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18화 (318/577)

< 틀을 만드는 자 >

여기서 승승장구하던 나의 한계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당장의 문제라면 초능력이나 마찬가지인 직감에 의존해서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시적인 안목으로 방향을 짚어내는 건 철저하게 꿈속 미래의 지식에 근거했다.

이는 알고 있는 미래의 삶이 아닌, 내가 거물이 되어 판을 짜고 이끄는 위치에 이를수록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보통 사람처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몇몇 상품을 선점하는 게 아니라 시장 자체를 완벽하게 내 힘으로 개척하는 거니까.’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쉽사리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우선은 임시방편을 썼다.

“정 안 되면 모든 팀을 우리가 지원하도록 합시다. 모든 선수가 연봉 2,000만 원 이상을 받으면서 리그가 운영되도록 하십시오. 또한, 팀을 운영하고 싶다는 기업이 나오면 그때 인수하는 형태로 가겠습니다.”

김유천 부문장을 신뢰 가득한 시선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최악의 경우 그 부분까지 가능하도록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기왕이면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건 말 그대로 최악의 방법이다.

돈을 떠나서 자기 게임의 리그를 이런 식으로 운영하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니까.

이로써 당면 과제가 생겼다. 밑 빠진 항아리에 돈이라는 물을 계속 붓기보다는 뚫린 구멍을 막는 근본책을 찾아야 한다.

방책을 찾아 때론 명상하고 평소에는 부단히 공부하다 보니 어언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외형적으로 LON 온라인의 유럽과 북미 리그는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실을 보면 가슴앓이 앓듯 신음하게 된다.

유럽과 북미에서의 리그는 어디까지나 상금만을 노린 게이머들이 몰려와서 각광 받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전략보다 그저 좋은 피지컬로 찍어 누를 수 있으면 승리하는 그런 대회만 이어지고 있었다.

‘어쩐다. 이러면 완전 나가리인데. 돈의 순환이 이뤄지기는커녕 여지없이 약탈만 당하고 있어.’

대회에 좋은 전략과 작전 같은 것이 없는 이유는 그만한 연구와 연습을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금요일에 LON 온라인 대회에 참가하고 토요일에는 배틀 슈터 대회, 일요일에는 워드래프트Ⅲ 대회에 참여하는 팀이 있을 정도다.

팀 이름만 같고 선수 구성은 다른 건 아닐까?

이런 생각에 선수 구성까지 확인을 다 해봤다. 그리고 구성이 정확히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여기서 악순환이 발생한다. 세기의 대결이라며 세계의 관심을 끌었으나 막상 졸전으로 끝난 미래의 복싱 챔피언들 간의 대회처럼 경기 자체가 아닌 우승과 포인트에만 연연하면 관람객은 김빠진 콜라 같은 밋밋한 경기를 보게 된다.

‘껴안고 발차기 춤이나 춰대던 올림픽 태권도처럼.’

LON 온라인이 이러했다. 전략도 없다. 맨날 뻔한 시작과 뻔한 과정을 거치며 뻔한 팀이 승리한다. 이 과정에서 무슨 재미를 느끼고 감동을 선사하랴.

이런 경기 내용이 이어지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경기를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라고 한다.

‘그나마 지금은 게임의 인기에 편승해서 적은 숫자지만 관객이 있기는 해. 하지만 그래 봐야 얼마 못 가 천천히 고사해나갈 거야. 미래에 꼭 성공한다는 결과만 보고 그 과정을 내가 지나치게 쉽게 여겼었나 보군.’

아마도 이런 경기력이 계속 이어지면 그나마라고 할 수 있는 그 관객들도 외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게임단이 다른 대회에 복수로 접수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애당초 상금이 목적인 팀인데 그걸 막는다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우리 대회만 철저하게 외면받는 상황이 된다.

“이번에는 실패다. 그것도 완벽하게 오판했어.”

고작 한 달 조금 넘은 시간이지만 인간은 예측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다. 더 지켜볼 것도 없이 나는 깨끗하게 인정했다.

지금 현시점에서 LON 온라인만으로 e-sports의 세계화를 이끌어내는 계획은 실패다.

‘자만했어. 생각해보면 한국에서야 e-sports의 아버지네 뭐네 사람들이 떠들곤 했지만, 사실 냉정하게 보면 이건 얻어걸린 경우가 커.’

타이밍이 좋았다.

시작이 어떠했던가. e-sports에 대단한 비전을 가지고 시작한 사업이 아니라 그저 흥행할 스타들을 먼저 선점해서 홍보 효과를 노렸었다.

아울러 e-sports가 흥행할수록 관계자나 프로게이머들보다도 내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다. 게임 유통과 아이템 현금 거래까지 모두 하면서도 이미지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프로게임단 덕분이었으니까.

‘게다가 몬스터 프레데터스 같은 게임들도 프로게임단 출신의 테스터들이 없었으면 이런 성공을 거두기 어려웠을 거야.’

자기 객관화라는 게 이토록 어렵다. 아픈 계기가 있어야 가능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면 이 역시도 괜찮으리라 스스로 위로했다.

‘나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지금의 e-sports 판을 만들어 낸 능력자가 아니야. 이런 내가 북미나 유럽에 e-sports 문화를 전달하겠다고 생각했고 미래 결과적으로 낙관했으니 이건 당연한 결과지.’

물론, 이 한 번의 실수로 회사가 휘청이거나 그룹이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돈이라는 맷집이 아주 튼튼한 사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찮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

“젠장. 방송사 때부터 이런 생각을 계속해왔으니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방심한 거지.”

어느 정도는 손해 봐도 괜찮다는 자신감! 이 감정이 두루두루 영향을 끼친 게 틀림없었다.

없을 때 묘안이 나오고 있을 때는 나태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보다.

다시금 반성할 따름이다.

*

초심(初心).

사대주의적인 문화의 영향일까. 왠지 깨달음을 얻고 반성하는 분위기일 때는 한글 대신 한자를 찾게 된다. 아마도 먹과 붓, 벼루가 있었다면 이마에 하얀 띠를 두르고 무릎 꿇은 채 갈면서 한지에 글씨를 썼을 것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지는 의식의 행위로서 말이다.

‘그런데 초심을 어떻게 쓰더라?’

모를 때는 인터넷에 물어보면 된다. 나는 사전을 열고 初心을 외운 뒤 종이에 따라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곽지원 부사장이 찾아왔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의아해하는 내게 그는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같은 건물이고 같은 층에서 지내는데 회장님 얼굴을 보기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같이 커피나 한잔 할까하여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회의나 보고로만 얼굴을 마주했었군요.”

GF의 규모를 키우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의 곽지원 부사장이 전무였던 시절에는 둘이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많은 대화를 나눴었다. 사업가로서의 윤태식을 가르치고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곽지원 부사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을 배웠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근 1년간 대화를 거의 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 많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다 보니 발생한 암묵적인 타협이었다.

그런데 곽지원 부사장이 푸근한 웃음을 띠며 머리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어휴. 출장도 없이 편하게 사무실에서 서류만 보시는 분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습니까? 회장님 얼굴이 이러니 회사 전체가 우중충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어나시죠.”

“네? 커피요?”

“여기서 마시는 커피랑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가 같습니까? 요즘 e-sports 문제로 골치를 많이 앓고 계시는 것 같은데, 그럴수록 기분전환도 하고 그러면서 머리를 상쾌하게 해줘야. 좋은 생각도 떠오르는 법입니다.”

곽지원 부사장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일을 해왔던 사람답지 않게 상하 관계가 확실한 사람이다.

어지간해서는 내가 아니라고 하면 바로 수긍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마음의 여유 말이구나. 이거 각잡고 초심을 마구 쓰다가 들켰으면 창피할 뻔했군.’

이미 실패를 받아들이고 반면교사 삼을 방법이 무엇일까, 여기던 참이었으나 곽지원 부사장의 마음을 알고 나니 기분이 한결 더 나아졌다.

나는 마냥 거절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울 한파는 참으로 매섭고 시리다.

찬바람이 쌩하니 부는 겨울은 특히 패딩을 입어도 몸이 저절로 움츠리게 된다. 이런 날에 커피를 들고 걷자니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날도 춥고 저기 자리도 많으니 이쯤에서 앉는 게···”

적당히 하고 쉬었으면 좋을 텐데 싶다. 그러나 위로해주려고 찾아온 이의 마음은 달랐나 보다.

“뭐 어떻습니까? 이럴 때 운동도 하고 그러는 거죠.”

“저는 매일 새벽에 운동하고 있습니다만?”

커져 버린 사업으로 공사가 다망해진 현실이지만 여전히 매일 아침에 운동을 하고 출근하는 규칙적인 라이프를 즐기는 중이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거울을 보며 내 몸에 자부심을 갖게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유는 딱 하나다. 건강을 잃었을 때 몸이 얼마나 쉽게 피로함을 느끼는지, 하루가 무겁게 바뀌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내 라이프 스타일은 한국이 아닌 미국 등지에서도 헬스장을 꼭 찾아가고 공원을 달릴 만큼 꾸준하게 이어졌다.

‘내가 빤히 운동 잘하는 거 알면서 이러시다니.’

신경 써주는 마음에 거듭 감사를 표하며 나는 추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고로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행복한 게 인간 아니랴. 거리에서 이러지 말고 적당히 본론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오늘따라 유독 이상하십니다. 무슨 일 있어요?”

“뭐 별거 있습니까? 그냥 회장님이랑 커피나 마시려고 그러는 거라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커피를 굳이 찬 바람 맞아가면서 마실 이유가 없잖······”

그때였다.

“어? 윤태식 회장이다!”

“어디? 어!? 진짜네! 오!”

“실물로 보니까. 더 잘생겼어요!”

GF사옥이 강남역 인근에 있긴 하지만 늘 주차장에서 바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덕분에 최근 2년은 회사 주변을 걸어 다녀 본 일이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사람을 마주치는 것 또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모르는 사람이 나를 연예인 보듯 대하는 일도 첫 경험이었다.

“우와. 키도 크고, 돈도 많고··· 젠장!”

“다 가졌네! 에이! 세상 혼자 사냐!”

“짜증 나게 부럽지만 얼굴은 평범하니까~!”

대한민국 최대의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강남역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평일 대낮임에도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었고 다양하게 관심어린 표현들을 해왔다.

‘직원들이 나를 대하는 거랑은 확실히 다르네. 이런 관심을 연예인들은 매번 느끼는 거겠지?’

항상이라면 꽤 불편하겠다 싶지만, 이따금 이면 썩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호감이라는 감정은 그런 것이니까.

그래서 관심 보이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웃음이나 목 인사 정도를 해주는데 옆에서 흐뭇한 시선이 느껴졌다. 곽지원 부사장이 인자하기까지 한 얼굴로 있던 것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슬쩍 보았다.

“부사장님. 뭡니까? 그 이상한 표정은?”

“보기 좋아서 그럽니다.”

“뭐가요?”

곽지원 부사장은 주위를 보며 말했다.

“회사에서 고작 300미터 정도를 걸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죠. 그런데 벌써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회장님을 알아보고 인사를 해오지 않습니까? 만약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윤태식 회장이 아니라 다른 기업의 회장이었어도 이랬을까요?”

“아니겠지요. 그분들은 저처럼 방송을 하고 그런 일이 없으니까요.”

물론 방송도 탔고 얼굴도 알려졌지만, 나처럼 쉽고 편한 느낌으로 ‘윤태식이닷!’하며 손가락질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내게 가정해보자며 그가 물었다.

“만약에 알아본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그냥 신기해하고 말았을 겁니다. 저야 게임 방송에도 나와서 기업인으로만 보기 어렵지만, 다른 회장들은 오로지 기업인이니까요.”

사회적으로 뭔가 벽이 하나 있는 것 같고 다른 영역에 사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재벌에게 일반인들은 거부감과 동경심을 함께 갖는다.

이를 나는 소시민이었기에 잘 알았다. 이런 내게 곽지원 부사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회장님에게도 그런 거리감은 충분히 느낄 겁니다. ‘저 사람과 나는 달라.’와 같은 벽을 말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거리감을 느끼는 이른바 재벌들. 소위 부자라는 이들 중에서 회장님보다 부자인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많아봤자 한 명 정도군요.”

나는 GF라는 거대 기업이 가진 지분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 나와 재산으로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하나뿐이다. 아울러, 공개적으로 드러난 재산으로만 보면 한국 1순위의 부자는 바로 나였다.

“현대 사회에서 금력은 곧 권력입니다. 방금의 순위는 회장님이 가지신 권력의 크기라고 보아도 되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렇게 회장님에게 열광합니다. 기업인들은 모두 적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그것에서 벗어나신 겁니다.”

나는 그제야 ‘아저씨가 무슨 말 할지 아니까 얼른 그 말이나 하시죠?’라는 태도를 버렸다. 심심찮은 ‘한 번 실패는 병가지상사’와 같은 종류의 조언을 해주려고 부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뚝 서서 보고 있으니 그가 말했다.

“저들은 회장님이 만든 세상을 좋아하는 겁니다.”

< 틀을 만드는 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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