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급 시계 >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쩔쩔매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변하냐?’
원래 성격이 저렇게 넉살 좋은지 도통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봐요. 다우니 씨.]
[에이~ 정 없게. 정말로 이럴 거야? 그리고 내가 책임감이나 아무런 생각 없이 이렇게 와서 함께 대화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고.]
[그럼 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겁니까?]
[다 작품을 위한 거지. 잘 봐, 내가 맡은 역할이 뭐야?]
[영화제작위원회의 고문 역할이지요.]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잠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니까 지금 라이언 맨 역할 때문에 내 옆에 붙어 있는 거다~ 뭐, 이런 핑계를 대고 있는 겁니까?]
[정답! 바로 그거야.]
[아니. 나랑 라이언 맨이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어허! 이봐, 관계가 왜 없어? 토리 스타키와 윤태식 회장의 공통점이 이렇게 분명한데. 보라고. 둘 다 슈퍼 리치라는 점이 똑같잖아!]
‘···주정뱅이처럼 제멋대로 떠들기나 하고. 뭐라는 거람.’
라이언 맨에서의 주인공은 전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어디선가 장난삼아서 슈퍼히어로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가를 대략적으로 계산했었는데 그때 토리 스타키의 재산은 약 115조로 나왔던 적이 있다.
‘이런 건 계산할 때마다 다르고 그때마다 순위도 달라지는 거라서 진지하게 이야기할 건 아니지만.’
아무튼, 무려 115조다.
반면에 최근 경제 잡지에서 분석한 바에 의하면 내 재산은 대략 11조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까 난 토리 스타키의 10%도 안 되는 재산을 소유한 셈이다.
‘그뿐이겠냐고.’
사업체를 굳이 따질 필요도 없다. 라이언 맨 슈트 하나만 해도 부르는 게 값이 아니겠나.
하이 테크놀로지의 상징인 그 멋진 갑옷이 현실에 있다고 쳐 봐라. 진짜 슈퍼리치들은 조 단위로 불러도 살 사람은 분명히 살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내 표정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 들어봐. 다들 내가 어려서부터 배우로 활동해서 여기저기 슈퍼리치들을 많이 알고 지낼 거라고 착각하는데, 사실은 절대 아니야. 아마 가장 부자라고 해봤자 네가 가진 재산의 10%도 안 될 거라고.]
[그게 지금 당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가 되지는 못할 텐데요?]
[아~ 제발~ 편하게 좀 말하라니까? 자. 따라 해 봐. 어이~ 팝!]
[그건 됐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어이~ 팝!]
이 인간은 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계속 ‘Hey~ Pob!’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스크린에서는 상당히 카리스마가 넘치던 인물인데 지금은 짧은 머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발도 아닌 애매한 길이의 머리에 이상한 펌을 한 상태다.
이런 모습으로 그보다 백배는 괴상한 추리닝을 입고 남들 시선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잘만 돌아다닌다. 한 마디로, 정신 나간 인간 같았다.
[팝인지 밥인지는 됐고요. 그래서 제 옆에서 뭘 어쩌겠다는 건건데요?]
[응? 뭘 어쩌긴 뭘 어째? 그냥 슈퍼리치는 뭘 하고, 뭘 먹고, 또 어떤 일을 하는지 구경하는 거지. 그러다보면 대충 아~ 슈퍼리치라는 인간들은 이러고 사는구나~ 하고 연기를 하게 되는 거라고.]
[어휴.]
내가 졌다고 쳐주마.
[그럽시다. 그럼.]
[흐흐. 그래. 뭐 말이나 호칭 같은 건 천천히 바꿔가자고~ 그럼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이런 거대 기업의 오너라면 대단한 서류 더미를 쌓아놓고 매일 같이 그거에 사인하는 게 하루 일과라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대충 그런 줄 상상만 했었다. 실제로 어딘가의 회장님은 정말 그리 지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보통은 많이들 그러겠지만, 우리 회사는 그걸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말이죠.]
[그래? 좋은데? 그래! 토리의 자유분방한 성격이라면 그런 걸 따로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럼 너는 무슨 일을 하는데?]
[지금 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걸 보면서도 뭘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서 하는 말이지.]
엄청 친근하게 달라붙는다.
‘진수성찬은 어릴 때부터 친구이기라도 했지.’
그래도 자신이 맡은 배역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는 데다가 이게 정말로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일단은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얼마 전에 메릴리치에서 회사에 찾아왔었던 건 알고 있죠?]
[그건 아는데, 진짜로 말 편하게 하고 그런 거 못 하는 거야?]
[불가항력입니다. 제가 영어를 열심히 배우기는 했지만, 당신들처럼 자유자재는 아니거든요. 처음부터 배운 말투가 이래 먹어서 경어와 평어를 자유롭게 쓰지 못해요.]
[아닌 거 같은데? 발음이야 약간 어색하긴 하지만 잘할 거 같은데?]
[아. 됐고. 하던 얘기나 합시다.]
[하하하! 그거 봐. 방금 평어 엄청 자연스럽게 썼다고.]
입꼬리가 귀에 걸칠 만큼 환하게 웃는 모습에 나는 항복 의사를 보였다.
[젠장. 알았어. 알았어. 편하게 하자고. 됐지?]
[좋아. 바로 그거라고!]
[아무튼, 메릴리치에서 찾아왔던 거 알지?]
[그럼! 알지.]
[게네가 이번 영화의 주인공인 라이언 맨의 인지도가 부족하다고 따지더라. 그래서 라이언 맨의 인지도를 올려줄 게임을 하나 만들기로 했어.]
[그 정도는 넘어가도 돼. 뉴욕에서 여기까지 따라오는 동안 계속 본 게 있는데 그걸 모르겠어?]
‘···확 핵 꿀밤을 먹여주고 싶다!’
진짜 나이만 나랑 비슷했다면 딱 밤 한 대를 시원하게 날려주고 싶다. 그러면 아주 속이 통쾌해질 것만 같다.
[게임을 개발하려면 프로그래머들이 뭘 개발해야 하는지 이해를 해야만 해. 어떤 시스템이 필요하고, 또 어떤 것들을 구현해내야 하는지 알려줘야 하지.]
[영화 각본 같은 건가?]
[비슷해. 그런데 나는 각본가가 아니잖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믿을만한 각본가에게 맡겨야지.]
[그렇지.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각본가에게 그냥 던져주면 내가 원하는 게 나올 리가 있겠어?]
[그럼?]
[그래서 지금 각본가들이 각본을 뽑아낼 수 있는 시나리오를 구상해서 만드는 거야. 우리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각본가들은 기획팀이고 이 기획팀이 이해할 수 있는 기초 기획안을 만드는 거지.]
그가 무릎을 내리쳤다.
[그런즉슨 네가 기획안을 만들어서 기획팀에게 주면 그 사람들이 프로그래머가 이해할 수 있는 기획을 제대로 짜내고 그거로 게임이 만들어진다는 뜻?]
[이해 못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용케 이해했네.]
[당연하지. 토리 스타키는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라고. 이 정도는 듣자마자 이해하는 게 당연해.]
‘아. 그러세요? 근데 당신은 지금 토리 스타키가 아니라 알버트란 말입니다. 벌써부터 헷갈리는 것을 보니 정말 끝~내주는 몰입도네요. 아주 할리우드 배우 나셨···는 게 아니라 진짜로 할리우드 배우였었지?’
뇌내망상으로 빈정거리다가 정신을 바로잡았다.
아무래도 이상한 인간이 옆에 붙으니까 내 머리도 이상해지는 거 같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캐릭터들을 직접 구상하고 그럴 필요가 있어? 어차피 바벨의 캐릭터들이라서 굳이 캐릭터들 이력을 따로 만들고 할 필요가 없다면서?]
[없지. 하지만 바벨의 모든 슈퍼히어로가 게임에 들어갈 수는 없어. 초기에는 고작해야 8개 정도 들어가면 많이 들어가는 거거든. 그래서 나는 게임에 가장 어울리는 슈퍼히어로를 골라내고 또 거기서 가장 어울릴만한 스킬들을 분석해서 기획하는 거야.]
[아하! 그런 거로군. 근데 나 불만이 하나 있는데 이거 말해도 돼?]
[안 돼.]
[그게 뭐냐면··· 어? 아니, 뭔 거절이 이렇게 빨라? 그러지 말고 들어봐. 여기 이 기획안을 보고 진지하게 하는 불만이라고.]
‘설마 진짜로 문제점을 찾은 건가?’
짧은 시간 만에 기획안에 있는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보완할 단서까지 찾아냈다면 내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시시껄렁한 태도를 보여서 그렇지 그 역시도 한 분야에서 최상위에 오른 능력자가 아니던가.
진지하다는 말에 따라 나 역시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뭔데?]
[라이언 맨은 원래 기본적으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영웅이야. 그런데 왜 짧은 시간 부스터처럼 잠깐만 떴다가 떨어지게 하는 거야? 이건 원래 캐릭터랑 안 맞아.]
‘···기대한 내가 바보였지.’
내가 그걸 몰라서 구상을 이렇게 했으랴. 지나친 기대를 했다는 점을 반성하며 알려주었다.
[게임이라는 건 결국 공정하다고 믿을 수 있는 룰 속에서 경쟁할 때 가장 재미있는 거야.]
[그래. 공정해지려면 원래 하늘을 나는 라이언 맨은 자유롭게 날아야 공정해.]
[이봐, 그럼 캡틴 실드 같은 캐릭터는 공격할 방법이 없잖아. 하늘에서 미사일만 쏘면 끝인데.]
[어라? 그러네?]
[그래서 계속 날 수 없도록 하는 거야.]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알버트의 입은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떠들어댔고 나는 일일이 그것에 대답해주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 탓에 덜 지루하기는 했으나 능률은 떨어져서 생각보다 긴 시간인 이틀이 흘러서야 한국에 보낼 기획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야~ 결국 다 해내다니. 슈퍼리치의 능력이란 농담하면서도 척척 일을 해내는 거였구나!]
[나가.]
[워~ 워~ 진정!]
이 게임의 장르는 하이퍼 FPS다. 하지만 사실 MOS 장르를 만들었을 때처럼 이것도 정해진 장르의 이름은 없는 실정이다. FPS 장르의 하위 장르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하이퍼 FPS, 외국에서는 클래식이나 올드 스쿨 등등 다양한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
아무튼, 한국은 FPS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던 나라다. 그러다가 FPS 계를 독점하는 게임이 몇 가지 등장하게 됐는데 이 게임들은 전부 밀리터리 FPS였고 결국, 한국은 고전 FPS라 할 수 있는 하이퍼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덕분에 대부분 개발자들이 하이퍼 FPS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편인데, 나는 운이 아주 좋은 편이지.’
국내에서 개발한 하이퍼 FPS.
이 중에서도 최고 수작이라 할 수 있는 액티브의 개발자가 바로 우리 회사에 있지 않던가. 그라면 이 기획안을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한국으로 가서 개발과정을 지켜보면 좋겠지만, 지금은 여기서도 할 일이 많으니까.’
김강철 팀장을 믿고 나는 미국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럼. 이거 다 했으면. 이제는 뭐 하는데? 할 거 없는 거야?]
[할 게 없을 수 있겠어? 내가 회사가 몇 갠데.]
[그치?]
3개월이 남았다고 하지만 E3를 준비하다보면 그 3개월은 아주 금방 지나가게 될 거다.
‘새삼 마이코닉스 직원들에게 미안해지네.’
잘 해내려다 보니 일을 폭탄 수준으로 맡기게 됐는데,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충분한 보상으로 답해줄 수밖에.
[응? 드디어 방에서 나가는 거야? 뭐야? 어디 가는데?]
[마이코닉스.]
[와! 모험과 환상의 세계를 만든다는 그 회사? 나 거기 진짜 가보고 싶었는데!]
[어휴. 그래서 팝. 집에는 언제 갈 건데?]
[집? 집이야. 때 되면 가는 거지.]
‘아니 이 인간, 엄청난 애처가 아니었어? 왜 이렇게 자유분방해?’
수다쟁이 같은 그를 곁에 두고 지내다 보니 이제는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마이코닉스에서 일을 할 때도 이 골칫덩이가 옆에 있을 걸 상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따름이다. 그래도 캐릭터 분석이라니 감수해야 하리라.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런데 예상 밖의 손님을 한 명 더 만나게 되었다.
[모험과 환상의 세계로 렛츠~고!]
펜트하우스의 문을 여는 순간.
[대장~!]
하나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골칫덩이가 두 배로 늘어났다.
[에밀리? 여기는 어떻게 왔어?]
[우와~ 대장 진짜 너무하네. 그렇게 오랜만에 와 놓고는 왔다고 나한테 연락도 없어?]
2002년 스쿨 오브 밴드로 영화에 데뷔하고 꾸준히 영화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높인 에밀리. 그녀는 이제 한국 나이로 20살, 미국 현지 나이로는 18살이 됐다.
이런 에밀리의 등장에 알버트 역시 놀라워했다.
[이런, 이런, 이런! 이게 누구야? 엠마 스틴 아니야?]
[에?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
[오? 날 아네. 이야~ 요즘 떠오르는 배우께서 나를 알아봐 주시네. 근데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
[그러는 아저씨는 우리 대장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인데요?]
[어흠. 우리로 말할 거 같으면 앞으로 함께 동고동락하며··· 으악!]
아무래도 저 입에서 굉장히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올 거 같아 매우 부드럽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중단시켜버렸다.
[이번에 같이 영화 만들기로 했어. 동업자야.]
[아! 영화! 대장이 회사 인수했다고 하더니 이제는 직접 영화 만드는 거야? 그럼 내가 거기 출연할까? 나 이래 봬도 이제 꽤 잘나가는 스타야~]
옆에서 옆구리를 매만지며 알버트가 뭐라고 계속 구시렁거리고는 있었지만 빠르게 치고 나온 에밀리 덕분에 그의 말은 다 가려지고 말았다.
수다를 누르는 것은 더 큰 수다였나보다.
< 고급 시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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