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30화 (330/577)

< 미디어 네트워크 >

‘거참. 백인우월주의자라니.’

다시 그의 말을 되뇌며 물었다.

“그럼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겁니까?”

“적대적 M&A를 하는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하는 인수합병은 80% 정도의 높은 확률로 실패합니다.”

“펠무터 회장이 가진 지분이 어떻게 되지요?”

“바벨의 현황을 확인한 결과 최대 주주인 제이콥 펠무터의 지분이 25%이고 6개의 투자은행이 60%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투자은행의 지분이 상당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투자은행만 잘 설득하면 경영권을 차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려울 겁니다. 바벨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펠무터 회장이 경영권을 꽉 잡고 있을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고 있어왔으니까요.”

“그거야 펠무터가 자신들에게 충분한 수익을 줄 거라는 확신을 주고 있을 때의 이야기지요.”

찔러볼 구석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맞습니다. 은행으로서야 자신들이 이익만 볼 수 있도록 해준다면 누가 경영을 해도 상관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펠무터 회장은 그 이익에 매우 충실한 경영인입니다. 파산 직전의 회사를 가지고 연 1억 달러의 수익을 남기는 제법 튼실한 회사로 이끌었지요.”

은행이 펠무터에게 보이는 호의적인 태도는 내가 가늠하는 것 이상이라고 했다.

‘확실히 적자였던 회사를 흑자로 그것도 1억 달러의 흑자로 만들었다는 건 굉장한 성과지.’

하지만 어디에나 틈은 존재하는 법이다. 나는 엘렉트로가 흥행에 참패했었다는 이야기를 되새기며 잠시 곽지원 부사장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헤이스터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엘렉트로가 참패했을 때의 제작비와 수익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예. 제작비 4,000만 달러에 흥행수익 5,600만 달러입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1,600만 달러가 얼핏 많다 여겨질 수 있으나 업계에서는 이런 말이 흔하게 퍼져 있다. ‘제작비의 두 배가 곧 본전치기’라는 것이다. 즉, 엘렉트로는 그에 한참 못 미치는 금액이니 막대한 손해를 감수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사업에서 상대방의 손해는 곧 나의 호재와도 같다.

“입가의 미소를 보아하니 통화 내용이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아주 마음에 드네요.”

“어떤 내용인지 저도 좀 알 수 있겠습니까?”

“바벨에서 최근에 개봉한 영화가 4,000만 달러에 제작했는데 흥행수익은 5,600만 달러에 불과했다는군요.”

내 말을 듣고 그 역시도 옅은 웃음을 지었다.

“부사장님. 바벨은 망했다가 회생한 지 얼마 안 되는 회사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사에서 4,000만 달러나 투자해서 영화를 제작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영화야 투자를 받으면 되는 거니까요.”

그걸 모르는 게 아니다. 일반적인 회사라면 곽지원 부사장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투자를 통해 영화를 제작한 게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

‘조금씩 파편처럼 잘게 흩어졌던 기억들이 뭉쳐지고 있어.’

지난 회의 때에만 해도 기억하지 못했던 정보들이 바벨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할수록 모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바벨이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이는 축약하면 ‘배 아파’였다.

‘스파이더 가이가 무려 8억 2,000만 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렸지만, 그 수익 중 바벨의 몫은 고작 700만 달러였지.’

당장 눈앞에서 자기들의 캐릭터가 엄청난 돈다발을 만들어내는데 정작 원래 주인이었던 자신들은 그중 지폐 몇 장만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어찌 배가 아프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래서 직접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생겼다.

‘투자받아서 남의 돈으로 제작하면 달라지는 게 전혀 없잖아.’

심지어 다른 영화사에 판권을 주고 제작하면 실패의 리스크도 없다. 반면, 직접 제작하면 없던 리스크마더 생겨버리는 꼴이다. 이득을 보기 위한 도전이 아니라 바보 같아지는 결말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이 정보를 알고 있기에 나는 곽지원 부사장에게 주문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영화 투자의 형태는 아니었을 겁니다. 이에 대해서 알아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잠시 혼자 커피 한잔하고 계시면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약 15분 정도면 알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곽지원 부사장은 15분도 아닌 1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되돌아왔다.

“생각보다 훨씬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메릴리치에 캡틴 실드와 록 퓨리를 담보로 넘기고 영화 촬영을 위한 자금을 대출받았다고 합니다.”

‘역시.’

자금이 없는 바벨이 영화를 제작하고 그것이 흥행했을 때 최대한으로 이익을 얻을 방법은 이것이었다. 내 표정을 보고 곽지원 부사장이 말했다.

“대출을 받아서 제작했을 거라고 이미 확신을 하고 계셨군요.”

“판권만 넘겨도 영화가 흥행하면 크게 이득을 남길 수 있는 회사입니다. 그런데 굳이 직접 영화를 제작했다? 이런 회사에서 투자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뭐, 이런 예상이야 아무래도 좋고··· 어떻습니까?”

“대출을 받은 상태라면 새로운 전략이 가능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곽지원 부사장. 그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벨이 이미 내 손안에 들어온 기분이다.

*

원형의 테이블이 마련된 회의실.

이곳에는 나와 곽지원 부사장, 넷플렉스의 CEO인 라드 헤이스터스를 포함한 총 9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미소만 띠었을 뿐 서로 서늘한 눈빛을 주고받았는데 이는 이곳이 바벨의 최대 주주들인 6개 투자사와 협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저들 각자의 명함에는 하나하나가 전부 미국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동경이 되는 은행들의 이름이 있다. 언제나 갑의 위치에서 을을 헤아리는 입장이었을 뿐이기에 저들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 전부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바벨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어서 오셨다고요?]

저들 중 바벨에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투자사는 세계에서도 최상위를 달리는 증권사이자 바벨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대출까지 진행해준 메릴리치였다.

바벨의 지분을 무려 13.8%나 보유한 만큼 투자사들의 대표와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서는 대꾸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 보면 당신들의 주식이 한낱 휴지 조각으로 변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우리가 보유한 주식이 휴지가 된다? 바벨의 주식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내 말에 6명의 투자사들이 전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노골적인 비웃음이다. 뒤이어 아이에게 가르쳐주는 형과 같은 태도로 말했다.

[도대체 언제적 바벨의 정보를 가지고 이 자리에 오신 겁니까? 바벨은 지금 아주 건실한 기업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사항도 저희를 부르셨을 줄이야. 쯧.]

막바지에는 혀를 차며 약간의 불쾌함마저도 풍겼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대답했다.

[파산직전으로 몰렸던 바벨이 최근 들어서 굉장한 성장을 했다는 사실은 이곳 미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오! 하지만 미국 바깥에까지는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핀잔하는 그의 말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주도권을 잡고자 그에게 물었다.

[바벨의 영화에 대출을 해주셨지요?]

[그거야 뭐 비밀도 아니니까. 네, 맞습니다. 증권사가 기업에 담보를 받고 대출해주는 게 문제가 됩니까?]

[당연히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대출받아서 제작한 영화의 성적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게 문제였겠지요. 아닙니까?]

[······.]

이제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원래 영화라는 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겁니다. 대단한 역사를 가진 영화사들도 모든 영화를 성공시키는 건 아닙니다.]

[네. 그렇게 대단한 영화사들도 망한 영화 때문에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곳이 수두룩하죠.]

[그래서요? 우리가 그걸 공짜로 넘긴 것도 아니고 캡틴 실드의 판권을 담보로 받고 넘긴 겁니다. 어차피 바벨이 흔들려봤자 우리는 그 판권을 팔아서 회수하면 됩니다.]

[판권을 판다고요? 이거 참.]

이번에는 내가 혀를 찰 타이밍이었다. 뒤이어 갑갑하다는 투로 말했다.

[캡틴 실드가 판권으로 가치 있을 수 이유는 바벨에서 꾸준하게 코믹스를 찍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벨이 흔들린 뒤에 팔아서 회수를 한다? 글쎄요. 코믹스가 망해버린 후에 그 판권이 대관절 얼마나 가치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코믹스의 캐릭터는 회사가 망해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일 뿐이다. 인기 캐릭터로서 꾸준히 인지도를 보여주지 못하면 판권의 가치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가 그걸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테지만, 이는 훗날의 가능성일 뿐. 당장 바벨이 무너진 시점에는 그야말로 똥값이 되는 거지.’

이 자리에 있는 투자사들은 지금의 경영자를 자리에 앉힌 이후로 한 번도 경영에 관여했던 적이 없다. 괜히 자신들이 투자한 기업과 경영권에 관한 문제로 분쟁이 난다면 거래를 해야 하는 다른 기업들에게 좋지 못한 이미지가 남겨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투자사가 기업의 경영에 아무런 간섭을 못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지금의 경영자들도 이 투자사들이 손을 들어주었기에 이전의 경영자를 쫓아내고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처럼 경영의 문제로 투자사의 이익에 악영향을 끼치면 철저하게 관여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뽑아내는 집단들이다.

[말했듯이 고작 한 편의 영화가 망했을 뿐입니다. 지금의 바벨은 그 정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까지 바벨에서 영상을 만들고 그것이 팬들을 만족시켰던 적이 있기는 합니까? 심지어 지금의 바벨이 영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영화가 대체 뭐가 있죠?]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에스맨? 네이비? 심지어 스파이더 가이는 영구적으로 판권이 넘어간 상태입니다. 인기 캐릭터가 전부 다른 회사로 넘어갔는데 5,000개가 넘는 캐릭터의 판권이 도대체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이것이 지금의 바벨이 부정적으로 평가 받는 근본적인 이유다.

‘저들이라고 이 사항들을 모를 리 없긴 하지만.’

만화책과 장난감 등으로 충분한 수익을 뽑아내고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대화가 오가자 저쪽에서 한숨을 짤막하게 내쉬며 툭 던지듯이 말했다.

[좋습니다. 바벨이 망할 수도 있다고 치죠. 그럼 당신들이 원하는 게 뭡니까?]

[바벨의 대출금에 대한 원금 회수 압박을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영화 제작을 위한 대출이야 메릴리치에서만 해주었으나 꼭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만화책을 출판하기 위해서라거나 장난감을 만들기 위해서 받은 대출도 상당하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돈은 전부 여기 있는 여섯 개의 투자사에서 나온 돈이다.

즉, 전 방위적 압박이었다.

[잘못 들었나 의심되는 발언이군요. 영화가 망했는데 대출금 회수 압박을 해라? 이건 바벨을 파산케 만드는 일이고 그거야말로 우리 소유의 모든 주식을 휴짓조각으로 만드는 거 아닙니까?]

[30%. 딱 30%만큼만 주가가 내려가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펠무터의 지분을 매입하고 바벨을 경영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이보십시오. 이미 우리는 충분한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당신만을 위해서 우리가 그리 움직여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심지어 30%라니. 놀라운 수치군요. 그 30%가 떨어지면 우리가 얼마나 손해를 보는지 알고서도 하는 말씀입니까?]

굉장히 점잖은 ‘너 미쳤냐?’의 표현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정상적인 인간이었다.

[물론, 여러분이 손해를 감수하셔도 좋을만한 제안을 추가할 겁니다.]

내 말에 곽지원 부사장이 일어나서 투자사의 담당자들에게 넷플렉스와 바벨의 M&A 자료를 돌렸다.

[맙소사. 구석진 동네 DVD 대여점에서 바벨을 인수하는 게 바벨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는 겁니까?]

[부디 제대로 읽어보십시오. 동네 DVD 대여점이라니요. 도대체 언제 적 넷플렉스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 미디어 네트워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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