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급시계 >
[그런데 대부분 이해 못 하는 이런 상황들이 모이고 모여서 어떤 결과가 만들어진 줄 아십니까?]
[그야 모르죠.]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며 과거를 회상했다.
[저는 1999년까지 군인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대다수 남자가 다 군인이었으니 이런 말이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러나 미국은 군인 출신이었다고 말하면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오해하는 한이 있더라도 약간의 존경심을 담아서 보는 편이다.
이들 역시 그저 사업가라고만 생각한 내가 군인 출신이라 말하니 매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전역하는 날, 제 손에는 퇴직금 3만 달러가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겪고 있는 지금의 행동들. 바로 이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짓들 덕분에 수많은 회사를 거느린 오너가 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회사라고 하시면······?]
[오호. 마침 다우니 씨에게 아주 좋은 물건이 있네요.]
[네?]
[다우니 씨 목에 걸려 있는 그거요.]
목걸이형 MP3 플레이어, 스텔라 셔플.
‘역시 글로벌 히트 상품이야.’
때마침 그게 다우니의 목에 걸려 있었다.
[그 MP3를 제작한 회사도 제가 소유한 회사입니다.]
연 매출 100억 달러를 초과하는 대기업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었기에 옆에서 듣고 있던 안토니는 순간 사레가 들린 듯이 기침을 했다.
[여기 옆에 계신 우리 최종인 대표님은 현재 바벨 엔터프라이즈의 회장과 넷플렉스 마이코닉스의 대표를 겸임하고 있으십니다. 마이코닉스는 아시죠?]
셋 모두 영화계에 종사하는 만큼 마이코닉스를 모를 수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전부 다 제가 소유한 회사입니다.]
세 사람은 3만 달러를 가지고 시작해서 불과 7년 만에 100억 단위의 회사를 소유한 회장이 되었다는 말을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인다. 하지만 저들을 이해시킬 필요는 없었다.
결과가 말해주고 현재가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이 모든 성공의 과정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저만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이 수긍하지 못하는 건 제게 전혀 상관없어요. 이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제가 확신한다는 것. 그리고 저는 확신하는 일에 풀 베팅을 하는 성격이지요.]
[그럼 혹시 출연료가···]
[저는 알버트 다우니 당신을 그저 출연료만 받는 배우로 섭외하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닙니다.]
[배우로 섭외가 아니라니요?]
내 말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금은 ‘그럼 그렇지.’ 이런 느낌의 기운을 풍긴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제대로 우리 회사에서 바벨의 영화를 완성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벨을 인수하고 보니 여기에 아주 재미있는 게 하나 있더군요. 바벨 영화 제작위원회라는 건데, 저는 당신이 이 역할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배우가 아니라. 제작자로 함께하자? 뭐 이런 말씀이십니까?]
[이런. 오해하신 모양이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당신을 라이언 맨으로 점찍은 상태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영화제작위원회도 겸하길 원하는 거죠. 이를테면 투잡을 권하는 겁니다. 어떠십니까?]
뜻밖의 말이었던 만큼 단박에 ‘오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가부를 정하기에 앞서서 이해조차 더딜 테니 말이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제안이라서, 이건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든지요. 그리고 추가 제안을 하도록 하죠. 아내분도 영화 프로듀서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넷플렉스로 오세요. 꾸준히 원하는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다우니를 영입하기 위한 조건이라면 자회사 하나쯤은 만들어서 줄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우리는 콘텐츠를 계속해서 기획해나가야 하지 않던가? 이건 자선사업이 아니라 확실한 투자인 것이다.
‘나름대로 둘이서 꾸준한 활동을 해왔다고 들었으니까 능력이야 평균은 되겠지.’
믿는 구석도 있고 말이다.
그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안토니가 먼저 흥분했다.
[하자! 알버트. 이건 기회야! 약물의존증을 이겨내는 널 보고 신께서 주신 기회라고!]
그는 다시 없을 기회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알버트는 친구보다는 옆의 아내를 보았다. 그녀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듯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다.
‘애처가라더니 진짜인가 보네.’
잠시 후 그녀가 물었다.
[알비는 조건이 마음에 들어?]
[나야··· 사실 엄청 고맙지. 그 사건 이후로 누구도 이렇게까지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없었잖아. 당신을 만나기 전이었으면 그냥 무조건 수락했을걸?]
‘저런. 그때라면 내 쪽에서 사절이거든.’
내가 괜히 자회사 하나쯤은 아내에게 마련해준다고 여기겠는가. 미안하지만 그는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결코 약물을 극복하지 못했다. 즉, 저들 부부는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보고 대우해야 한다.
이런 남편의 말에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하자.]
[정말?]
[응. 그래도 조건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
[아. 그렇지.]
이제 내가 말할 턴이다.
[아무래도 최근 활동 때문에 높은 출연료는 못 주는 거 이해하시지요?]
[예, 이해합니다.]
아무리 주인공이고, 남우주연상을 받은 연기자라고 해도 최근 개런티에 비해서 너무 높은 금액을 부르면 도미노 효과로 다른 배우들에게도 높은 개런티를 보장해줘야 하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다.
그러니 아주 높은 개런티는 보장해줄 수가 없다.
[라이언 맨의 출연료는 100만 달러. 그리고 위원회로의 활동에는 연간 30만 달러입니다.]
이는 본래 출연료의 2배다.
‘팬심으로 낭비하는 게 아니야.’
굳이 50만 달러만 주어도 되는데 그 2배를 주는 이유는 마찬가지로 이 바닥의 생리 때문이다. 라이언 맨이 흥행하고 나서 그 이후에 개런티를 올려줘야 하는데 알버트의 개런티 상승폭이 선례가 되어서 다른 배우들도 꽤 높은 개런티 상승을 보장해줘야 됐던 것이 골치였다는 후문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니 많이 주는 게 오히려 아끼는 결과가 된다.
반면, 이런 미래를 알 리 없는 알버트 일행은 놀란 눈으로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왜요? 너무 적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웃으며 하는 말에 안토니가 흥분한 채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생각보다 많아서 놀란 것뿐입니다.]
‘쯧쯧. 좋은 친구일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꼭 조언해줘야겠어. 이런 자리에는 절대로 데리고 나오지 말라고. 어떻게든 개런티를 더 불릴 생각은 안 하고 그걸 가지고 많다는 소리를 하니.’
물론 내 입장에서야 땡큐다. 그렇게 계약서에 도장 찍고 나면 함께 다니지 말고 계약을 위한 매니저를 꼭 구하라는 이야기를 해줘야겠다···라고 생각하다가 얼른 고쳐먹었다.
‘아니지. 그런 건 우리 회사에서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옆에 붙여주는 편이 이득이야.’
아무튼,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잘 협의가 이뤄지었고 양쪽 모두 기분 좋은 얼굴로 계약서의 도장을 찍었다.
[케인. 아마도 위원회 입장에서는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옆에서 잘 케어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자신이 만든 위원회에 내가 사람을 우겨 넣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길게 보았을 때 이것이 훨씬 멋진 BCU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
바벨 엔터프라이즈의 사무실.
일련의 업무를 마치고 최종인 대표와 간단하게 커피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눌 때였다. 그가 이사할 생각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럼 가족들 전부를 미국으로 데려오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아무래도 회장님이 원하시는 것들을 제가 제대로 처리하려면 가족들이 미국으로 오는 것이 낫지 싶습니다.”
“저야 최 대표님이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지만,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 몰라서 가족들에게 미리 운을 한 번 띄워보았는데 다들 왜 이제야 물어보냐 하더군요. 다들 한국보다 미국에서 살고 싶은 모양입니다.”
만면에 지은 미소를 보니 진담인 듯했다.
다행이다. 나 때문에 괜히 희생을 감수하는 건 아닌 듯하니 말이다.
“그럼 집은 여기 뉴욕에 마련하는 겁니까?”
“아뇨. LA에서 생활하려고 합니다.”
하긴 지금 바벨을 맡아서 경영하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핵심 사업은 바벨보단 마이코닉스다. 그리고 나중에 경영자를 바꾼다고 쳐도 바벨이 먼저지 마이코닉스가 먼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니 LA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긴 했다.
‘게다가 바벨 필름스도 사무실이 뉴욕에 있을 뿐, 스튜디오는 캘리포니아에 있잖아.’
이런 상황에 뉴욕에서 생활하는 건 뉴요커를 꿈꾸는 게 아니라면 정말 의미가 없는 선택지였다.
“집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시지요? 가족들과 함께 지내시도록 아파트 하나 비워드릴까요?”
LA와 뉴욕은 모두 집의 가격이 어마어마한 지역들이다. 최상류층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고급주택을 구매한다면 100억 단위의 돈이 우습게 나가고 상류층들의 주택만 해도 10억 단위가 가뿐하게 넘어간다.
최종인 대표도 고액을 받는 연봉자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 있으니 내가 도와주는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그는 생각보다 빠른 남자였다.
“사실 이미 구했습니다.”
“그래요? 가격이 상당할 텐데요?”
“마이코닉스와 가까운 사우스파크 쪽으로 구해서 그리 비싸지는 않았습니다.”
비싸지 않아도 15억은 했을 터.
괜히 나 때문에 부담을 쥐여준 것 같은 기분이다. 씁쓸해하자 그가 아니라며 말했다.
“그런 표정 지으실 필요 없습니다, 회장님. 지금 회장님 덕분에 제 재산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비버리힐즈 최고의 주택도 들어갈 수 있지만 불필요한 것 같아서 저렴한 곳으로 온 겁니다.”
소유한 주식이 600억을 호가하지만, 주식은 현금이 아니다. 그래도 최종인 대표의 얼굴을 보아하니 스스로 지금의 자리까지 일어섰다는 점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에게 미안한 표정을 계속 짓고 있는 것도 실례다.
나는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저도 꽤 책임감이라는 게 생기는데요?”
“에이~ 그러실 필요 없다니까 그러시네.”
“아뇨. 제가 선택을 잘못해서 대표님이 백수가 되시면 큰일 나는 거잖아요. 책임감을 가져야죠.”
“하긴, 그게 맞네요! 기왕 책임감 가지시는 거 부담 없이 비버리힐즈에 갈 수 있을 정도까지 제 재산도 좀 늘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건 이 정도로 안 되죠. 대표님 하시는 거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다시 가볍게 웃으면서 자칫 무거워질 뻔했던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었다. 그즈음, 비서실의 직원이 메시지를 전해왔다.
[회장님. 루카스 다스포네 부사장과 투자은행의 담당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어? 최 대표님 혹시 약속 같은 거 잡으신 거 있으세요?”
“아뇨. 저는 전혀······.”
나도 그런 약속을 잡은 일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말도 없이 찾아오다니?
이건 굉장히 드물고 불쾌하게 받아들여도 되는 경우다. 한국과의 문화차이 중 하나인데 서양에서는 예의를 굉장히 따지기에 이런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찾아왔다고 하는 것을 굳이 막아설 이유도 없다.
[들여보내세요.]
잠시 후, 비서실 직원이 문을 열고 6명의 투자은행 담당자들과 루카스 다스포네 부사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온 무례를 먼저 사과드립니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주 정중하게 사과를 했지만, 이건 정말 미안해서 하는 사과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쪽에서 불쾌감을 표하기 전에 선수 치는 느낌. 즉, 화낼 수 있는 타이밍을 빼앗기 위한 사과였다.
자연히 나 역시 싸늘하게 저들을 보게 된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일단 앉으십시오.]
본래 바벨의 회장이 사용하던 사무실이었기에 아홉 명이 앉아서 회의하는 것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나는 부드럽게 상대할 것 없이 저들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대체 어떤 일이기에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셨는지 들어나 봅시다.]
[이번에 제작하는 영화가 캡틴 실드가 아닌 라이언 맨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판권으로 영화를 만드는데 그것이 캡틴 실드를 만들건 헐커를 만들건 대체 뭐가 문제라고 여기까지 찾아온다는 말인가.
< 고급시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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