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34화 (334/577)

< 고급시계 >

‘물론, 콘 크루즈가 라이언 맨과 아주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양심의 소리가 살짝 항변했는데, 사실 배우 자체로 보자면 그가 라이언 맨을 선택해주는 것에 감사해야 할 판이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라이언 맨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즉, 나의 라이언 맨은 오직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라이언 맨일 뿐!

나머지는 몽땅 사이비다!

‘그뿐이겠어?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고. 몸값이 아예 달라.

본래 라이언 맨이 만들어질 때 주요 배역의 출연료는 토리 스타키 역의 알버트가 50만 달러, 배틀 머신 역의 테러스 하워드가 450만 달러, 페리 포츠 역의 지너스 팰트로는 350만 달러, 제리 브리지스가 250만 달러를 받았다.

이 개런티를 다 합치면 1,100만 달러가 된다.

하지만 콘 크루즈는 달랑 혼자서만도 2,0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몸값의 배우였다.

‘무려 2천만이라니까. 이 사람 혼자가 전체보다 커.’

가치 있는 배우가 가치만큼의 돈을 받아가는 거라면 아까울 게 없다. 그러나 그만큼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 그만한 돈을 사용하는 건 아까운 일이다. 여기에 각본이 쓰레기라서 알버트와 제리가 밤샘까지 하며 쪽대본을 완성하고 그렇게 영화가 완성됐다는 걸 고려해보자.

‘무조건 알버트야.’

콘 크루즈는 절대 이 배역을 맡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실패가 없는 배우로 유명한데, 그런 만큼 대본과 시나리오의 완성도에 민감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힘이 실렸다.

[당신들이 말하는 원작에 가장 가까운 배우가 누구입니까?]

[저희는 콘 크루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미리 받아본 라이언 맨의 시나리오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보세요, 위원회 분들. 당신들은 이 시나리오가 정말로 가망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주연으로는 콘 크루즈? 그가 이걸 정말로 수락할 거 같습니까?]

[그는 라이언 맨이라는 캐릭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충분히 설득이 가능한 배우입니다.]

[좋군요. 설득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왜 20세기 맥스에서는 설득을 못 했을까요? 그리고 콘 크루즈를 섭외하려면 개런티를 얼마나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

[우리 영화의 장점은 배우가 아닌 캐릭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개런티를 주고 콘 크루즈를 캐스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콘 크루즈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흥행 보증의 배우입니다. 또한···]

탁.

테이블을 내리쳤다.

[됐습니다. 여러분들의 시야가 이렇게 좁을 줄은 미처 몰랐군요.]

[뭐라고요? 지금···]

[맞습니다. 시야가 좁다고 했지요. 이보십시오, 당신들은 영화를 이번 한 편만 만들 겁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배우를 섭외하는 일과 관련 없는 소리를 하는군요.]

[관련이 없다?]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 스케치북을 올렸다. 라이언 맨을 처음부터 제대로 된 세계관 짜임새를 가진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 준비해뒀던 것으로 바벨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전체 구상이 담겨있는 스케치북이었다.

‘이걸 기억하려고 오래간만에 명상을 미친 듯이 했었다고. 꿈속 미래랑 현실이 헷갈릴 정도로 기억 속을 탐방하고 다녔단 말이야.’

그래도 결과물은 훌륭했다. 라이언 맨으로부터 시작하는 다양한 영화들의 연결고리와 그것으로 하나가 되는 리벤져스6까지의 과정을 스케치북에 담은 것이다.

이것이 저들을 설득하는 내 비장의 한 수다.

[라이언 맨은 바벨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첫 작품이 될 겁니다. 그런데 콘 크루즈요? 그가 여기부터 참여하게 될 영화가 몇 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다 참여하면 출연료는 얼마나 될 거 같습니까?]

[그··· 그건, 일단 라이언 맨이 성공한 후에나 생각할 일이지 아직은 이릅니다.]

[성공하면?]

[네?]

[성공하면 그때는 어떡할 겁니까? 그제야 부랴부랴 세계관을 만들고 뒤늦게 감당 안 되는 출연료에 머리를 쥐어짜며 후회할 겁니까?]

[그게······.]

[이런 건 원래 당신들이 먼저 생각하고 준비해서 내게 가져와야 했던 겁니다. 당신들의 존재 목적이 이거 아니었냐는 말입니다. 어설프게 배역에 누굴 뽑느니 마느니가 아니라!]]

오늘 역시도 꿈속 미래의 지식을 토대로 화끈하게 주장했다.

[······.]

그제야 위원회의 사람들이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고양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어조로 바꾸었다.

[바벨의 세계관과 스토리에 관한 건 여러분이 저에 비해서 몇 배나 월등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쏟지 말고 제가 드린 스케치를 줄기 삼아 더욱더 완벽한 세계를 만들어오도록 하세요. 그리고 케인 파이기 사장.]

[네, 회장님.]

[당신은 남아서 저와 대화를 좀 더 나눕시다.]

뒤이어 다들 회의실에서 일어나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케인 파이기 사장은 혼자만이 딱딱한 표정으로 자리에 남았다.

[긴장 푸세요. 나무라거나 그러려고 남으라고 한 게 아니니까.]

[예!]

아직은 우리 사이가 친해지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감독은 정해졌습니까?]

[정해져 있습니다.]

[누구죠?]

[론 패브로라는 감독인데 그··· 유명한 감독이 아니라서 잘 모르실 겁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론 패브로 감독이 라이언 맨으로 누굴 원하는지 알아보세요.]

[네? 회장님이 이미 배역을 정하고 계신 것 아니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제가 배우들과 무슨 친분이 있어서 미리 정했겠습니까? 저는 감독이 마음에 들어 하는 배우가 누구인지,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만 판단할 겁니다.]

그 말에 케인 파이기는 약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진작 알았다면 오늘의 이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소심하게 항변하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주저하다 말했다.

[그게, 감독은 이미 원하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이미 있다고요? 그런데 왜 아무런 보고가 없었습니까?]

[아무래도 배우에게 조금 문제가 있어서······.]

[제가 분명히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판단은 제가 합니다. 우선 보고부터 하세요.]

[죄송합니다.]

[그래서 배우가 누구죠?]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입니다. 아십니까?]

‘물론이다마다.’

원하는 이름이었다.

[그 배우라면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라이언 맨으로 어울리는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거든요.]

[아! 정말이십니까?]

나 역시 그를 점찍었다는 말에 반색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그도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위원회의 반대가 심해서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네. 하긴, 원래도 알버트가 라이언 맨이 되었었으니까.’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아니었다면 바벨은 펠무터가 운영했을 테고 그라면 특유의 짠돌이 기질을 발휘해서 값비싼 콘 크루즈보다는 거의 떨이나 다름없는 출연료로 섭외 가능한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선택했을 테니 말이다.

연기력이나 개인 사정을 논외로 치고 오직 돈만 봤을 때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매력적인 배우였을 것이다.

[그와 따로 미팅한 적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좋군요. 제가 직접 만나서 미팅을 할 생각이니까 자리를 한 번 마련해 주세요.]

이번에는 ‘왜?’라는 반문이 나오지 않았다.

[언제쯤으로 시간을 잡으면 되겠습니까? 또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장소야 뉴욕이든 LA이든 편한 곳에서 보도록 합시다. 시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군요.]

내가 직접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만나려는 이유는 별거 아니다.

그를 온전히 바벨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다.

*

별다른 생각은 크게 하지 않았다. 그냥 할리우드의 배우니까 당연히 LA에 살고 있을 거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 알버트 다우니 주이어의 주소지는 뉴욕이었다.

최근에는 재기를 위해 꽤 성실하게 활동하고 있던 그는 시간의 여유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중요하다고 여겼는지 모르겠으나 바로 다음 날, 바벨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왔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많아?’

부른 사람은 한 명인데 온 사람은 세 명이다. 우리도 나와 케인, 최종인 대표를 포함하면 셋이니 삼 대 삼으로 어찌어찌 숫자는 맞게 되었다만 말이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버트 다우니입니다.]

[반갑습니다. 윤태식입니다.]

함께 온 사람들에 대한 소개를 받았는데 하나는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 꾸준히 그의 활동을 위해 도움을 주고 있는 배우 안토니 마이클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내, 사라 레빈 덕이었다.

‘이런. 다시 재기해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길래 그래도 기본 구색은 차려진 줄 알았는데.’

친구와 아내를 대동해서 온 걸 보면 아직 매니저도 없는 모양이다. 이런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안토니가 먼저 말했다.

[단체로 와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 친구가 이런 부분에서 영 못 미더워서요.]

정중한 그의 사과에 나 역시 대답했다.

[손님을 불러두고 혼자 생각에 빠져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래, 혼자면 어떻게 셋이면 또 무슨 상관이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제가 알버트 다우니 씨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짐작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설마, 정말로 이 친구를 라이언 맨으로 섭외하시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배우였다면 어느 정도 밀고 당기기도 하면서 누가 더 아쉬운 입장인지 확인하고 몸값 조정을 위해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흥행 보증수표인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니던가! 그에게는 전혀 그런 해당 사항이 없다.

자고로 목마를 때 물을 시원하게 탁 내줘야 인상이 깊게 남는 법!

‘이때 먼저 확신을 주고 제대로 손을 내밀어서 내 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이 굳이 미리 약속을 잡은 이유다.

[어······.]

[음······?]

[그··· 렇군요?]

이들도 솔직히 ‘긍정적으로 검토 중입니다.’라는 식의 대답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빙 돌려 말하지 않고 내가 확답하니 오히려 더 당황하고 있다.

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게··· 저··· 이 말이··· 혹시나 오해를 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요. 인종차별의 발언이 아니라 정말로··· 그냥 혹시나 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그··· 미국분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오신 분 같은데, 여기 이 친구. 그러니까 알버트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것 맞으시죠?]

친구를 도와주러 왔다는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대리인으로 계약에 도움을 주려고 왔으면서 자기들 쪽 치부는 왜 스스로 밝혀? 상대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옳다구나 하고 계약을 덥석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은 그다지 순박하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예상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괜찮다. 저들은 사기꾼이 아니라 나를 만났으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약물 의존증 때문에 꽤 오래 고생을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런데도 이 친구를 섭외하신다고요? 1억 달러짜리 영화에 주연으로요?]

[이런, 곤란하군요. 사기꾼 같습니까? 그럴까 봐 일부러 여기 바벨 엔터프라즈 사무실로 모신 건데도 별 효과가 없나 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좀 이해가 안 돼서요.]

주절주절 말을 이어나가려는 그에게 잠깐 멈추라며 손바닥을 보였다.

[마이클 씨.]

[네.]

[지금 여기 다우니 씨의 대리인 역할로 오신 것 맞습니까? 계약을 막으러 오신 게 아니라?]

[아···!]

그제야 안토니 마이클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주먹 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우리의 주인공을 보고 말했다.

[다들 알버트 다우니씨의 약물의존증 때문에 크게 우려를 표하더군요. 그런데도 섭외하려는 건 저는 당신이 이번에야말로 마약을 극복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믿어주신다고요?]

자리에 와서 처음 소개할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그의 입이 열렸다.

[네. 그러니까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죠. 단순히 믿는 게 아니라 당신의 의지와 재능을 매우 높이 사고 있습니다.]

이건 그냥 그를 꾀어내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진심으로 약물을 극복한 그의 의지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중독이라는 게 쉽게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는 종류였다면 세상 수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못 벗어날 리가 있겠는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익숙합니다. 제가 뭐 좀 제대로 하려고 하면 다들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내 말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최종인 대표가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그 옆에 있던 케인 파이기 사장은 아직 이걸 이해하기에는 함께한 기간이 짧아서인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최종인 대표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 고급시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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