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32화 (332/577)

< 라이언 맨 >

“강자에게 노려진 약자의 신세는 그저 애처롭지.”

슬쩍 바벨을 보고 돌아간 지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펠무터는 결국, 버티다가 더는 버틸 수 없어졌고 라드 헤이스터에게 먼저 연락을 해왔다.

[이제는 지분을 전부 넘길 마음이 드신 모양이죠?]

[그렇네.]

패배한 장수답게 다소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에 그가 펄떡 뛰고 말았다.

[2억 5,000만 달러.]

[뭐? 2억 5,000만?!]

세상에 이토록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싶다.

[아니! 이봐! 내가 보유한 지분이 무려 25%야! 그런데 이걸 고작 2억 5,000만 달러에 넘기라고? 지금 시세대로만 해도 3억 달러는 족히 돼! 게다가 경영 프리미엄까지 생각하면 4억 달러는 받아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경영 프리미엄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들의 투자사와 이야기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당신도 그 투자자들이 물러나라고 합의하면 당장 물러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그건!]

[게다가 지금의 시세는 3억 달러 정도 하는 게 맞기는 합니다만, 글쎄요. 우리가 더 시간을 끌면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과연 얼마까지 떨어질까요?]

혈압이 치솟아서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였다. 펠무터 회장은 진심으로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비즈니스의 세계는 잔인하리만큼 냉혹하다. 라드 헤이스터스는 상대방의 건강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네가 가진 패는 그게 전부냐? 그럼 죽어라.’라고 촉구했다.

[2억 5,000만은 절대로 적은 돈이 아닙니다. 원래 투자하신 돈이랑 비교하면 엄청나게 벌어들이신 거 아닙니까?]

‘이 빌어먹을 놈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를 뿌드득 갈 만큼 억울하지만 말만 따지고 보면 전혀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이익은 이익이고 2억 5,000만 달러는 큰돈이기는 하니까. 그저 쥐고 있던 광산을 어떤 놈이 홀랑 뺏어가며 황금 한 주머니를 적선하듯 던져주는 모양새가 미치도록 화가 날 따름이다.

그러나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짜증나는 저 입술을 한껏 때려준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 것을!

[제길······.]

결국, 펠무터는 2억 5,000만 달러에 자신이 가진 모든 지분을 넘겼다. 그리고 언제 문제가 생겼냐는 듯이 빠르게 은행들과 업무 협약이 이루어졌고, 바벨은 빠르게 사업을 복구해 나갔다.

뒤이은 절차는 윤태식 회장이 등장하며 무시무시한 칼날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대번에 이전 경영자들이면서 그의 판단으로는 회사의 미래에 일절 도움 되지 않는 제이콥 펠무터와 하비 하라드를 회사에서 반론의 여지 없이 내보냈다.

“당장은 최종인 대표께서는 바벨과 마이코닉스 둘을 모두 맡아주십시오.”

“예, 회장님.”

그는 이제부터 바벨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이자 마이코닉스의 대표, 넷플렉스 이사회의 이사라는 역할을 모두 소화해야만 하는 중임에 올랐다.

“그리고 바벨 필름스에 보면 케인 파이기라고 있을 겁니다. 바벨 필름스의 대표는 그에게 맡기고 앞으로 바벨의 영화 역시도 케인 파이기가 총괄할 겁니다.”

곽지원 부사장이 바로 우려감을 보였으나 윤태식 회장은 단호했다.

“회장님. 원래 바벨 소속이었던 자에게 영화를 다시 맡긴다니요?”

“괜찮습니다. 시나리오든 뭐든 앞으로 제가 다 확인합니다. 바로 제가 컨펌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성해주십시오.”

상식적으로 조직 구도상 한참 아래에 있는 자회사 따위의 컨펌을 회장이 곧바로 하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다.

하지만 정상이라 자부하는 라드 헤이스터스와 이들에게는 차이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회사가 동양식 군주제처럼 돌아가는군. 자기 사람에게만 지나치게 막중한 권한을 주고.’

그가 지시하면 따라야 한다!

저들은 잘 모를 테지만 그의 눈에는 흡사 왕의 지시를 따르는 신하처럼 보였다.

132. 라이언 맨

LON 온라인으로 시작해서 넷플렉스와 바벨 엔터프라이즈까지. 게임 흥행시키겠다고 시작한 일이 꽤나 커져 버린 덕분에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적응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새로이 업무가 추가된 일상에 자연스럽게 젖어 들었고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이 있을 즈음, 곽지원 부사장이 소일거리처럼 내게 말했다.

“바벨에서 제작할 새로운 영화에 대해서 제법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영화요?”

금시초문이다. 내가 깜빡한 게 아니라 정말로 아는 바가 없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는 당연하다며 대답했다.

“아직 무엇을 영화로 제작할지 의견이 합쳐지지 않으니까 보고를 올리지도 못하고 있을 겁니다.”

시시콜콜하게 진행 상황을 일일이 회장에게 보고할 이유가 없기는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적어도 바벨은 이러면 안 돼.’

일반적인 회사라면 그렇게 진행하는 것이 맞다. 내가 일일이 ‘이 프로젝트는 이렇게 하고 저 프로젝트는 저렇게 하세요.’라며 지정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바벨은 아직 그 단계가 아니다.

“아무래도 뉴욕을 다녀와야겠습니다.”

“왔는가 싶더니 또 출장이군요.”

우스개로 앓는 소리를 하기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곽지원 부사장이 내 비서도 아니고, 이런 일에 일일이 다 따라다닐 이유가 없다. 그는 그대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자 허리마저 두드리며 바쁜 제스처를 취했던 그가 이야기했다.

“회장님. 점점 감당해야 할 업무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옆에서 회장님을 전담하여 케어해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GF 정도 규모의 회사 오너가 옆에 두고 있을 사람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기업이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그 덕분에 차근차근 키워서 함께 갈 인재를 만들지 못했다는 단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런 업무를 그냥 경력만 보고 덜컥 뽑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신입을 데려다가 키울 수도 없는 노릇. 어쩔 수 없는 게 이제 내 옆에서 보조를 제대로 하려면 대량의 정보를 다룰 수 있어야만 하는데 그런 신입이 존재할 리가 없다.

일선에서 빡빡 제대로 굴러본 사람이어야만 한다.

“저도 요즘 그런 걸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을 좀 구해주시죠?”

그런 인재가 어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질 리가 없으니 발 넓은 곽지원 부사장에게 우선 맡길 수밖에.

“예, 다녀오시는 동안 알아보겠습니다.”

믿음직한 그의 답변을 듣고 나는 재차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화가 메인이라면 할리우드가 있는 LA에 본사를 두는 것이 좋다. 하지만 바벨의 메인은 어디까지나 코믹스다. 그 때문에 뉴욕에 자리 잡은 바벨 엔터프라이즈를 옮기는 건 그다지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다만, 마이코닉스나 넷플렉스와의 거리가 너무 먼 게 흠일 뿐이지. 누가 대국 아니랄까 봐 미국에만 오면 이동에만 시간을 얼마나 허비하는 지 모를 지경이야.’

합리적인 건 둘째치고 내가 피곤해서 안 되겠다. 바벨 전체를 옮기는 건 곤란하겠지만 최소한 바벨 필름스 만큼은 LA로 옮길 수 있도록 조처해야 할 것 같다.

이동 중에는 즐거운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사실 저들이 어떤 영화를 제작할지에 두고 다투는 지는 내 알바가 아니다. 이미 정답은 꿈속 미래지식을 통해서 나와 있었고 그 작품은 우리의 변신 로봇! 갑부 공돌이가 직접 만든 라이언 맨으로 정해져 있었으니까.

과거에는 보면서 마냥 즐거웠던 작품을 지금은 개입하며 손수 퀄리티를 높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대성공을 이룬 현재의 내가 누리는 최고의 기쁨일 것이다.

하지만 ‘즐거운 영화 이야기를 나누고 와야지~’라는 심정으로 도착한 뉴욕에서는 내 기대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설전을 벌이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라이언맨이 아예 없어?’

바벨 내부에서의 열띤 토론은 ‘캡틴 실드를 만듭시다!’와 ‘버그 맨이 더 낫습니다!’였을 뿐이었다.

“최종인 대표님.”

“네. 회장님.”

“정말 이 둘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실망한 어조에서 내 심정을 벌써 읽은 것일까. 최종인 대표 역시 멋쩍어하면서 자신 없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모르시겠다고요?”

“바벨이 소유한 캐릭터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다 보니 각 팀장들의 의견을 존중하려고는 하는데···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의견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아차!’

그제야 알았다.

이건 확실히 내 잘못이다. 문외한이야 애니메이션을 하나로 뭉뚱그릴 테지만 엄연히 세분화된 장르가 있는 법인데, 이쪽 분야를 잘 모르는 최종인 대표에게 일을 맡겼으니 말이다.

“이 부분은 제가 확실하게 처리해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거듭되는 사과에 나는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밝히며 조용히 기억을 되짚었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라이언 맨에 대한 꿈속 지식을 토대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최대한 유추해야 했다.

‘본래도 바벨에서 라이언 맨을 선택하기까지 많은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는 했었지.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이 과정에서 패배한 하비 하라드가 퇴사를 하게 되고.’

이런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재해석하면 원래 라이언 맨도 지지자가 있기는 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잠재된 목소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닐 테고, 다음은 캡틴 실드가 아니라 라이언 맨을 제작하도록 어떻게 유도하느냐는 건데.’

한국이었다면 ‘이거 만듭시다.’라는 말로 해결할 수 있지만 이곳은 미국이다. 나는 전달방식을 고민한 뒤 한 사람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케인 파이기.

현재 바벨 필름스의 수장으로 있으며 앞으로 바벨 유니버스로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화계 인사가 될 인물이다. 하지만 아직은 이뤄지지 않은 미래였기에 지금의 그는 경직되고 살짝 주눅 든 태도를 보였다.

이런 마당에 내가 어떤 사안을 짚을지 모를리 없다.

[아직 어떤 캐릭터를 영화화할지 못 정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금방 의견을 합칠 수 있습니다!]

‘어이쿠. 대성박력이네.’

굳이 뉴욕까지 와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에서 부담을 느꼈는지 그의 목소리는 실로 우렁찼다.

[질책하려고 찾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에 그는 다른 의미로 움찔했다. 질책이 아니라면 영화로 만들 캐릭터를 정하러 왔다는 것인데 케인 파이기의 입장에서는 그게 더욱 곤란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마냥 돈만 많은 사업가가 자신들의 일에 간섭하는 거로 느껴지겠지.’

물론, 나는 권력을 한껏 아껴두고 쓰지 못한 채 당하는 멍청이가 아니다. 최악의 상황이면 최대 주주이자 회장이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라이언 맨을 영화로 만들어!’라고 찍어 누를 용의가 있다.

그러나 아직은 다른 대안이 많은 시점이다.

‘이미 원래 이 사람들이 했던 좋은 방법마저도 있잖아.’

자고로 힘은 쓰지 않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파이기 사장.]

[네. 회장님.]

[바벨의 주요 수익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굳이 이것을 다시 인식하게 함으로써 다음에 이어질 나의 오더를 바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질문이다.

[코믹스 판매와 영화 수익, 마지막으로 2차 상품 수익이 있습니다.]

자잘하게 나누자면 더 많지만, 일단 핵심은 이 세 가지다.

[영화 수익은 번 돈 보다 날린 돈이 더 많은데 끼워 넣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뺄 수도 없는 수익이군요.]

[······.]

이건 바벨 필름스의 사장으로 아무래도 고개 들고 대답하기가 곤란한 말일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까지 영화에 투자를 제법 많이 한 편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은 이미 할리우드에서 영화 투자자로 가장 유명하신 분 중 한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경계의 눈빛을 보이는 거로 봐선 시나리오를 보는 능력은 인정하지만, 영화 캐릭터를 고르는 능력은 아직 인정 못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게 맞을 것 같다.

‘상관없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알고 있으시니 이야기하기는 쉽겠군요. 영화라는 건 말입니다. 진짜 좋은 영화라도 때를 잘못 만나면 그냥 망합니다.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무언가 하나가 삐끗하면 망해요.]

[저기··· 듣기로 회장님이 영화에 투자하시고 실패한 영화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까?]

[일반적으로 큰돈을 투자해서 제작해야 하는 영화들에는 실패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저예산에서는 실패한 작품들이 좀 됩니다.]

독립영화야 애초에 성공이다 실패다의 구분이 모호한 것들이니까 따질 수가 없고, 저예산 영화는 내게 익숙하고 꽤나 명작이라고 잘 알려진 작품들을 골라서 투자했었다. 그러나 유명하다고 하여 그게 다 흥행한 건 아니었다.

< 라이언 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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