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급시계 >
[그렇습니다만, 문제가 있습니까?]
[있죠.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대체 어떤 것이 문제가 있다고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지금 회장님은 이번 영화 제작을 위해서 바벨이 대출받을 때 계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당 대출 계약을 동일하게 승계받으셨습니다.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바벨 엔터프라이즈에서 받은 대출금은 무려 5억 달러가 넘는다. 굳이 이 돈을 갚으려고 하면 충분히 갚을 여력이 있지만 그러지는 않은 상태다.
‘영화를 제작하고 그 수익을 통해서 천천히 갚아도 되는 돈이니까.’
미리부터 갚고 빠듯하게 영화를 제작할 필요가 없다 싶어서 그대로 승계한 것이다.
[대출에는 판권에 대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8년 이내에 10편의 영화를 제작할 것. 그리고 10편 안에는 캡틴 실드와 천둥 군주, 앤트 가이, 블랙 레오, 디펜더즈 오브 갤럭시, 닥터 스티브레인지, 마지막으로 리벤져스가 포함되는 것으로 계약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라이언 맨은 없죠.]
안다. 당연히 전부 만들어 낼 거니까 딱히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고.
‘물론, 이 계약이 정신 나간 계약이기는 해.’
8년간 10편의 영화 제작!
‘라이언 맨이 망했다면 절대 저 계약을 다 이행하지 못했을 거야.’
꿈속 미래에서도 첫 스타트가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BCU는 정말로 한낱 물거품으로 변했을 게 자명했다.
아무튼, 여기까지 듣고 저들의 의도를 알았다. 나는 말을 끊으며 먼저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오해라니요? 이미 라이언 맨으로 배우도 캐스팅하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듣고 왔습니다만?]
[아, 그건 오해가 아니죠. 저희가 제작하는 첫 영화는 라이언 맨이 맞습니다.]
[그럼 뭐가 오해라는 거죠?]
[지금 말씀하신 영화들이 총 몇 편입니까?]
[일곱 편입니다.]
[맞습니다. 일곱 편이죠. 계약상 영화는 몇 편이었지요?]
내가 재차 짚으니 저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성공할지 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계약에도 없는 영화를 먼저 찍고 그 다음에 다른 영화를 찍을 거다··· 그런 겁니까?]
[정확하군요. 바로 그겁니다. 라이언 맨을 찍고 성공한 뒤에 나머지 영화도 전부 찍을 겁니다.]
[저희보고 그걸 그냥 받아들이라는 겁니까?]
한심하다는 투의 저들에게 나는 냉소를 지었다.
[그럼 납득하셔야지요. 뭐, 어쩌실 겁니까?]
[예?]
[이보십시오. 우리가 계약을 위반한 것도 아니고 위반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계약대로 전부 진행 할 거니까요.]
[오히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투자사로써 이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충분히 설득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투자자의 정당한 권리가 사용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겁니다.]
너무나도 태연한 내 태도에 화가 난 것인지, 메릴리치의 담당자가 붉게 상기 된 얼굴로 약간은 과잉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전부 보고 있는 루카스 다스포네 부사장에게 흡족한 미소가 지어진다.
‘저 새끼가 원흉이군. 역시, 같이 올 때부터 영 마음에 안 들더니만.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걸 목적으로 이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이거지?’
하지만 저놈은 너무 일찍 축배를 들었다. 적어도 자신이 계획했음을 숨기는 정도의 기본은 지켜야 내 분노를 사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나도 확실하게 결정했다.
‘저놈은 계속 같이 갈 필요가 없어.’
내가 착한 놈이기는 해도 이런 짓까지 벌인 놈을 용서할 정도로 무르지는 않다.
[라이언 맨이 성공하고 우리가 남은 영화의 제작 약속을 전부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만 하면 된다, 이겁니까?]
[그렇습니다. 가능하시다면!]
[글쎄요.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쉬운 일이군요.]
[뭐요?]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내 태도가 작금의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생각을 하는 것인지 메릴리치의 담당자는 이맛살을 제대로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부사장 못잖게 이 새끼도 밉상이네. 너는 이름이 뭐냐?’
아마도 당분간 담당자가 바뀔 일은 없을 거 같은데, 영화를 성공시킨 후에는 기필코 이 담당자 역시 내쫓고 말겠다.
‘나중에 명함이나 한 장 더 받아두자.’
나는 갚아준다면 갚아주는 남자다. 단단히 새겨뒀으니 네 직장 커리어는 반드시 잘라주고 말리라.
“최 대표님.”
“네, 회장님.”
내가 대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최종인 대표는 직접 나서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살벌하게 눈싸움 중이던 그는 내 부름에 금방 표정을 풀고 시선을 돌렸다.
“제가 부탁드렸던 것 말입니다. 다 완성됐다고 하셨죠?”
“네. 가져올까요?”
“바로 부탁드립니다.”
손님들이 있는 자리에서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것은 매우 실례가 되는 행동이나, 내가 지금 이들에게 그런 것들을 전부 배려해 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잠시 그가 나간 뒤 내가 저들에게 말했다.
[보여드릴 게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지요. 저희 직원이 금방 가지고 올 겁니다.]
잠시 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직원 한 명이 사무실에 들어와서는 두꺼운 스케치북 다섯 권을 내 앞에 두고 나갔다.
[그게 뭡니까?]
[당신들을 이해시킬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스케치북들은 기존에 바벨 영화 제작위원회에게 보여주었던 어설픈 바벨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기본 스케치를 조금 더 디테일하고 전문적으로 다듬은 것이었다.
[죄송하지만, 이게 아직은 하나밖에 없어서 같이 보면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지요?]
[그러시죠.]
기본적으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지금까지 보이던 당당한 태도가 이 스케치북 덕분에 보일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챈 지금 저들은 ‘스케치북에 어떤 내용이 있는 걸까?’라는 부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점을 나는 눈여겨보았다.
‘완벽하게 비즈니스적인 태도를 보이는 거로 봐서는 저들 전부가 내 뒤통수를 치려던 건 아닌 것 같군.’
모두가 루카스 다스포네 부사장이랑 뒤에서 작당 모의를 한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적당히 이런 정보만 주면 알아서 나를 내쫓아낼 수 있으리라고 예상한 루카스가 딱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투자은행 담당자들을 움직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나를 이토록 적대하는 걸까?
‘모르지. 제이콥 펠무트처럼 백인우월주의인지, 이래저래 나서는 내가 꼴사납게 여겨졌는지.’
중요한 건 나를 왜 미워하느냐에 대한 고찰이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저따위 녀석을 내 주위에서 치워버리는 게 중요할 따름이다. 이를 위해서 내가 말했다.
[영화는 각 단계마다 페이즈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 시작은 당연히 페이즈 1입니다.]
「Babel Cinematic Universe Phase 1
Rion-man, Hulker, Thunder Lord, Captain shield, Revengers」
[보시는 바와 같이. 저희는 그냥 이 영화를 내고, 저 영화를 내고 그러다가 ‘잘 되면 뭉치자.’라는 식이 아닙니다. 확실한 순서와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각각의 슈퍼히어로들의 스토리 속에서 아주 사소한 이벤트들이 모이고 결국, 리벤져스라는 대형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구조로 준비했습니다.]
바벨을 인수하고 아직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고는 절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치밀한 구성.
이 구성을 확인한 투자은행의 담당자들은 더 이상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굉장히 멀리까지 보고 계획을 짜고 계셨군요. 하지만 저희가 보기에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바로, 라이언 맨이 가지고 있는 인지도의 문제입니다. 또한, 여기서 헐커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인지도를 보유한 캐릭터 역시 전혀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역시도 해결을 위한 준비 과정에 들어가 있습니다.]
[해결을 위한 준비 과정?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어차피 지금 당장은 저희가 소유하고 있는 판권으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인지도의 캐릭터를 활용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다들 건망증 환자마냥 다 알고 있는 걸 다시 말하게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인기 캐릭터는 바벨의 손에 없다. 어차피 소유한 판권이 다 고만고만한데 그걸 가지고 왜 투닥거리는 지 이해를 못 하겠다.
[지금 라이언 맨의 애니메이션을 마이코닉스에서 제작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제작 기간이 꽤 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거야 어떤 퀄리티로 제작하느냐의 차이죠. 이건 기본적인 광고만 붙이고 무료로 풀게 될 애니메이션이라서 딱히 퀄리티가 높지는 않습니다.]
[퀄리티를 낮춘 애니메이션이 인기가 있겠습니까?]
[집에서 가볍게 보는 것에는 퀄리티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용만 재미있으면 되고 라이언 맨만 멋있어 보이면 충분하지요.]
[꽤나 자신하고 계시는군요.]
[그거야 결과를 두고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또한, 우리의 대화에서 정말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 영화가 계약대로 계속 만들어지느냐 아니냐지요.]
[윤 회장님. 우리는 주주입니다. 바벨의 주가 회복까지 고려해야 하니 대출 계약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난처해하며 말하는 모습에 나는 내심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다 말하던가.’
아무튼,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귀찮게 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확신을 줄 만한 어떤 카드가 한 장 더 있으면 좋을 시점이다.
‘문제는 준비한 패는 여기까지였다는 거지.’
내가 계획한 만남이었다면 치밀하게 준비했을 텐데, 이번에는 예상 밖이라서 마련해둔 수가 더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뭐가 남았더라? 레이컴이랑 콜라보를 한다고 뭐가 될 것도 아니고. 잠깐만··· 콜라보?’
그러고 보니 바벨과의 콜라보로 아주 큰 시너지를 보일 수 있는 분야가 한 가지 또 있기는 했다. 나는 간단하게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린 뒤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내가 깊게 무언가를 생각하고 또 고민한 뒤에 입을 여는 것이라서 그런지 모두가 내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집중했다.
[바벨의 캐릭터들을 최대한 활용한 AAA급 타이틀 개발에 들어가서 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게임 개발을 시작하면 어느 세월에 게임을 완성해서 어느 세월에 그거로 이익을 얻습니까? 라이언 맨이 개봉하고 성공하는 것이 더 빠른 거 아닙니까?]
[제 예상도 그게 더 빠릅니다.]
[그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저들에게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설득시켜서 되돌려 보내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여러분은 영화가 실패해도 바벨의 주가가 계속 오를 것에 기대를 거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건 맞는데···]
[그러니 영화가 실패해도 수익을 계속 뽑아낼 수 있는 게임을 만들면 됩니다.]
[···가만히 보니 회장님은 뭘 만들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신 것 같군요.]
[이상한 게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입니다.]
[뭐라고요?]
[투자은행이시면 잘 아실 텐데요. GF 그룹에서 개발하는 게임 중 실패한 게임은 없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이 중에 제가 직접 손을 대고서 큰 흥행을 이루지 못한 게임은 더더욱 없습니다.]
지금의 발언 역시도 급하게 떠올리기는 했으나 아주 허황한 건 아니었다. 바로 아이디어를 꿈속 미래에서는 고급 시계로 통했던 노블 와치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밀리터리 FPS가 아니면 통하지 않았던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하이퍼 FPS라는 시장을 만들어 낸 게임이지. 짧은 시간 엄청나게 히트했다가 결국 서서히 내리막으로 가기는 했지만.’
그건 이 게임이 부족해서 아니다. 온라인 게임에서 가장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핵에 대한 대응도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고 본다.
‘그냥 이런 게임이 원래 오래 가기 힘들어.’
그냥 그런 거다. 원활한 관리와 피드백을 통해 전성기를 조금 더 연장할 수는 있을지라도 한계는 명확한 게임이었다. 그러나 딱 2년이면 충분하다.
그 정도만 유지하고 이후에는 새로이 업그레이드된 후속작 개발을 알리며 그렇게 2년씩, 거듭 후속작을 출시하는 식으로 기존의 유저들을 다시 끌어들이면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
< 고급시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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