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12화 (312/577)

< 잘났다 >

김선일 국장은 절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정말로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기대되는군요.”

“예! 회장님.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바람직한 보고 시간이었다. 그렇게 김선일 국장과의 이야기를 다 듣고서 그가 남기고 간 보고서를 혼자 천천히 읽어 보았다.

일반적으로 한 프로그램에 넣을 수 있는 광고는 해당 프로그램이 가진 총 방송 시간의 10%다. 회장님과 한판이 1시간 30분짜리 방송이니 여기에는 9분가량의 광고를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광고 1개당 15초라고 잡으면 36개의 광고가 들어갈 수 있고. 어라? 뭐야. 생각보다 제법 많이 들어가잖아?’

무려 36개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토록 많은 광고를 넣을 수 있는데도 골라 담아야 할 만큼 회장님과 한판을 찾는 광고주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좋으면서도 아직은 축포를 터트리기도 곤란한 것이 있으니 광고가 모인 방송은 오직 회장님과 한판뿐이라는 거였다.

인기몰이를 제법 하면서 GGT라는 인터넷 방송국의 인지도가 올라가기는 했으나 다른 채널에 대한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 부분은 시간이 차츰 해결해주겠지. 그렇다고 내가 오만가지에 다 출연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도 우리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차차 괜찮은 프로그램들을 마련하면 언젠가는 모든 방송에 괜찮은 광고를 다 때려 박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매일 8시부터 10시까지를 중심으로 볼만한 프로그램들을 발굴해볼까?’

케이블 방송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채널을 돌려도 전부 비슷비슷한 방송만 하는 공중파에 실망한 젊은 층이 방송규제를 피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케이블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 정보를 잘만 활용하면 괜찮? 결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방식을 우리도 도입해보자. 공중파와의 경쟁은 불가능하겠지만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케이블과의 경쟁에서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거야.’

월요일부터 일요일.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 총 세 시간.

딱 이 시간만 잡으면 방송국 전체의 위상이 올라가게 된다.

‘해보자.’

오래간만에 꿈속 미래의 기억을 차분하게 검색할 때가 왔다.

케이블 TV의 예능은 2010년도 이후에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때의 방송들은 나도 꽤 즐겨봤었기에 선명하게 기억하는 편이었다. 다만, 방영되는 프로그램의 아이템과 포맷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뿐 어떤 식으로 방송을 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게임 개발도 마찬가였으니까.

‘개발자들이 게임을 만드는 것처럼 방송도 제작진에게 팁만 주면 알아서 잘 만들어줄 거야.’

이럴 때 불러야 하는 사람은?

“김선일 국장님.”

“예. 회장님.”

호출하니 그가 바로 달려왔다.

“회장님과 한판의 성공을 보니 우리 방송국에 더 많은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요즘 새로운 프로그램을 발굴하는 데에 다들 집중하고 있습니다.”

“아주 좋군요. 바로 그것 때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의 콘셉트와 특성들을 김선일 국장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는 LON 온라인의 인기에 편승해서 게임의 팬을 방송의 시청자로 끌어들이는 프로그램이다.

“LON 온라인이 만들어진 과정. 그리고 앞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대한 것을 예능과 다큐멘터리의 중간 형태로 제작을 해서 보여줍시다.”

“지루하지 않겠습니까?”

평범하게 그냥 다큐멘터리와 같은 형식으로 보여준다면 당연히 지루할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일반적으로 과정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또한, 다른 방송들은 시청자를 모으기 위해서 만들려 하는 것이지만 이건 단순하게 시청률만 보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게임은 애들 오락거리가 아닙니다. 가장 진보적인 종합예술입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시청자에 집착할 필요도 없었다.

“편하게 1주에 1편씩 총 4개월 분량의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생각하십시오. 매주 콘셉트를 잡고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 스킬을 테스트하는 과정. 성우들이 녹음하는 과정. 이러한 것들을 재미있게만 모아서 만드는 겁니다.”

여기에 시청자 확보보다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방송을 하나 더 준비한다.

“다음은 프로게임단 24시입니다.”

사건 25시 같은 탐사보도 및 고발 프로그램이 아니다.

지난번에 진호의 방송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 이를 방송으로 만드는 거다. 그래도 이 방송은 진호처럼 말을 곧잘 하고 인기도 많은 프로 선수들을 잘만 활용하면 충분히 시청자 확보도 가능할 것 같다는 기대감도 있다.

“일전에 송진호의 방송을 보니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에 대해 대중은 그냥 놀고먹으면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직종으로 착각을 많이 하더군요. 이 얼마나 큰 오해입니까? 그러니 사람들에게 프로게이머들의 고충을 제대로 까발려 줍시다. 다들 재미있어하는 게임도 직업이 되면 스트레스가 된다는 진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건 잘만 살리면 정말 재미있겠는데요?”

김선일 국장이 이번에는 뽑아낼 소스가 많다며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일단 시작은 섭외하기 가장 만만한 RA로 시작하고 방송에 탄력을 받으면 다른 게임단도 섭외해서 방송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대충 콘셉트를 듣자마자 어떻게 만들면 방송으로 나갈 수 있느냐에 대한 견적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관련 분야는 그쪽의 전문가에게 일임하는 게 베스트야.’

믿음직한 모습이다. 다음은 입에 지퍼를 채우는 제스처를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 비밀을 엄수하면서 제작해야 합니다.”

“비밀 엄수요?”

목소리를 낮추자 그가 더욱 집중했다. 밝은 대낮에 음모라도 꾸미는 것처럼 말이다.

“우선 가제를 크리미널 씬으로 지어보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방송인들이 모여서 추리 게임을 하는 겁니다. 어설프게 인기 있는 멍청이들을 데리고 방송하는 게 아니라 정말 빠릿빠릿하고 머리가 잘 돌아갈 것 같은 유명인들을 섭외하십시오.”

“회장님. 모여서 추리 게임을 한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를 않습니다.”

김선일 국장의 표정을 보니 어디 보드게임이나 패키지 게임을 단체로 하는 그런 구도를 상상하는 것 같았다.

‘그래. 직접 추리 게임 세트장을 만들어서 거기서 직접 추리를 한다는 건 지금 시대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겠지.’

나는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한 보드게임을 올려서 김선일 국장에게 보여주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추리게임 중 하나인 ‘크루’였다.

“방송에서 이 게임을 다 같이 하는 겁니까?”

역시나 오해가 깊어진다.

“아닙니다. 이 보드게임과 같은 무대를 우리가 만들어주고 출연자들이 직접 풀어내는 겁니다.”

사실상 출연자들은 이 보드게임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방 탈출 게임을 휴대폰으로 하느냐? 방 탈출 카페로 가서 하느냐?

그런 차이의 개념일 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런 개념에 익숙하지 못한 김선일 국장은 혼자만의 생각이 깊어졌다. 내 역할이 이런 고정된 사고방식의 틀을 깨어주는 거다.

“너무 깊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그냥 우리가 방송 스튜디오에 무대를 만들고 거기에 단서를 넣으면 출연자들이 직접 게임을 진행하는 거니까요.”

“아!”

처음에 이해를 하는 게 어렵지 이해만 한다면 개념 자체는 아주 쉽다.

물론,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건 만만치 않다.

“이해되셨나 봅니다.”

“네.”

흐뭇하게 웃으며 마지막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끝으로, 우리도 LON 온라인 리그를 하나 운영합시다.”

이 제안에는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양대 리그가 이미 있는 실정입니다. 저희가 리그를 운영하는 게 딱히 메리트는 없지 않을까요?”

게임 리그는 아무래도 이미 두 개의 방송사가 완벽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끼어들어서 이익을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가 이를 모르고 말했겠는가.

“굳이 프로리그를 또 만들자는 게 아닙니다. 이미 자리를 잘 잡았는데 굳이 우리가 거기에 리그를 하나 더 더해서 시선이 분산되면 LON 온라인에도 딱히 긍정적이지 않아요.”

“그럼 어떤 리그를 생각하시고 계신 건지······.”

“2부 리그를 만드는 겁니다.”

“예?”

LON 온라인에서 프로리그에 문을 두드리는 팀은 무려 50개가 넘는다. 그러나 이 중에서 방송에 언급이라도 한 번 될 수 있는 팀은 32개다. 또한, 그나마 ‘우리도 프로팀!’이라는 말이나마 할 수 있는 곳이 16개이고 제대로 된 프로팀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팀은 달랑 8개가 전부였다.

지금이야 초창기니까 저렇게 많은 팀이 프로 리그를 준비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8개의 팀을 제외하고는 전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를 당연한 시장 논리로 볼 수 있으나, 숫자가 아닌 현실을 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소중한 청춘의 한 자락을 불태운 친구들이 경력조차 남지 않은 채 그대로 프로의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진로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 발상은 이렇다.

‘그런 선수들만 모아서 게임을 하는 리그가 존재한다면? 또 그 나름대로의 매력을 해당 리그에 넣을 수 있다면?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원하는 게이머의 삶을 살 수 있지는 않을까?’

이건 가능성이 낮은 도전이지만 성공한다면 e-sports의 판을 키울 수 있는 카드였다. 아울러, 성공할 때에는 e-sports의 판을 키운 업적을 GGT가 가져오게 된다.

“회장님. 1부도 시청률 1%를 만들기가 어려운데 2부 리그를 사람들이 보겠습니까? 매우 외람된 비교이지만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의 관심도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볼만하게 만들어야지요.”

김선일 국장의 얼굴에는 마치 이런 글자가 쓰여 있는 거 같은 표정이 지어졌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만들건대?’

당신의 심정을 잘 안다. 그래서 해결책도 강구해둔 상태다. 나는 나조차도 풀지 못하는 숙제를 무작정 내리고 독촉하는 나쁜 상사가 아니니까.

“도시연고제를 만들 겁니다.”

“네?”

프로스포츠에는 있지만, e-sports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아무래도 방송을 위한 시설부터, 대회를 위한 시절까지 대부분이 서울에 몰려 있는 것이 현실인 대한민국에서 프로게임이 도시연고제를 택하기는 어렵겠지.’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고 1부도 아닌 2부 리그에서 굳이 도시연고제라는 것에 도전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꼭 대단한 시설에서 대회를 열 필요는 없는 거잖아?’

어차피 2부 리그다.

그냥 적당히 관객이 입장할 수 있고 또 적당히 게임만 할 수 있으면 어디라도 경기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게다가 프로 리그가 아니니까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잡지 않고 할 수 있고 이를 잘 활용해서 프로게이머보다는 관객과 더 가까이서 소통할 수 있는 게이머들로 콘셉트를 잡는다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이 됐다.

“1부 리그에 있는 팀의 코치진이 우리 리그를 보면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원을 언제라도 스카우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선수를 팔아서 버는 이득으로 팀은 또 유지가 되고 말이지요.”

윈-윈 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쨌거나 출전하는 팀은 방송에 나오는 만큼 자기들 하기에 따라서 스폰서가 붙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긴다. 1부 리그의 프로팀처럼 큰 스폰서가 붙을 필요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자생할 수 있는 수준의 스폰이면 만족한다.

“과거에 비하면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각 지역끼리의 경쟁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1부 리그와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있습니다. 생각대로 잘 안 되더라도 LON 온라인을 위해서 투자한 셈 치면 그만이라는 거지요.”

나는 매우 부자다. 한두 번 넘어진다고 망하거나 다리 부러지는 일은 없다.

막무가내로 콘텐츠를 찍어내도 되고 망해도 상관없다. 이렇듯 자신감은 막강한 자본력에서 나온다.

‘국내 매출만으로도 충분히 다 커버할 수 있어.’

LON 온라인은 하루가 다르게 점유율이 상승하고 있다. 요즘 분위기면 두 달 안에 플레지를 잡고 PC방 점유율 1위를 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려 6년이나 1위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장기 집권하던 플레지가 드디어 왕좌를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보다 마지막 말이 김선일 국장에게는 큰 힘이 된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렇게까지 생각하신다면 저희야 걱정할 게 없죠.”

잘못되었을 때에 대한 책임이 없다. 이것만큼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것이 또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렇게 시작한 방송이 생각 이상의 성과를 내면?

그만큼 더 달콤한 보상이 따라온다.

김선일 국장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전혀 없는 아이템이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빠르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 잘났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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