쳇.]
원래 선물은 제때 열어야 감동도 두 배가 되는 법이다.
유명해진 만큼 처음 E3에 참가했을 때처럼 내가 직접 관리한다거나 관여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지금의 내 일과는 어찌 보면 다른 관람객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이것이 알버트와 E3 여기저리를 느긋하게 돌아가는 이유다.
[소미가 콘솔에서 엄청 알아주는 회사 아냐?]
[맞아.]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
[그러게?]
2006년 E3는 7세대 게임기들이 본격적으로 경쟁을 시작하는 해다.
7세대 게임기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세 회사 중에서 가장 먼저 기기를 출시한 곳은 작년 가을에 신기종을 출시한 마이크루였다.
이번 콘퍼런스는 그런 마이크루에게 대대적으로 대항하는 초석이 되는 무대인 것. 그런데 소미의 게임스테이션에 관객들은 거는 기대가 적은 것일까?
‘모인 인파가··· 인파라는 표현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적어.’
전체 관람객이 줄어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 1시부터 소미의 프레스 콘퍼런스가 시작됩니다.」
「다시 한번 안내드립니다. 잠시 후 1시부터 소미의 프레스 콘퍼런스가 시작됩니다.」
「콘퍼런스를 참관하실 분들께서는 내부 자리에 앉아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적은 손님 중 일부가 되어 우리 역시 이동했다.
[재미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한 번 보기나 하자.]
이런 걸 잘 모르는 알버트의 입장에서 사람이 바글거리기라도 해야 기대감이 있을 텐데 사람도 얼마 안 되니 기대감이 확 죽어버리는 것이다. 줄 서 있는 음식점을 보며 ‘여긴 맛있을 거야’라고 기대하는 심리와 똑같다고 하겠다.
‘물론 나는 이 결과를 알지. 그래서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더 놓칠 수 없는 거고.’
꿈속 미래의 내가 미국까지 와서 직접 관람했을 리가 있으랴. 그냥 집에서 접한 정도가 전부이다. 그리고 기억하기로 2006년 E3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게임스테이션3였다.
나쁜 쪽으로 말이다.
잠시 후, 조명의 불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소미의 대표인 쿠사나기 켄이 무대에 올라왔다.
닌텐두 같은 경우는 게임계 최고의 인기 개발자 중 하나인 미야토모 시게루가 올라오기에 엄청난 환호로 시작된다.
그러나 소미는 그냥 CEO다.
‘아이고 조용해라.’
그렇지 않아도 호응없는 소미의 콘퍼런스가 더욱 조용한 침묵에 잠긴 채 시작됐다.
「많은 소비자분들께서 우리 소미에서 출시할 새로운 콘솔을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콘솔이 ZBox에 비해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뭐 이런 자질구레한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말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쿠사나기 켄을 비추는 조명이 사라지고 스크린에 하나의 영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언제 고요했냐는 듯 사람들이 뜨겁게 열광했다.
[우와아!]
[파이널 어드벤처!]
그럴 수밖에 없다.
‘이건 뭐 시작부터 필살기부터 쏘고 시작해 버리는군.’
비록 실기 영상은 아니었고 그저 시네마틱 트레일러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열광하는 것은 일단 파이널 어드벤처라는 이름이 가진 힘이 그토록 대단해서다.
또한 내가 보면서도 대단하다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뛰어난 그래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새로운 기종으로 발매되는 거야?]
[그래픽 봐! 장난 아이야!]
[이전에 그래픽 좋다고 이야기하던 것들이 이제는 3D가 아닌 것 같아. 이게 진짜 3D구나!]
[대단해! 무조건 대단해!]
[이렇게 대단한 기기를 출시하려고 1년이나 늦어진 거구나!]
기가 막힌 성능을 보았으니 자연스레 구매욕이 솟구친다. 보는 이들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럼 얼마 정도 하는 거야?]
[ZBox가 399달러니까. 이거도 비슷한 가격 아닐까?]
[하긴. 가정용 게임기라는 게 가격이 다 거기서 거기니까.]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점점 잦아들 때쯤.
쿠사나기 켄 사장이 다시 무대의 앞으로 나왔다.
「소미의 새로운 콘솔 게임스테이션 3의 출시 가격은!」
낮고 자잘하게 깔리는 드럼 비트가 필요할 만큼 콘퍼런스 장 전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많은 사람이 게임스테이션3의 출시가에 따라서 7세대 게임기의 명운이 갈릴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과연 베일에 가려졌던 게임스테이션의 가격은 얼마가 될 것인가!
「599달러입니다!」
[······.]
E3에 마법적인 아이스 스톰이 강타한 것만 같았다. 쿠사나기 켄 사장은 그렇게 콘퍼런스 전체를 딱딱하게 굳혔고 꽤 오랜 시간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또 경악했기 때문이다.
599달러. 한국 돈으로 약 72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현재 콘솔계에서 무너지지 않는 왕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업체의 게임 스테이션.’
후발 주자보다도 무려 1년이나 늦게 차세대 게임기를 개발해서 내놓았다. 그런데 가격이 거의 두 배에 달한다고 한다.
고작 가정용 게임기 하나의 가격치고는 정말 말도 안 되게 비싼 금액에 사람들은 배신감까지 느끼는 것으로 보였다. 이 차갑다가 뜨겁고 다시 얼어붙는 기막힌 분위기의 변주곡을 감상하며 알버트가 내게 물었다.
[599달러가 비싼 거야?]
이 질문은 돈 많은 부자가 ‘그깟 푼돈에 왜 저리 호들갑이야?’와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599달러라는 금액의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콘솔의 가격이 얼마 정도일 때가 적당한지 물어보는 거였다.
[경쟁사인 마이크루의 콘솔이 399달러야. 심지어 성능도 별 차이가 없어.]
[그런데 599달러면··· 망한 거네?]
[아마도. 당장은.]
이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더욱 벼랑 끝에 밀어야 한다.
‘일단 지금은 확실하게 게임스테이션이 무너져야만 해.’
GF는 현재 마이크루에 게임을 최대한 밀어주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 유리하기 위해서는 게임스테이션이 더욱 구석까지 몰릴 필요가 있었다.
‘확실하게 침몰시키려면 지켜보는 것보다는 직접 나서는 편이 유리하지.’
이런 콘퍼런스는 그래서 좋다. 앞자리에 있은 참가자는 주요 인물이라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손을 들면 무시할 수가 없다. 나는 떡하니 자리 잡은 만큼 당당하게 고객의 권리를 행사했다.
「손드신 분. 질문 있으십니까?」
쿠사나기 켄 사장이라고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을 리 있으랴. 어떤 물음일지 짐작이 되는 만큼 그의 표정은 영 마음에 들지 않은 내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받아줄 수밖에 없는 현장이었다.
나는 내심 활짝 웃으며 겉으로는 무표정하게 질문했다.
[599달러라니. 가정용으로 가볍게 즐길 콘솔의 가격치고는 너무 비싸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특별한 질문이 아니다. 다들 생각하고 있는 질문이었고, 후반쯤 되면 누군가가 하게 될 질문이다.
‘그때쯤이면 실망한 기자들이 꽤나 나가 있을 테니까.’
그래선 곤란하다. 지금처럼 기자들이 이나마라도 남아있을 때 대답을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미는 지금부터 엄청난 병크를 터트리기 시작할 테니까.
「게임스테이션 3는 블루레이를 채용하면서 최대 화질의 영화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으며, 뛰어난 CPU를 장착하여 더 이상 단순한 게임기가 아니라 새로운 컴퓨터라고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 그가 방점을 찍었다.
「이렇게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 가격치고 599달러는 사실 저렴한 가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
[저렴?]
일순 행사장은 분위기는 허탈한 웃음으로 가득해진다.
컴퓨터라니! 메모리 스틱 기능은 다 빼놓고 그걸 컴퓨터라고 주장하는 저 뻔뻔함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의 이 뻔뻔한 말은 콘솔계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날 수 없다.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가격에 비해서 대단한 성능을 가졌을 수 있기야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가정용 콘솔의 보급이 많이 되어야 게임이 잘 팔리는데 599달러짜리 콘솔의 보급이 잘 될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조금 전의 질문도 그렇고 이번 질문까지 꽤 예민한 곳을 두 번이나 건드렸다. 결국, 쿠사나기 켄은 내게 노골적으로 불편한 시선을 보냈지만, 고작 그딴 시선에 눈치를 볼 사람이 아니다.
「이 자리에 계신 많은 게임 제작사 분들이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게임스테이션2가 정점에 있었던 것처럼. 게임스테이션3는 역시 정점에 서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단언컨대 2억 대 이상의 판매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 고급 시계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