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39화 (339/577)

< 고급 시계 >

[다음에. 너 출연할만한 영화 만들 때 하자.]

[응? 왜? 여긴 나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출연할 배역이 없어?]

[아니. 그런 배역은 있는데 꼬맹이가 출연할 역할이 없더라고.]

[씨!]

내 말에 잔뜩 삐친 에밀리의 볼이 부풀어 올랐지만, 틀린 말도 아니니까.

[팝. 뭐해? 안 갈 거야?]

[응? 아! 모험과 환상의 세계! 당연히 가야지!]

[에? 모험과 환상의 세계?! 거기가 어디야? 나도 같이 가~]

열려라 꿈동산! 같은 곳을 떠올리며 잽싸게 따라붙는데, 애석하게도 그 기대는 실망이 될 것이다.

‘네가 예전에 매일 같이 출근하던 곳이걸랑.’

그나저나 오늘도 하루가 참 많이 길어질 것 같다.

134. E3 2006

마이코닉스 본사가 위치하고 있는 빌딩.

[와우! 입구부터 이건 아주 놀랍네! 과연 모험과 환상의 세계야.]

총 38층으로 이루어진 건물 중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층은 고작 22층에서 32층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총 11개 층에 불과함에도 마치 빌딩 전체가 우리 소유인 양 1층 로비부터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비롯한 다양한 구조물로 꾸며져 있었다.

‘건물주의 농간이지만, 윈-윈이기도 하지.’

유명한 기업이 들어와 있다는 걸 어필하여 건물값을 올리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이 얄팍한 요구를 흔쾌히 받아준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이미지에도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LA 다운타운에 이런 건물이라니~! 역시 엄청난 부자잖아!]

알버트처럼 다들 이런 착각을 안겨주니 말이다.

나는 연신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그에게 웃으며 넌지시 알려주었다.

[산 거 아니라 임대야. 그것도 11개 층만.]

[응? 마이코닉스 같은 엄청난 부자 회사가 건물도 아니고 일부 층만 임대해서 사용한다고? 대체 왜? 이거 살 돈이 없어서 그런 거는 아닐 거 아냐?]

[그야 당연히 조만간에······.]

자연스레 대꾸하다가 멈칫했다. 곧 다가올 서브 프라임 사태로 말미암은 부동산 가치의 폭락이 일어날 건데 빌딩을 왜 사겠느냐는 이야기를 함부로 발설해서는 곤란하다.

‘그러고 보니 최종인 대표한테도 일단 집을 사지 말고 렌트해서 생활하라고 이야기해 줘야겠어.’

서브 프라임 사태는 주택 담보 대출로 생기는 문제다 보니 부동산 중에서도 주택이 가장 직격타를 맞는다. 어느 정도냐면 2년 안에 집값이 절반으로 떨어질 만큼이다.

물론 미국의 부동산은 비싼 곳은 정말 비쌀 만 한 이유가 있어서 비싼 곳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괜찮은 곳들은 사태가 회복되자마자 다시 고공행진을 하게 되니 팔지 않고 버티면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그래도 기왕 사는 거 폭락했을 때 사면 더 좋잖아.’

내가 꿋꿋하게 임대로 버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때를 기다리는 강태공의 심정!

조만간 기다리던 타이밍이 오면 넷플렉스 본사도 싹 장만할 계획이다.

이런 의중을 살포시 내리누른 채 알버트에게 대답했다.

[말했지? 우리 회사가 꽤 된다고.]

[알지. 내가 좀 알아봤는데 너, 열 개도 넘게 가지고 있는 거 같던데?]

[그래. 미국에만 해도 지금 바벨 엔터프라이즈에, 넷플렉스에, 마이코닉스까지 있어. 심지어 바벨 필름스는 뉴욕에 오피스가 있고 캘리포니아에 스튜디오가 있지. 이걸 다 사면 나중에 한 곳으로 모으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지.]

[음··· 그게 그렇게 되나?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역시 어려워. 모르겠다.]

그래. 나도 서브 프라임 사태가 터질 거라고 이야기하기 뭐해서 다른 핑계로 그냥 막 던진 말인데, 이해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하지만 후광효과라는 건 무시 못 하는 건가 보다. 되도 않는 소리인데 이해 못 한 자기 탓을 하며 그러려니 넘어가는 걸 보면 말이다.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골치 아픈 일을 금방 내려놓고 로비의 무언가를 보더니만 재빨리 다가갔다.

[오! 히어로 패밀리! 이거 진짜 끝내줬는데!]

아이처럼 1층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마이코닉스의 캐릭터들을 감상하자 에밀리가 콧대를 높였다.

[아저씨도 이거 봤어요?]

[그럼! 내가 얼마나 재미있게 봤는데! 특히 이 친구 비올레타의 능력이 진짜 끝내줬지! 투명화에 방어막이라니!]

[그쵸? 비올레타가 진짜 대단한 능력을 가졌는데! 다들 그걸 몰라준다니까요?]

에밀리가 자부심 가득한 이유.

그건 비올레타 역의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그녀라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서 인지도와 인기가 부족하다는 부분을 늘 분해했는데 알버트가 우연히도 잘 알아봐 주고 있는 것 같으니 한껏 기분 좋아하는 것이었다.

‘꿈속 미래보다 훨씬 잘나가는 그룹에 당연히 에밀리도 포함이지.’

초능력 히어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 히어로 패밀리는 전 세계에서 6억 달러라는 흥행 수익을 올리면서 현재까지 마이코닉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중에 최고의 수익을 자랑하는 중이다.

[그런데 왜 마이코닉스는 속편을 안 내?]

[이제 고작 3편 제작했고 올해 겨우 4번째 애니메이션이 개봉할 예정인데 속편은 무슨 속편이야.]

[에이. 그래도 흥행 성공하면 잊히기 전에 재빨리 속편을 내고 그래야지. 대중의 관심은 영원하지 않다고.]

2003년 여름 마다가스칼, 2004년 봄 히어로 패밀리, 2005년 레이서, 2006년 올해는 슈퍼  빌런을 개봉하려고 준비 중이다. TV 판까지 이야기하자면 훨씬 많은 애니메이션이 있지만, 어차피 간판 애니메이션은 극장판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번 슈퍼 빌런은 일종의 외전 성향을 띄고 있기는 하지. 히어로 패밀리와 같은 세계, 같은 시간을 공유하니까.’

물론, 특별히 콜라보를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지 않는 이상 둘이 만날 일은 없었다. 아마도 먼 훗날, 캐릭터의 가치가 떨어졌다 싶으면 그때쯤 콜라보를 해줄 것이다.

[속편이 팬들의 지갑을 확실하게 여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관심과 인기는 거품과도 같아. 손에 쥐고 있다고 해서 영원한 게 아니란 말이야. 내가 겪어봐서 잘 알지.]

농담에 진심을 듬뿍 담은 조언이다. 마음 한편으로 고마워하며 나는 웃음으로 여유 있게 받아넘겼다.

[매번 정말로 꿀잼을 보장하면 잊히기도 어렵다고. 지갑 역시 퀄리티 만큼 자연스럽게 열리고.]

[그게 말이 되냐? 매번 성공하고 맨날 재미있다는 게?]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나야.]

[헐. 이런 스타일일 줄은 몰랐는데. 아니 뭐··· 음··· 그거야 그렇지만 인간의 두뇌는 가소성이 높다고. 속편까지 너무 오래 걸리면 이전 스토리를 다 까먹어 버려서 코어 팬만 건지게 될걸?]

[좀 까먹으면 어때? 넷플렉스에서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는데.]

고개를 갸웃하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 손뼉을 쳤다.

[그렇군! 이야기 들으니까 정말로 장난 아닌데? 애니메이션에 영화에 와~ 사업의 연계가 굉장하구나.]

[싱거운 얘기는 그만하고, 계속 여기에서 그러고 있을 거야? 그럼 나 혼자 올라간다?]

[아냐! 아냐! 같이 가!  환상의 친구들은 나중에 또 보자고~]

오늘 처음 본 전시품들이랑 그사이 친구가 되었나 보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에도 호기심 가득하던 그의 눈빛은 꺼질 줄을 몰랐다.

[여기가 바로 그 끝내주는 모험을 만들어내는 곳이구나~]

정말로 청소년기 학생을 데리고 있는 기분이다.

이럴 때는 방법이 있다.

[에밀리.]

[네. 대장~]

[이 철없는 아저씨 좀 챙겨줄 수 있겠어?]

[그럼요. 대장 일하는데 방해 안 되게 잘 치워둘게요.]

아이는 아이에게 맡긴다!

듬직한 에밀리의 경례에 알버트가 기겁했다.

[잠깐. 잠깐. 뭔가 말이 좀 이상한데? 내가 무슨 쓰레기도 아니고 치워두다니? 고운 말 써야지!]

[됐고요. 아저씨 구경하고 싶은 것들 몽땅 구경시켜줄 테니까 이리 따라오세요.]

[진짜?]

[당연히 진짜!]

[와우!]

65년생 알버트와 88년생 에밀리는 23살이라는 엄청난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대화하는 걸 보면 비슷한 정신연령을 보유하고 있는 거 같다.

[애니메이션 개발하는 것도 구경할 수 있어?]

[제가 마이코닉스 직원은 아니지만, 명예 직원 비슷하거든요? 저랑 함께 계시면 어지간한 곳은 다 갈 수 있어요.]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

본래 규정대로라면 말도 안 되는 거지만, 에밀리는 진짜로 사원증에 사원 번호까지 소유하고 있다. 특별 우대라기보다는 진짜 직원은 아니지만 워낙 우리 작품에 자주 출연하다 보니까 매번 방문증을 만들어주는 일이 더 귀찮아서 편의상 해주었다.

그게 에밀리한테는 다른 의미로 전달된 것 같고 말이다. 나는 여기서도 아주 특별한 사람이야! 같은 종류로.

‘뭐, 아주 틀린 건 아니지. 마이코닉스의 2인자인 권문수 상무는 물론이고 마이코닉스의 직원들과도 대부분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에밀리가 회사에 있는 걸 어색해하는 사람은 없는 편이니까.’

대표적으로 나한테 ‘대장!’ 하면서 엉겨 붙는 모습만 봐도 얼마나 가족적인 위치인지 알 수 있다. 한국식의 안 좋은 의미로 쓰는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가 아니라 진짜 허물없는 가족 말이다.

‘그리고 이미 알버트의 방문은 이야기가 다 된 거라서.’

사실 에밀리가 없어도 다 구경할 수 있도록 조치를 끝내 둔 상태다. 하지만 굳이 이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에밀리에게 알버트의 회사 구경을 맡긴 후 나는 마이코닉스의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는 곧 다가올 E3를 위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올해, 클로버 스팅을 통해서 출시하겠다고 한 인디게임은 총 48개입니다. 그중에서 이번 E3에 출품할만한 게임은 심사 결과 15개로 확인되었습니다.”

“클로버 스팅의 자체 제작 게임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GF라고 매번 엄청난 자본을 쏟아부어야 하는 대형 게임만 개발하는 건 아니다. 올해는 김지애 대표의 주도하에 베이스볼 매니지먼트라는 게임을 개발하고 있는 중이다.

스포츠 매니지먼트 게임은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인데, 나름대로 준수하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KBO는 물론이고 미국의 MLB와 일본의 NPB까지 모두 라이선스를 지급하고 만든 게임이라서 실패하게 될 경우 GF게임 최초의 서버 종료 게임이 될 수 있는 고위험도 게임이다.

“E3에서 시험용으로 배포하는 데모버전은 완성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리그 기능은 없고, 랜덤으로 주어지는 선수들로 사용자 대전만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사용자 대전에 대한 영상 자료는 보내두셨지요?”

“네. 바로 확인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좋다.

“확인은 천천히 하도록 합시다. 그럼··· 이번에는 넷젠인가요?”

“네, 회장님.”

역시나 저 멀리 한국에서 대답이 들렸다.

‘이런 회의는 SF 영화에서나 가능한 건 줄 알았는데 말이야.’

LA 마이코닉스의 사무실이지만 마이코닉스만이 아니라 넷젠, 크라비티, 클로버 스팅, 팬더그램 등의 임원진들과 회의가 가능해진 것은 인터넷의 발달 덕분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에서처럼 홀로그램이 나오고 같이 생생하게 입체적으로 움직이면서 논의하는 그런 회의는 아니었다.

회의실에는 여러 대의 모니터가 있고 각 모니터에는 사업체의 대표자들이 화상통화로 연결이 되어 있다. 거기다 원격 시스템을 이용해서 내게 보여주고 싶은 자료는 실시간으로 내 노트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니 그 덕분에 이런 회의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저희야 신규 게임을 공개할 것도 아니고 그저 대규모 업데이트 공개 정도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보고 드릴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소개 영상 같은 건··· 아시다시피 마이코닉스에서 워낙에 일을 잘 해주지 않습니까?”

다이너스티가 출시되고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은 넷젠.

그렇기에 아직 후속작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기획안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는데 아직까지 내 기준으로 ‘괜찮다’ 여길 만한 것이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전부 폐기했다.

“알겠습니다. 영상은 제가 천천히 확인하면 되겠고··· 크라비티와 팬더그램은요?”

팬더그램은 올해, 크라비티는 내년에 새로운 게임을 출시할 예정이다. 그런만큼 올해 게임쇼에서 확실한 눈도장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서 있다.

회사가 커지니까 이런 게 문제다.

‘스포트라이트를 한쪽에 몰아줘도 쉽지 않은 게임계에서 양쪽으로 나눠서 스포트라이트를 주어야 하니.’

이런 사항들을 고려해서 전략을 짜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

크라비티는 PC 온라인 게임이고 팬더그램은 콘솔 게임이라는 차이가 있으나 어찌 되었건 전부 우리 회사의 부스 안에서 공개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령의 숨결은 내년에 출시하던가요?”

“네. 내년 초에 출시할 예정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온라인 게임과 콘솔 게임은 단순한 장르의 차이뿐이 아니라 시장조차도 차이가 있다. 그러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볼 수 있다.

< 고급 시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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