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17화 (317/577)

< 틀을 만드는 자 >

이 모든 것을 잘 알기에 나는 제대로 지시했다.

“로고만 박는 한정 이벤트 정도로 생산하면 곤란합니다. 선수마다 키보드와 마우스 취향이 확실하게 갈릴 테니 그걸 활용하세요.”

“네?”

표정과 제스처에서 묻어나는 의문부호를 보니 내가 엉뚱한 사람에게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깜빡했어. 김선일 국장의 능력이 좋긴 하지만 이건 업무가 다르지.’

맞다. 시작이 방송프로그램이었을 뿐 이건 레오닌 컴퓨터에서 해야 할 업무였다. 당연히 GGT의 국장인 김선일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업 분야였다.

마우스는 선수들에 따라서 선호하는 마우스가 조금씩 다르지만, 키보드는 거의 모든 선수가 같은 키보드를 사용한다.

즉, 스타 드래프트를 하기 좋은 키보드가 있다는 이야기다.

‘선수들이 선호하는 성향을 제대로 파악해서 여기에 딱 맞춘 상품. 맞춤 키보드&마우스를 제작하는 거야. 이걸 홍보와 함께 판매하면 충분히 먹히겠지.’

적당히 생각을 갈무리하며 김선일 국장을 보았다.

지금 당면한 건 레오닌 컴퓨터도, 스타 드래프트 프로게임단도 아니다. 기획 프로그램인 ‘프로게이머를 보다’가 성공한 만큼 이제는 그다음을 볼 차례다.

“LON 리그에 관련된 것들을 잘 처리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 방송사에서 준비 중인 가장 큰 프로젝트는 바로 GGT만의 리그였다.

“예.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협회에서 접근도 해왔습니다.”

“협회에서요?”

한국프로게이머협회.

주로 협회 혹은 KPGA(Korea Pro Gamer Association)라고 부르는 이곳이 만들어진 목적은 방송사 위주로 흘러가는 리그에서 프로게이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주축은 게임단의 구단주들이었는데 혹자는 대한 축구 협회나 야구 협회와 비슷한 개념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건 틀린 말이었다. 한국프로게이머협회는 절대 그렇게 볼 수 없는 단체다.

‘여기는 애초부터 순수하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거든.’

입으로야 한국 e-sports의 발전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런 건 개뿔도 관심 없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어떻게 해야 자신들이 더 이득을 볼 수 있느냐일 뿐이다.

‘돈이지. 누가 뭐래도 순수하게 돈만 본다. 자본주의니까.’

최근 들어서 협회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이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방송사들이 자신들의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도 팀을 만들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다.

물론, 나한테는 안 된다.

‘내가 많이 컸다 아니냐.’

큰 걱정을 하지 않는 이유는 내 체급과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딱히 활동하지 않았으나 협회에서 나보다 발언권이 강한 사람은 없을 정도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니 마음에 안 드는 소리면 그냥 딱 잘라버리면 된다.

그래서 협회가 하는 일들을 대부분 소극장 공연을 보는 양 구경할 때가 더러 있었다. 생각의 주제는 ‘지들 이익에만 목이 말라있는 이놈들이 또 어떤 뻘 짓을 구상하고 있는 걸까?’였다.

“협회 측에서 새로운 대회에 함께 투자했으면 한답니다.”

이미 양대 리그가 크게 자리를 잡은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고작 인터넷 방송에서 만드는 신규리그에 투자한다니.

‘지들 이익 말고는 관심도 없는 놈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더 말해보라 하자 김선일 국장이 말을 이었다.

“유소년 리그를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e-sports를 제외한 다른 스포츠들은 전부 유소년 리그가 있다. 이 리그에서 잘 성장한 선수를 프로리그에서 뽑아가는 방식이다. 반면에 e-sports는 애초에 그 태생이 얼마 되지 않았고 수명도 짧다.

당연히 비슷한 건 있어도 제대로 된 유소년 리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드는 이제 와서 만들기에는 늦었지.’

스타 드래프트에는 이미 어린 나이에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는 선수들이 있다. 심지어 꽤나 팀의 중심이 된 선수들도 현존했다. 이런 상황에 유소년 리그를 만들었다가는 팀 자체가 휘청거릴 곳들이 있으니 스드는 포기하고 새로 나온 게임에 시도를 해보겠다는 의견 같았다.

‘제법 머리를 잘 썼네. LON 온라인의 인기가 다른 게임들과는 달리 꽤 오래 갈 거로 전망한 모양이군. 그러니 숟가락을 들이미는 거겠지.’

일단 LON 온라인을 인정해주는 느낌을 받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

시장성이 없다는 것!

‘유소년 리그라고 해봐야 시청자가 얼마나 나오겠어?’

e-sports와 비교해서 엄청나게 인기가 많은 축구나 야구도 중고등부 대회는 관전자가 없는 게 국내의 현실이다. 같은 시간을 쏟아도 프로 경기를 보면 훨씬 더 박진감이 넘칠 터.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고려해도 협회의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프로게이머들은 나이 구분을 하질 않으니까 어려서부터 너무 혹사당하는 경향이 짙어. 게다가 LON은 시장이 볼 때 게임 수명이 얼마나 갈지도 모르고 스드와 달리 실력만 있으면 바로 섭외해서 선수로 기용하면 되는 시스템이지.’

이러면 반년만 계약해서 바짝 써먹고 바로 버려버리는 경우가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리라.

인간을 소모품으로 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유소년 대회가 하나쯤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GGT의 입장에서는 두말할 것 없이 손해야. 하지만 LON 온라인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그리고 꼭 시청자가 없을 거라고 확신할 필요도 없어. 또래의 친구들이 게임을 하는 걸 응원하려고 찾아보는 애들도 있을 거거든.’

이런 아이들이 선호하는 포인트만 잘 잡아내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피식.

그렇게 사업적인 안목으로 이익과 손해를 저울질하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됐다. 시청자가 뭐가 중요하냐? 돈 많아서 손해 봐도 된다고 떠든 게 바로 나인데. 필요하면 부자의 취미사업으로 이런 방송 몇 개쯤은 있어도 상관없잖아.’

쥐어짜서 이익을 계산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유소년 리그는 방송이 미친 듯이 흥해도 기껏해야 월 1억을 벌면 많이 버는 거다. 그러니 손익 계산 말고 장기적인 태도로 선선하게 대응하는 편이 백배 나았다.

‘방송에 노출되는 청소년이 많아지면 훗날 그들이 어른이 되어서 지갑을 열어줄 거야. 추억 보정으로.’

즉, 장기전으로 가는 연결 고리로서 투자하기를 결정했다.

“투자는 협회에서 얼마나 하겠다고 합니까? 저는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투자하고 시작하려고 하는데, 자신 없으면 빠지라고 하십시오.”

양대 리그라고 불리는 다른 두 방송사도 감히 협회에 이런 말은 하지 못한다. 몇 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협회가 똘똘 뭉쳐서 방송사에 선수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해버리면 손해는 방송사가 전부 감수해야 하는 절대 갑에 가까운 위치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 이를 무시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있으니 한 명은 협회장을 맡고 있는 S통신 T1팀.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나다.

“그러면 도시연고제는 폐지할까요?”

유소년 리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내가 제안했던 안건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질문해오는 김선일 국장.

“아닙니다. 굳이 폐지할 필요는 없지요. 각 도시별로 유소년팀을 만들어서 경기하고 팀마다 도시연고제로 우선 선발 권한을 주면 됩니다.”

이게 잘만 된다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체계적이고 발전된 e-sports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경기장은 굳이 크게 있을 필요 없으니 그냥 임대를 통해서 작게 운영합시다. 그리고 아이들이 우선 모여서 연습할 수 있는 연습 공간을 구비하세요.”

기왕 투자할 거라면 후발주자가 감히 따라 하기 힘들 정도로 확실하게 투자를 하는 편이 좋다.

“흥행수익은 고려하시지 마십시오. 무조건 기존의 방송사에서 따라 할 수 없도록 하는 겁니다. 오직 우리만의 리그가 될 수 있게 진행하는 데 중점을 두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유소년 리그에 대한 지시를 마무리 지었다.

이후.

【GF그룹. e스포츠의 새로운 미래에 투자.】

【e스포츠의 아버지 윤태식 회장이 보는 e스포츠의 미래.】

【GF그룹. e스포츠의 발전을 위해서 손 걷고 나선다.】

인터넷에 기사들이 쫙 깔렸다.

과거와는 확연하게 달라진 우호적인 기사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돈으로 푸쉬를 했으니 당연한 결과지.’

‘프로게이머를 보다’에서 윤태식이라는 인물이 e-sports의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이미지가 확고하게 잡혔다. 그러니 이를 기회삼아 최대한 활용하도록 자본을 넉넉하게 쓴 결과였다.

‘정치가 별거 있겠어?’

개인적으로는 현명하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어른의 지혜라고 자평한다.

내가 이런 투자를 진행한 것은 LON 온라인의 수명을 최대한 길게 만들기 위함이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으로는 청소년들이 조금 더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탄탄한 길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보이리라.

‘멋진 이미지로는 안성맞춤이지.’

인생사 저절로 주어지는 건 없다. 노력하는 만큼 이미지도 만들어가는 거다.

*

이튿날의 회의에는 김유천 부문장이 안건을 가져왔다.

“중국은 워드래프트Ⅲ 덕분에 게임단에 투자해서 홍보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에 긍정적이지만, 중국을 제외한 나라에서는 대부분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LON 온라인의 유소년 리그가 만들어지고 있는 시각에 해외에서는 본격적으로 프로리그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e-sports라는 단어조차 익숙하지 않은 대다수 국가는 프로게임단보다 상금 사냥꾼 형태의 게이머들이 훨씬 많았다.

김유천 부문장이 지적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였다.

“유럽과 북미의 프로리그는 겉보기에 꽤 성공적으로 시작한 것 같으나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내부로 들어가면 문제는 많다.

“당장은 다른 게임과 비교해서 상금이 많은 수준이라서 여러 팀이 지원하는 중이지만, 그 팀들 대부분이 단기 프로젝트의 형태를 보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국은 e스포츠의 종주국이라고 불린다. e스포츠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운 국가가 한국이고 세계 최초로 스포츠 산업과 비슷하게 키워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e-sports가 아닌 게임 대회로 따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엄연히 후발주자다.

해외의 많은 국가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크고 작은 게임 대회들을 열어왔고 나름대로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한국의 e-sports는 맛있게 열린 과실이다.

단지 자신들이 유지해온 방식을 다 갈아엎어야 하는 위험요소가 있어서 관망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는 변화에 발 빠르게 따라오지는 못했으나 인식을 바꾸기만 하면 순식간에 따라올 토대가 튼튼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묘하네. 나는 우리 회사가 약진하면 다들 금방 따라오면서 팍팍 유행을 탈 줄로 예상했거든. 그런데 의외로 아직 보수적인 움직임만 보이고 있단 말이야. 이유가 뭐지? 꿈속 미래보다 지나치게 빨리 키웠나?’

애당초 해외의 e-sports는 한국의 스타 드래프트 리그를 보면서 벤치 마킹 하고 많은 연구를 통해 시작하게 되었었다. 만일 내가 개입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면 대충 3~4년쯤 후에 e-sports가 활성화됐을 것이다.

그걸 GF라는 회사 하나에서 겁 없이 덤벼들었으니 동반자들이 없는 채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 되어버렸다.

‘원래는 전 세계의 게임업계에서 단체로 해야 할 일인데 나 혼자 하고 있는 셈이니까.’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안정화.’

우선 해외의 수많은 기업이 한국 e-sports의 성공을 보았기 때문에 이것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자금을 투자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안정화까지 이뤄진 후 투자하겠다며 나름의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으리라 예상한다.

즉, 나는 타이밍이 맞기만을 기다려선 안 된다. 그 타이밍이 LON 온라인 때에 온다는 보장이 없고 자칫 투자는 내가 다 하고서 엉뚱한 게임이 과실을 다 챙겨가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남 좋은 일만 하는 호구가 될 수는 없어.’

나는 김유천 부문장에게 말했다.

“당장은 단기 프로젝트로 생각했던 팀들이 장기적으로 우리 게임에 올 인해도 된다고 믿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8강 이상에 올라오는 모든 팀에게 지원을 해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한국에는 완전 초창기. 그다지 벌리는 돈이 없던 시절부터 해왔던 사업이다. 이 정도 자금 지원은 LON 온라인의 규모를 생각하면 투자 축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김유천 부문장의 대답은 회의적이었다.

“저희도 그 부분은 고려해보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유럽이나 북미에서는 크게 통할 것 같지 않습니다.”

“어째서입니까?”

“한국은 이미 스드라는 굉장히 성공한 사례가 존재하고 스드가 아니라 하여도 최상위에서는 제법 만족할 만큼 수입이 되는 다른 게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외는 상황이 다릅니다.”

1년 내내 대회의 8강에만 진입할 경우 1인당 연 400만 원의 수입을 가지게 되는 지원 시스템.

한국에서는 기업의 투자만 시작되면 곧 큰 수익으로 이어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버틸 수 있는 자금이 된다. 반면에 그런 기대감이 없다면 딱히 메리트로 느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투자자가 생기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1~2년을 버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 틀을 만드는 자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