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304화 (304/577)

< 놀면서 버는 중~ >

재차 하는 촬영이다. 이번에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맥이 빠질 게 자명했다. 물론 좋은 결과가 있도록 만들 수 있고 또한 만들어내는 여유가 있는 것이 녹화의 묘미지만 수고는 덜 할수록 좋은 일 아니겠는가.

‘나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보자.’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할 몫을 유기적으로 해내야 바람직한 결과를 보기 마련이다. 나는 좋은 방송을 위해 내가 어떤 일을 더 해야 할지 고민했고 일단 게임 자체의 그림이 좋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뭐니 뭐니 해도 결국은 게임을 보여주는 방송이기 때문이다.

‘연예인을 데려다 놓고 회장님만 돋보이면 곤란하지. 팬들을 자기들의 스타가 돋보이기를 원할 테니까. 즉, 이 친구들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당장의 잠재력을 모두 뽑아내는 게 우선이겠어.’

콘텐츠가 콘텐츠인 만큼 방송을 위해 상황극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전략이나 확실히 짜는 게 나을 것이다.

신성의 멤버 중에 가장 실력이 좋은 에녹이 1,678점의 골드다. 반면에 이번에 상대하게 될 팀은 어떤 클랜이 걸리더라도 최소 1,800점 이상의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만 했다.

1600점대도 1800점대도 래더 등급은 전부 골드지만, 아직 등급이 많이 세분화 되지 않아서 같은 등급일 뿐. 실력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런 실력차를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은 뭐가 있을까?’

피지컬은 상대가 압도적이다. 이는 아무리 좋은 전략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전투력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라는 의미이고 팀원들을 믿고 키우는 일은 당장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거였다.

나중에 더 가르치고 실력이 나아지면서 차차 다른 모습을 비칠 수 있을 뿐, 오늘은 나 혼자서 그 전투력을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되겠어. 왕귀형 영웅을 하자.’

2003년에 개봉한 3부작 영화의 마지막인 3편의 부제. 왕의 귀환을 따서 이름을 붙인 이 별명은 초반에 비실비실한 영웅이지만, 파밍을 통해서 점점 강력해지고 후반에는 1인 군단의 위용을 발휘할 수 있는 영웅들을 의미한다.

잘 크면 정말 강력하다!

하지만 이건 반대의 의미도 된다. 잘 크지 못하면 게임이 끝날 때까지 비실비실한 채로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하게 되어서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는 아군에서 왕귀형 영웅을 고르면 그 판은 터지거나 터트리거나의 복불복으로 생각하게 된다.

‘혼자서 끝까지 잘 해낼 수 있는 지금의 나한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고.’

복불복의 왕귀 영웅!

그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캐릭터로는 아누비스가 최고다.

Q스킬일 사신의 징벌에 상대가 죽으면 Q의 스킬 데미지가 영구적으로 3이 증가하는 특징을 가졌다. 그 탓에 아누비스는 초반에 노딜의 대명사지만 300 이상의 스택을 쌓은 후반으로 가면서부터는 5대 1로 싸워도 이겨버리는 놀라운 광경을 종종 만들게 된다.

‘신성 친구들이 돋보이는 것도 중요하긴 한데 그건 게임을 이기고 나서부터 생각할 문제야. 졌지만 잘 싸웠다는 식의 상황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어.’

방향을 정했으니 이제는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할 차례다.

아군의 수준과 상대편의 실력을 고려할 때, 내가 쌓아야 할 스택은 최소 500 이상이 된다. 여기서 오는 문제점은 과연 우리 팀이 과연 그때까지 버텨줄 수 있느냐가 되니 이 문제에 대하여 회의하고 단점을 보완하면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방향을 정한 뒤 신성 일행에게 물었다.

“멤버들 중에서 미드 라인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민호의 실력이 가장 좋습니다.”

에녹은 대답과 함께 민호를 향해 믿음직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에녹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에서 나오는 기운이 부담스러울 만도 했건만. 함께한 시간이 길었던 그룹이라서 그런지 민호는 그저 담담하게 받아드리고 있었다.

‘아이돌 중에서 서로 간의 신뢰와 친분이 가장 두터운 그룹이라더니 사실인가 보네.’

그윽하게 오고 가는 남자들의 시선에서 나는 이유 모를 부담감을 느끼고 작게 헛기침했다.

“좋군요. 그렇다면 다음. 원거리 딜러를 가장 잘하는 사람은?”

“저요. 접니다, 회장님.”

에디가 번쩍하고 손을 들었다.

한편, 자신 있게 손을 드는 에디와 달리 다른 멤버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회장님 말고 지금부터 형이라는 말을 입에 붙여보죠.”

“아··· 네. 그러시면 먼저 말을 편하게 해주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편하게요?”

“네.”

그 말에 아차 싶었다. 방송용으로 편하게 형이라 부르라 하긴 했는데 막상 준비가 안 된 건 나였던 모양이다.

‘그러지 뭐.’

초창기의 나였다면 ‘내가 연예인 연락처도 알고 형 동생 하는 사이야!’라며 내심 흥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벌이 됐고 할리우드처럼 아득하게 먼 나라로 여겼던 외국의 유명 인사들을 비롯하여 꿈속 미래와는 확실하게 다른 인맥을 맺고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상황이지 않던가.

수 백 번 느끼는 바지만 돈과 지위는 자존감과 자존심을 많이 높여준다. 지나치게 오만해지는 것만 조심한다면 자신감 회복으로는 이만한 게 없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네. 그럼 저희도 형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호칭만 형이고 말투는 계속 그렇게 딱딱하게 쓰는 건 아니겠지?”

“말투도 원하시면 조금 유하게 하도록 할게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말투가 되어버리는 에녹의 눈이 내 쪽으로 향했다. 배우까지 겸업하고 있어서 더 그런지 금방 친근감마저 전해오는 것 같았다.

“말투는 이렇게 넘어가도록 하고, 에디가 가장 원거리 딜러를 잘한다고?”

“네!”

“그게···”

에디가 신성의 밝은 분위기를 담당하는 막내인 만큼 신이 나서 높아진 톤으로 대답했는데 에녹은 상당히 조심스럽다는 감정을 내비쳤다.

“둘이 반응이 다른데?”

“사실 원거리 딜러는 동훈이가 주로 하고, 에디는 동훈이의 빈자리를 채우는 역할이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동훈이가 없어서요.”

그러니까 에디는 후보 선수의 역할이라는 이야기인가 보다.

“상관없어. 오늘 지금 여기에 있는 멤버 중에 에디가 제일 잘하면 그거로 된 거야.”

“그렇다면 에디가 지금 저희 중에는 가장 잘하는 게 맞네요.”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내 말에서 무언가 결정했다는 느낌을 받은 신성의 멤버들이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에녹은 에디와 함께 바텀라인으로 가서 에디를 보조해주면서 플레이해. 그리고 민호와 해성이는 탑 라인으로 가고.”

“그러면 두 명이 1개의 라인을 맡으라는 말씀이신 거네요?”

“그렇지.”

“그렇게 되면···”

안다. 상대보다 레벨업에서 손해를 보게 될 거라는 거. 거기다가 정글을 담당할 사람이 없어지니 전체적으로 획득하는 재화의 양에서도 밀리게 될 거다. 그러나 이건 일반적인 방식으로 라인만 서게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 질문은 그다음에 받을 테니.”

“네.”

“내가 미드라인으로 갈 거야. 영웅은 아누비스를 사용할 거고.”

아누비스라는 말에 멤버들의 표정에 의혹이 가득해졌다. 그들이 알고 있는 아누비스는 약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 좋아서 왕귀형 캐릭터이지 대부분의 유저들은 게임이 터질 때까지 강해져서 싸움에 참여하는 일 자체가 드물다. 그러니 승률도 떨어지고 승률이 떨어지는 만큼 픽률도 바닥을 치는 영웅이었다.

그런 신성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서 A4용지에 펜으로 대략적인 맵을 그렸다.

“어설프긴 하지만, 뭔지 이해는 될 거야. 이게 LON의 주요 맵이라 할 수 있는 영웅의 전장이야.”

정사각형의 바탕에 3갈래의 길. 그리고 그 길을 가로지르는 중간 물길. 여기저기 장애물과 중립몬스터들만 대충 표시해두면 게임의 맵으로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바텀라인에서는 에디가 CS를 담당하고, 에녹은 CS는 포기한 채로 상대만 견제하도록 해.”

“이러면 성장이 너무 차이나지 않을까요?”

“성장은 돈템과 바텀 라인 주변의 중립 몬스터 사냥을 통해서 하면 돼. 그리고 두 명이니까 적 라이너를 사냥하기에도 수월할 거고. 상대 정글러가 갱킹을 오더라도 방어하기에 용이해지겠지. 이해했어?”

“네.”

“탑 라인도 마찬가지야. 민호가 CS를 담당하고 해성이는 적 라이너가 CS를 잘 먹지 못하도록 견제를 해줘.”

“그래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목표는 밀리지 않고 최대한 버티는 거니까.”

굳이 적 라인을 이길 필요가 없다. 아니, 절대로 이기려 해서는 안 된다. 피지컬에서 차이나는 만큼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기려고 들었다가는 수습할 방법도 없어.’

상대하게 될 클랜도 모르고, 또 그들이 선택할 영웅도 모르는 상태이기에 이 이상 디테일한 작전을 구상하는 것은 괜한 헛짓거리다. 그렇기에 못 커도 되고 돈을 못 벌어도 되니까 타워 허깅으로 죽지만 말라는 조언을 반복하기로 결정했다.

물음에 대답해주고 있다 보니 어느덧 20분이 흘렀다. 그즈음 이혁주 PD가 회의실로 돌아왔다.

“회장님. 상대가 정해졌습니다.”

“제가 알만한 클랜인가요?”

“스페이스 마린이라는 클랜인데, 회장님께서 아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는 곳이군.’

스페이스 마린. 줄이면 SM이지만 아무래도 팀명을 그렇게 사용하기는 부담스러웠는지 대회에서는 SMe이라는 줄임말을 사용하는 팀이었다. 워드Ⅲ의 LON 시절부터 유명했던 스페이스 로그라는 대형 클랜의 실력자들이 나와서 만든 클랜이기도 했다.

실력은 딱 준프로 급!

LON 온라인의 프로리그 무대에 들어가고자 애쓰는 팀은 대략 50여 개다. 그 중에서 진짜 방송을 타고 경기를 보여줄 수 있는 팀은 32개 팀 뿐이며 스페이스 마린은 안타깝게도 32위 안에 들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지. 신성의 멤버들이 비벼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니까.’

처음 만나는 팀으로 딱 좋은 섭외였다. 다만, 이걸 바깥에서 듣는다면 ‘미쳤냐?’ 소리를 들을 것이다. 준프로 급의 팀을 골드와 실버의 조합으로 상대하면서 딱 좋다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능성을 자신하는 이유에는 스페이스 마린이 피지컬은 좋으나 팀워크가 부실하다는 약점이 있는 클랜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으로 보면 훌륭한데 이들의 게임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늘 삐걱거린다.

그것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패배할 확률은 훨씬 더 줄어들 것이다.

“경기는 언제 시작합니까?”

“20분쯤 뒤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너희들도 들었지?”

“네.”

다행히 내가 알고 있는 팀으로 대전 상대가 정해졌기에, 이들에 대한 주의사항 몇 가지를 더 알려줄 수 있었고, 그렇게 20분이 흐른 뒤 우리는 대결을 맞붙게 됐다.

*

재미와 기대를 함께했던 회장님과 한판의 촬영을 마친지 시간이 제법 흘렀다. 어느덧 그동안 고대하던 회장님과 한판이 처음으로 방송을 타는 날에 되었다. 나는 이른바 본방 사수를 하기 위해 회장실에서 만반의 자세를 갖췄다.

적당한 주전부리와 마실 것의 세팅이었다. 그러고 있을 즈음 한껏 흥이 오른 김선일 국장이 보고할 것이 있다며 찾아와서는 노트북을 내밀었다.

“회장님! 이거 보이십니까?”

“뭡니까?”

그저 인터넷 포털사이트만이 눈에 보일 뿐이다. 나보고 궁금한 것을 검색하라는 의미는 아닐텐데 이게 무슨 의도냐? 이런 눈빛으로 보니 김선일 국장이 재차 말했다.

“실시간 검색어를 봐주십시오.”

‘실시간 검색어? 그 기능이 벌써 생겨있나?’

무의식중에 상념이 들었지만, 곧 저 멀리 치워 버렸다. 나한테 중요한 건 이 기능이 언제 생겼느냐가 아니다. 그리고 김선일 국장이 말한 실시간 검색어를 눈으로 찾아보니 그곳에는 ‘1위 줄기세포, 2위 줄기세포 연구, 3위 회장님과 한판, 4위 GGT?’라고 나와 있었다.

방송시간이 다 되어가자 많은 사람이 회장님과 한판을 시청하기 위해서 검색을 하고 있었고 그 행동들이 반영된 결과였다. 덕분에 빠르게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하는 중이었다.

줄기세포에 관한 부분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 몰이를 하는 중이고 그걸 발표한 사람이 한국인이다 보니 붙박이로 1,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시대의 주요 이슈를 감안한다면 사실상 현재 최고의 검색어 순위에 회장님과 한판이 걸려 있는 셈이다.

김선일 국장은 ‘벌써부터 대박의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라며 자랑스럽게 찾아온 거였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기대해주고 있는 모양이군요. 이 정도면 과연 시청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처음으로 있는 일이라서 ‘어느 정도겠다.’라고 감히 예상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도 가늠해보자면 약 10만 명 정도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청률 1%라는 건 대략 5,000만 명의 한국인 중 1%가 시청하는 방송이라는 의미다. 물론 여기에는 표본 집단과 가구당이라는 개념이 변수로 추가되어야 하지만 대략적으로 1%의 시청률은 12만 명의 시청자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 방송이라 이런 개념과는 거리가 멀기에 %단위를 사용할 일은 없으나 명확한 시청자의 숫자와 타깃 층 덕분에 더욱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다는 점은 공중파나 케이블보다 훨씬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수도 있다.

< 놀면서 버는 중~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