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틀을 만드는 자 >
‘어쨌건 잘 뽑히기만 했으면 됐지. 나로서는 성공이야.’
김선일 국장에게 지시했던 중점 사항!
프로게이머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이 드는지를 절절히 보여주었다. 이제 시청자들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프로게이머를 하고 싶게 만드는 방송이 아니라 ‘아··· 이거 함부로 생각하고 덤비면 안 되는 직업이구나.’라는 전문적인 직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러한 반응은 온라인상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 2군도 인원이 상당한데···
- 이 팀은 1군들이 워낙 빵빵해서 1군이 될 가능성도 거의 없는 거 아냐?
- RA가 그렇게 잘나가는 팀이에요?
- 당연함. 이 팀이 있어서 지금의 프로리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초창기에 가졌던 최종보스 포스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맡아놓는 우승 후보임.
- ㅇㅇ 특히 TFA이던 시절 초반에는 진짜 압도적이었지.
- 아! 그 시절이 그리워라. 황제 밑에 다 짭이던 시절~
추억에 빠지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RA를 초창기 포스 그대로 가지는 팀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유는 한 팀이 지나치게 압도적인 성적을 발휘하면 스타는 있되 정작 리그가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갓 태동한 e-sports의 규모를 키우려면 엎치락뒤치락하는 경쟁의 묘미가 있어야 한다.
‘원맨쇼 먼치킨이 현실적으로는 이래서 무의미하다는 거야. 처음에야 우와! 거리지 나중에는 심드렁해지거든. 팬층도 확장되기는커녕 고착화되고.’
대중이 영웅의 등장을 바라는 만큼 영웅의 몰락을 기대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변화가 더욱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승부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대감 없이 우승은 오직 TFA의 것!
이런 분위기에서 무슨 흥행이 더해지겠는가. 실제로 상승세를 보이던 e-sports의 열기가 주춤했고 팬심으로 김요환, 송진호를 돕던 나는 미련 없이 손을 떼고 말았다.
‘오죽하면 S 통신사의 T1이 TFA를 누르고 처음으로 우승했던 그 날이 스드 프로리그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결승으로 매번 뽑히겠어. 정치건 사업이건 게임이건 독재는 옳지 않은 거야.’
잠시 추억에 잠겨 있을 즈음, 다른 채팅이 보였다.
- 딴에는 고생이라고 하는데 그래봤자 게임이지. 지들이 막노동을 해봤겠냐? 저거 백날 한다고 골병들지는 않을걸?
- 맞아. 힘들 게 뭐가 있어? 걍 군대나 수련원 간 셈 치면 끝이지. 저긴 짬밥 퀄리티가 훨 높고.
- 야! 군대 무시하냐!!!!!
- 뭐 연습 시간이 길다는 거는 인정하겠는데, 어차피 게임이잖아?
- 노노. 체육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축구나 농구 안 해보심? 축구선수나 농구선수가 연습하는 거도 노는 거라고 말하실 수 있음?
- 멍청이냐? 그건 신체적으로 힘이 드는 거고 저건 눈알이랑 손가락 따끈따끈한 거잖아. 비교할 걸 비교해라.
역시 고작해야 1화에 불과하다.
‘한 번에 가치관이 바뀌면 그게 신기한 일이지.’
모든 사람이 마음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이럴 때 필요한 요소가 바로 반복이다. 자주 보고 자꾸만 접하다 보면 아는 만큼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다. 이른바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데에는 이런 앎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방송은 이 의도를 충실하게 이루어주었다.
화면에서는 계속해서 2군 선수들의 힘든 일과가 나왔다. 비록 나이는 어리고 분야가 생경하기는 해도 흘리는 땀의 가치는 결코 여타 직업군에 비해 낮지 않음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그 노력 덕분일까?
점점 방송을 욕하기 위해서 보던 사람들의 채팅이 줄어들고 응원하는 팬들의 채팅이 늘어났다.
‘좋다.’
시청자의 숫자를 보니 어느덧 10만 명을 넘어선 상태!
GGT에서 두 번째로 10만 단위의 시청자 방송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방송은 마무리를 향해 진행하고 있었다.
[RA는 e-sports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하는 프로게임단이다. 지금도 더 좋은 성적을 위해 성실하게 구슬땀을 흘리는 선수들. 과연 그들의 시작은 어떠했을까?]
카메라 앞에는 TFA가 창단될 때 창단 멤버였던 초창기 선수들이 자리했다. 작년에 군에 입대한 동수를 제외한 모든 멤버가 화면에 함께 나왔다.
[팀이 처음 만들어질 때요?]
[와 그때는 진짜 장난 아니었죠. 기존에도 나름대로 스폰을 받는 팀들이 있긴 했는데 그 팀들은 기껏해야 피시방 스폰 정도의 수준이었거든요.]
[기업에서 제대로 연봉을 주고 숙소도 지원해주는 팀은 이 팀이 유일했죠.]
김요환을 비롯하여 진지하게 인터뷰에 임하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장난스럽고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진호가 말했다.
[맞아. 그때 지원율 진짜 장난 아니었는데! 가만있자··· 내가 우승했었던가?]
채팅창에도 느낌표가 작렬했다.
- 김요환과 함께한 대회에서 송진호가 우승이라니?
- 김요환과 함께한 대회에서 송진호가 우승이라니?
- 송진호 우승은 진짜 어색하다.
- 송진호 우승은 진짜 어색하다.
두 번씩 꼭 써야 한다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바로 작용했는지 팬들 역시도 일치단결이다. 그렇게 오해가 쌓여갈 무렵에 진우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와. 송진호 진짜 큰일 날 애네? 이거 방송이야, 방송. 정직해야지! 제가 그때 3등이어서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우승은 여기 요환이가 했고 진호가 준우승이었어요. 맹세할 수 있습니다.]
[아~? 그랬나?]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보아하니 자신이 준우승이라는 걸 알고 한 소리다.
- 송진호 2등의 역사는 이미 시작부터 정해졌던 거구나.
- 송진호 2등의 역사는 이미 시작부터 정해졌던 거구나.
2와 송진호 관련 글로 채팅창이 도배되어 갔다. 피식 웃고는 방송을 보았다.
[그 시절 이야기를 하자면 이거 방송 분량이 모자를 텐데~]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아요?]
[물론이죠! 어떤 일이 있었냐면, 제대로 된 팀을 만든다고 딱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스드 리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던 PKT가 사라진다고 했던 거예요.]
기억난다. TFA의 첫 출전 리그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PKT.
이를 지원하던 투니레일에서 지원을 끊겠다고 하면서 영영 사라질 상황이 되었었다.
[진짜 저희 취업하자마자 팀 없어지는 줄 알고 다들 완전 쫄아있고 장난 아니었죠.]
[바로 그때!]
진호가 ‘짜잔’ 하며 말했다.
[우리 회장님이 대회에 스폰서로 나서기로 하면서 스드 리그와 올게임넷이라는 방송사가 생겼다는 거. 아시는 분들이 많으려나요? 모르긴 몰라도 그때 회장님이 안 나섰으면 e-sports고 게임방송이고 다 없었을걸요?]
미래를 알고 있는 나야 내가 안 나섰더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올게임넷과 스드 리그가 탄생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라는 일반적인 시선에서 보자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진호가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내 덕분에 한 분야가 기사회생했다고 여길 것이다.
- 뭐? 그럼 윤태식 회장님은 이런 미래까지 내다본 것인가?
- 이게 사실이면 진짜 대박이다.
[진짜예요?]
[에이~ 그럼 제가 방송에 출연하면서 거짓말을 할까 봐요?]
[했어. 그것도 2분 전에. 준우승을 우승이라고.]
[요환이 형. 꼭 2분 전이라고 콕 짚어야만 속이 후련했어?]
[아무튼, 다들 인터넷에 제1회 스드리그를 검색해 보세요. 그러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 어? 진짠데? 첫 스드리그가 게이머스 포럼 배 스드리그야.
- 진짜 맞네.
김요환의 말에 사실 논증이 바로 해결됐다.
선수들 인터뷰가 이어졌다.
[대한민국 최초의 스드리그를 만든 사람도 우리 윤태식 회장님이고 최초로 기업에서 지원하는 프로게임단을 만든 것도 우리 윤태식 회장님이라는 말이죠.]
[그 시절에 대회에 가면요. 벤으로 대회장에 오면서 팀 유니폼까지 입는 곳은 딱 우리뿐이었어요. 다들 시기 질투가 장난 아니었다니까요?]
- 전 프로게이머 채진영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때 대회장에서 RA. 당시 TFA는 유난히 포스가 넘치고 빛나는 팀이라서 다들 부러워했습니다.
- 전 프로게이머 고기봉입니다. 사실 인정합니다.
- 프로게이머 박태형입니다. 저때 진짜 장난 아니었죠. 저팀 선수들이랑 인맥 좀 있다는 선수들은 죄다 팀에 자리 더 없냐고 물어보고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안달하고 그랬었습니다.
- 대박··· 진짜가 나타났다!?!?!?
- 구라 즐~ 사칭 즐~
- 다들 정말 프로게이머들 맞으심?
확인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몇몇 프로게이머는 SNS를 통해 자신이 해당 채팅을 올린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증했고 덕분에 저 모든 글이 진짜 프로게이머의 글이라는 인정을 받게 됐다.
‘아무래도 프로게이머와 관련된 방송이다 보니 업계 사람들이 본방 사수를 꽤 해주는 모양이야.’
덕분에 상황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본래 방송의 마무리 주제는 ‘RA가 초기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었고 이쪽에 포커싱을 맞춘 상태였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반응과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증언들로 흡사 ‘윤태식 회장이 만들어 온 e-sports’라는 분위기로 마무리가 되었다.
결과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실시감 검색어 순위가 증명했다.
1위 - 1회 스드리그
2위 - 윤태식 e스포츠
3위 - e스포츠의 아버지
등등··· 이와 비슷비슷한 검색어들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빠르게 차지한 것이다.
이래서 계획을 제아무리 세워봐야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프로게이머를 보다’가 방영된 이후로 e-sports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윤태식이라는 이름 석 자는 e-sports의 역사 그 자체로 각인이 되어버렸다.
“요즘 회장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아니. 프로게이머를 보여주라니까. 왜 엉뚱하게 저를 보여주고 그러십니까?”
“그렇다고 프로게이머의 이미지 개선에 실패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도 당당한 김선일 국장의 태도.
그러나 이 태도를 나무랄 수 없는 것은 그의 말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방송 이후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을 과거처럼 ‘게임 폐인’으로 천시하던 분위기는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즉, 본래의 목적은 목적대로 달성하면서 시청자도 잡았다.
그뿐이랴.
이번 방송이 해낸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방송이 나간 이후로 우리 팀 선수단이 사용하는 컴퓨터의 판매량이 엄청나게 올랐다고 들었습니다.”
뉴 온라인의 성공을 위해서 만들었던 레오닌 컴퓨터.
최고의 가성비로 국내 게이머들에게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대부분 보급형은 레오닌, 최고급은 대기업이라는 인식이 강했었다. 하지만 방송에서 프로게이머들이 레오닌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게이머가 새로 구매할 컴퓨터로 레오닌을 선택했다.
뜻밖의 광고 효과다.
“요즘 RA 선수단 한정판 모델을 생산할까 하고 있더군요.”
마우스, 마우스 패드, 키보드 등에 RA의 로고를 넣고 선수의 사인과 이름을 넣은 세트를 생산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원래대로라면 10년쯤 후에나 등장할 아이템들이지만, 방송이 워낙 크게 성공한 덕분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래에서도 본래 한국에서 시작했다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결국 중국에 선수를 빼앗겼었지.’
그 힘든 시작을 일궈놓고도 탐스러운 열매는 남이 먹어버린 속상했던 기억. 이는 꿈속 미래에 불과하다.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지금은 그렇게 될 일이 없을 것이다.
‘이건 프로게이머들만 잘 활용하면 안 팔릴 수가 없어.’
원래 게임이 인기가 있으면 해당 게임에 관련된 굿즈들도 엄청나게 팔리는 법이다. 그런데 인기 있는 게임인 데다가 관련 프로 스포츠까지 사랑받고 있다면?
이건 관련 굿즈들을 공장에서 마구 찍어내도 어떻게든 팔리는 게 당연하다.
이뿐이겠는가. 여기에 인기 선수들을 활용하면 이건 땅 짚고 헤엄치면서 돈을 왕창왕창 벌어들이는 노다지 산업이 된다.
‘꿈속 미래에서 무시해버리는 바람에 몽땅 중국에 뺏긴 게 바로 이거라고.’
당시 한국은 이 분야의 시장성과 확장성을 너무 무시했다. 당장만 바라보고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근시안적 사고와 게임에 대한 편견이 불러일으킨 참사였다.
< 틀을 만드는 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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