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틀을 만드는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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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T의 기획 방송인 ‘프로게이머를 보다’는 반전의 묘미를 살리기 위함인지 일단, 프로게이머의 가장 화려한 부분을 보여주었다.
2004년 리그 우승 장면!
RA는 프로리그가 생겼던 초창기에 우승을 밥 먹듯이 했으나 최근에는 그 기세가 많이 누그러진 상태다. 과거에는 독보적인 원탑이었다면 현재는 3강 5약 중 3강에 속하는 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리그 우승은 의미가 깊었다.
[젊음의 거리 대학로.]
내래이션과 함께 카메라가 사람들을 비췄다.
[이곳에 북적북적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유난히 눈에 드러나네요. 과연 이 사람들은 대체 왜 이곳에 모여 있는 걸까요?]
흡사 2002년의 월드컵을 보는 것처럼 끝없이 몰려온 수많은 관객.
이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기적과도 같은 역전승을 해내는 선수들.
결국, 우승을 이룬 선수들이 환호하며 뜨겁게 포옹했다. 한껏 모여드는 스포트라이트는 별다른 편집이 없어도 충분히 화려했다.
열광의 한복판에서 카메라의 시야가 바뀌었다. 줄줄이 늘어선 이들은 가슴에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한껏 기대하는 중인 젊은 여성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 여기에서 사인회가 있다고 해서요!
- RA 팬 사인회 한다고 해서 수업 끝나자마자 종례도 안 하고 뛰어왔어요.
멀리 비치는 프로게이머의 모습. 줌 인으로 미소 짓고 감동에 겨운 팬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보였다.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RA 선수들. 구름처럼 몰려든 관중의 모습은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 되어 있습니다.]
내게도 새삼스러운 광경이다.
RA의 경기나 리그의 성적 같은 건 한 번씩 보고로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런 행사들까지 다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팬 사인회를 진행했었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는데 현장을 관람하니 이건 내래이션 그대로였다.
진짜 연예인이나 마찬가지다.
사인을 받고 악수를 하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졌다. 게임 플레이 화면과 승리하고 MC와 대화하는 모습. 한 마디, 한 마디에 열광하는 구름 같은 팬들의 환호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할애된 시간이 초반 5분이었다.
‘슬슬 시작이군.’
찰칵.
끝 모르고 이어질 것만 같은 프로게이머의 화려함은 장식한 방송은 사진 컷 한 장과 함께 스르르 내려가며 점점 차분해졌다. 이윽고, 한껏 꾸민 무대 위가 아닌 현실의 모습을 비쳤다.
바로 선수들의 숙소였다.
[용산구에 있는 RA의 선수단 숙소.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래도 숙소 구석구석 걸려 있는 선수들의 프로필 사진입니다.]
“아··· 방송에 나오는 건데 그래도 청소라도 좀 하지.”
리얼함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정리정돈 정도는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친숙한 배경이 잠시 비쳤다. 그리고 내래이션이 나왔다.
[오케이. 일단은 여기까지. 지금부터! 너무나도 리얼하고 또 지금까지는 몰랐던 선수들의 진짜 모습. 프로게이머를 보다를 시작합니다.]
시계를 보았다.
‘인트로에만 쓴 시간이 무려 7분.’
실시간 반응을 보고자 채팅창을 확인했다.
- 역시. 아주 프로게이머를 동경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구만.
- 거기에 우상화한다고 아주 자기에 게임단을 메인으로 두고 방송 만든 거 봐. ㅉㅉㅉ 이런 회사가 나라를 망치는 거 아닌가?
- ㄴㄴㄴ 이건 그냥 인식이 똥이었던 프로게이머들의 위상이 이만큼이나 올라갔다. 이런 걸 이야기하는 거 아님?
- 마즘. 이걸 가지고 뭔 우상화임? 동경의 대상? 그렇게 베베 꼬여서 일상생활 가능하심?
- ㅈㄹ한다. 이게 우상화가 아니면 뭐가 우상화야? 대가리로 생각이라는 건 가능하냐?
욕설이 한가득하다.
“베리 굿.”
욕을 모으는 변태라서가 아니다. 내가 우려하는 건 채널을 돌려버리는 일이고 무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을 보라.
일단 끌어모은 시청자들은 제대로 꽉 붙잡고 있지 않던가!
‘잘 되고 있어.’
인터넷 기사에서 어그로에 끌려 방송을 보러 온 시청자들은 어떻게든 깔 것들을 찾아서 눈을 부릅떴다. 반대편에서는 그런 채팅이 나올 때마다 실드 성 채팅을 올리며 싸웠다. 덕분에 7분이나 되는 인트로는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가게 되었다.
- 이야~ 근데 무슨 게임 폐인들 숙소가 이렇게 좋냐?
- 그러게 진짜 개 좋네?
- ㅅㅂ 내 방보다 쩔어.
RA의 숙소는 전 세계의 어떤 프로게임단을 예로 들어도 단언컨대 가장 훌륭한 숙소라고 자부할 수 있다.
총 4층으로 이루어진 건물.
3층과 4층은 선수들의 생활공간이며 2층은 연습실, 1층은 선수들이 꾸준한 운동을 할 수 있게 헬스장과 함께 방송 출연을 위해 매일 피부 관리를 받을 수 있는 샵까지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비용은 회사에서 전액 지원한다.
‘1층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1층까지 나오면 아주 게거품을 물겠네.’
물론 방송의 콘셉트 때문에라도 1층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내가 틀렸군. 저기도 나오네?’
뒤이어 본격적인 장면들이 나왔다.
이른 아침부터 촬영이 시작된 숙소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선수들의 부스스한 모습과 함께 그들의 하루 스케줄 표가 공개되는 중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식사.
8시부터 개인 연습 시작.
12시에 점심 식사 후 팀 단위 전략 시간.
그리고 또 연습한다.
- 스케줄이 뭐 저래?
- 계속 연습? 하루에 연습을 몇 시간이나 하는 거야?
- ㅋㅋㅋ 진짜 죽어라 게임하는구만?
일반인들에게 스타 드래프트는 게임이지만, 이들에게 스드는 게임이 아니다. 일이자 직업이며 생계수단이다. 남들이 출근해서 근무하듯이 이들도 매일 연습을 통해 근무하는 것이다.
한편, 그나마 동경할 만한 1군 선수들의 환경과 처우와는 다른 2군의 암담한 모습도 나왔다. 여기에는 대비 효과를 주기 위해 꿈과 환상과도 같은 1군에서 더욱 극적으로 2군을 보여주었다.
- ㅁㅊ 얘들은 하루 종일 서로 연습 경기하고 다시 리플레이 분석하고 또다시 연습 경기하고···
오전 6시부터 시작되는 일과는 1군이나 2군 모두 동일하다. 사실 스케줄 자체는 1군과 2군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더욱 암담하게 보이는 것은 2군의 무한 경쟁 때문이다.
- 저게 전부냐? 게임+분석?
- 온니 저거네?
정규 연습은 오후 5시면 모두 끝이 난다. 그 이후로는 완전히 개인의 자유시간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2군 게이머들은 누구 하나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야근하는 직장인처럼 눈에 불을 켜고 게임을 했다.
째깍째깍.
둥근 시계의 분침이 빠르게 움직인다.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움직이는 게이머들을 지켜보던 카메라가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 다가갔다.
[연습 시간이 다 끝났는데, 왜 계속 연습만 하고 계시는 거예요?]
보다 못한 PD의 물음.
이제 막 한 게임을 끝낸 2군 선수와의 인터뷰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은 무조건 실력으로 평가받는 세계라서요.]
[그럼 실력을 위해서 계속 연습만 하신다는 말씀이세요?]
[다들 보세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실력을 키우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없잖아요. 여기서 제가 먼저 일어나면 저 선수들이 저보다 먼저 1군에 들어갈 거 같으니까··· 그게 불안한 거죠.]
[2군이기는 하지만 RA에 뽑혔다면 그것만으로도 실력은 인정받은 게 아닌가요?]
선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피곤함에 절은 웃음을 지었다.
[그건 여기에 있는 선수들 전부 다 똑같아요. 이 중에 그 인정을 안 받은 사람이 있을까요? 전부 다 자기 지역에서는 한가락 하던 사람들이에요.]
집중력을 불태우는 선수들은 게임이 끝나는 순간 중얼거리나 메모하며 자신의 패인을 짧게 기록하기도 했다. 자신만의 오답 노트를 만들어서 만점을 노리는 수험생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 사이로 세상을 일찍 깨달아버린 청춘의 여상한 대답이 곧 들렸다.
[그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쉴 시간이 없죠.]
이 인터뷰를 끝으로 방송 카메라는 선수들이 아닌 해가 저무는 숙소의 외벽을 보여주었다. 오후 5시를 넘어 11시가 되도록 연습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윽고 자막에 새벽 1시라 나온 뒤에야 비로소 숙소의 모든 불이 꺼졌다.
일과의 마무리였다.
- 와··· 매일 저렇게 생활을 한다고?
- 순진하기는. 다 짜고 하는 거임. 방송 촬영한다니까 하루 빡세게 무리한 거임.
- 글쎄요. 저 사람들 프로입니다, 프로. 선수들 컨디션이 방송 촬영보다 중요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방송국을 배려해서 일부러 저랬을까요?
- 연기치고는 리얼하기는 했다만, 진짜 맨날 저런다는 건 오바임.
- ㅇㅇ
무턱대고 공격하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채팅창은 시작과 달리 진행에 따라 조금씩 변화했다. 점차 게이머들을 진짜 프로 선수로 보아주는 시청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촬영 2일 차에는 다른 모습을 비쳤다.
선수가 아닌 코치진을 카메라가 담는다.
[어제 선수들을 보니까 진짜 늦게까지 연습하고 또 아무렇지 않게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더라고요.]
[매일 하는 거니 이제는 익숙해진 겁니다.]
[그걸 보고 저희 제작진에서는 군대를 보는 기분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 일과가 너무 빡빡한 거 아닌가요?]
[선수들이 힘든 하루를 보내는 건 알고 있지만, 저희가 강제하는 건 아닙니다. 오후 5시 이후부터는 철저하게 개인 시간으로 분류하고 있고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오직 선수들의 재량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열심히 하는 것일 뿐이지요.]
코치의 답변 중 차가운 현실이 나왔다.
[그 정도의 각오와 정신이 없는 선수들은 견디지 못했을 뿐입니다. 견뎌낸 선수들만 남은 거죠.]
[그러면 감독님은 선수들이 그렇게까지 열정적으로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꿈이라고 봅니다.]
[꿈이요?]
그의 시선이 비슷하지만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의 1군을 향했다.
[언제까지나 2군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곳은 무한 경쟁의 세계에요. 2군이 언제까지나 2군인 것도 아니고 1군에 한 번 들어왔다고 평생 1군도 아니거든요.]
[많은 시청자분이 궁금해하실 텐데 2군과 1군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통과해야 하는 점수가 있을까요?]
[오직 하나입니다. 실력이죠. 매 분기마다 모든 선수가 테스트를 합니다. 여기에는 1군도 빠지지 않아요. 거기서 통과하면 1군이 되는 거고 실패하면 2군이 되는 겁니다.]
[그럼 1군이 2군으로 내려가기도 하는 건가요?]
[물론이죠.]
다시금 이른 아침에 운동하는 2군과 1군을 비췄다. 인터뷰 다음이라 그런지 이번에는 다른 모습을 강조했다. 1군 선수 중에서도 2군과 태도만 달랐을 뿐, 결원은 전혀 없다는 지점이었다.
[대회를 보면 1군 선수들이 바뀌는 일이 매우 적은데 그래도 그렇게 바뀌나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두가 아는 선수들의 실력은 여간해서는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 둘은 프로리그에 나오는 선수만 1군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
[축구나 야구에도 벤치 멤버가 있지 않습니까? 프로 게임단도 똑같습니다. 벤치멤버가 있어요. 그리고 수시로 바뀌는 대부분의 멤버들은 바로 그 벤치 멤버입니다.]
[아······.]
[다들 그냥 게임 좀 하면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데, 아마추어 중에 최고라고 하는 사람들이 준프로 자격을 땁니다. 거기에서도 선택받은 사람들이 2군 선수가 될 수 있죠. 그리고 그 2군 선수들 중에서 발군의 선수만이 1군 선수가 됩니다.]
다시금 선수들이 짧게 화면에 담겼다.
같은 면면이지만 느껴지는 온도는 달랐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1군 내에서도 또 경쟁해서 엔트리 멤버가 되어야 하니까요. 그때가 되어서야 진짜, 비로소 사람들이 말하는 프로게이머가 되는 겁니다.]
화려한 정점에 오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난관은 실로 가혹했다. 이 점이 화면 바깥에까지 물씬 느껴졌다.
한편, 아까와는 여러모로 달라진 채팅창을 힐끗 보며 나는 웃었다.
‘저건 조금 오바한 건데.’
방송에는 저리 나갔으나 실상은 다르다. RA의 경우 벤치라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냥 1군 선수에만 올라가도 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팀 리그 성적으로 받는 보너스만 연간 2,000만 원은 보장받거든.’
여기에 개인 연봉으로 최소치인 2,000만 원을 받으면 합해서 연 4,000만 원의 수입이 생기는 셈이다. 이건 단 한 경기조차도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오직 1군이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돈이다.
당연하게도 엔트리 멤버가 되면?
수익은 더더욱 커진다. 물론, 업계가 다 이런 건 아니다.
우리 게임단만의 특수성이다.
‘애초에 연봉이 높기도 하고 또 3강 중에 하나라서이기도 하니까 가능하거든. 나머지 5팀에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으니까.’
딱히 방송에서 보여줄 필요가 없는 내용이다. 게다가 이런 것까지 보여주면 정말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릴지도 몰라서 이 내용은 빠졌다.
이래서 다큐멘터리스럽게 나오더라도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닌 것이다.
< 틀을 만드는 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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