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85화 (285/577)

< 칼리버 온라인 >

선구자의 행보. 그들이 보이는 최초라는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 첫 번째의 발견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에 후발주자가 선보이는 개선책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하물며 성주환 대표처럼 윤태식 회장의 방식을 그대로 흉내 낸다면 그 난도는 더욱 내려간다.

그는 자신의 직감인 줄 알지만, 애당초 윤태식 회장의 말에는 ‘결국 게임 트렌드는 흐르고 흘러서 MOS로 가게 될 것’이라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알아차린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이해만 해도 가능한 수준인 셈이다.

하지만 타인에게는 냉정해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것이 사람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지금처럼 탄탄대로를 달리고 훨훨 날아오른 시점에서는 더욱 자신을 돌아보기 어렵다. 주위에서 그의 판단에 무조건적인 찬사와 추켜세움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4월의 성공적인 프레젠테이션!

그 깔끔한 마무리가 불러온 여파는 실로 대단했다.

“아- 김 사장님. 하하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제 근황이야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실 테고··· 아이고~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거 어쩌나··· 물론입니다. 저도 사장님의 투자를 받고 싶기는 마음이야 굴뚝같죠.”

대한민국에 주인 없는 돈이 이토록 많은 줄이야!

비단길을 걷던 성주환 대표에게 황금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다. 입가에는 웃음이 넘쳐서 함지박 만하게 벌린 채 화통한 웃음만 나왔다. 소싯적에는 제발 한두 번이라도 있었으면 싶던 제안을 지금은 거절하느라 바쁠 지경이다.

“이게 다 기존 투자자분들이 자신의 지분율이 바뀌는 걸 원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투자자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던 영세 개발자는 더 이상 없었다. 어느덧 ‘아이고~ 사장님~’으로 시작하는 싹싹한 말투 대신 어깨에 힘이 들어가듯 말에도 슬쩍슬쩍 자존심이 새겨졌다. 굽실굽실하는 갑과 병의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사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뿐만이랴.

게임 잡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칼리버 온라인에 대해 극찬을 쏟아냈다.

【칼리버 온라인 국내 RTS 장르의 한 획을 긋는다.】

지난 2월 퍼블리싱 계약을 체결하고 수차례의 테스트와 세 차례의 이용자 간담회, 배틀 파티 등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칼리버 온라인’은 2005년 모노 소프트의 첫 포문을 연 게임이다.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의 깊이와 철학을 영웅들의 대전, 협동과 경쟁, 탄탄한 시나리오로 녹여낸 온라인 게임으로서 영웅의 숨겨진 이야기와 세계관이 녹아든 ‘시나리오 모드’에서는 싱글 플레이의 묘미를.

양 진영별 영웅들의 협력이 관건인 ‘모험 모드’에서는 파티플레이의 쾌감을.

양측 진영의 팽팽한 대립 속 전략전술에 따라 매번 결과를 달리하는 ‘전략전투 모드’에서는 경쟁의 짜릿함을 잘 살리고 있다.

【칼리버 온라인으로 게임역사에 새로운 장르를 창시하다!】

지금 잘 나가고 있는 게임들은 대부분 서양 혹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은 장르에 한발을 얹은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칼리버 온라인’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만들어낸 장르다.

여타의 게임과는 기대감부터가 다르고 그 무게감부터가 다른 게임이라고 자부할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의 아버지가 바로 성주환 대표 그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그가 밑줄을 쫙 그었다.

“좋군. 아주 좋아! 장르의 창시자! 게임의 아버지!”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평생 들었던 칭찬의 숫자를 넘어설 정도의 극찬을 들었다. 일반 유저만이 아니라 업계 종사자들마저 인정하니 성주환 대표의 심정은 그야말로 감개무량일 따름이다.

‘사실 이 게임의 전체적인 틀을 구상한 건 윤태식 회장이지만, 어차피 개발은 내가 했으니까 내가 아버지가 맞지.’

처음에는 일말의 양심이 거리낌을 안겨주었지만 삼인성호라는 옛말이 알려주듯 거짓이 여러 번 들리자 스스로 ‘맞아. 바로 내가 그 성주환이다’라며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티끌만큼 남아있던 양심을 날렸으니 한결 더 기쁨이 커져갔다.

‘역시 인생인 길게 보아야 하는 거구나. 노력하니 이런 날이 왔어. 참으로 애썼다. 정말 장하다!’

자신이 반대의 관점이었다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질만한 말이었지만, 지금 성주환의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냥 기쁨에 차서 방탕하게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성공이라는 금자탑을 쌓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존재하고 발목을 제대로 부여잡을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았다.

‘내 칼리버에 흠집을 낼 수 있는 그 자식. 윤태식을 조심해야 해.’

LON 개발의 총괄을 맡았던 그가 나왔다고 해서 게이머스 포럼 정도의 회사가 게임 개발을 멈출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집 나간 자식이 떵떵거리며 승승장구하니 게이머스 포럼에서 못난 질투심을 발휘할 수도 있었다.

“요즘 GF에서는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며칠 전에 새로운 업데이트 맵이 업로드되었습니다만, 공지사항으로 현 업로드가 마지막이고 다음 업로드는 기약이 없다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대응은커녕 아예 손을 놓은 분위기였다.

“기약이 없다?”

“네. 아마도 LON을 포기했다거나 저희와 같은 온라인 게임을 개발하기로 했다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윤태식.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성주환 대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온라인 게임으로 개발하고 있다면 칼리버 온라인처럼 미리미리 홍보를 해두는 것이 좋다. 일찍부터 홍보하지 않으면 야심 차게 출시해봤자 대중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 이 바닥 게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괜히 수익을 나눠주면서까지 퍼블리셔들이랑 함께 하는 게 아니지. 개발을 위한 투자는 물론이고 게임 출시 후의 홍보까지 일반 개발사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을 알아서 척척 해주니까. 그런데 홍보는커녕 정보를 아예 닫았다고?’

겉으로 드러나는 정황으로 보면 MOS 장르의 게임을 포기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들어가야 할 때와 나와야 할 때를 잘 아는 것. 냉철한 사업가다운 면모로 손절매를 제때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성주환 대표는 장담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굳이 게임을 개발할 수 있도록 다 지원해주고서 나 하나 나왔다고 새로운 시장을 포기해? 이건 윤태식 회장 스타일이 아니야.’

불도저 경영!

남들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한다!

성주환 대표가 보아온 윤태식 회장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이 굉장히 강한 타입이고 기어이 성공해내고 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안심하지 않은 채 다시금 고민했다.

‘윤태식 이 녀석. 혹시 우리가 어떤 게임을 출시하게 될지 다 지켜본 이후에 행동하려고 하는 건가? 나를 통해서 시장의 반응을 아예 점검할 심산인가 본데··· 만약 그렇다면 나를 아직도 팀장 시절로 보고 있다는 뜻이군. 뒤늦게 나와도 얼마든지 나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는 줄 아는 것 같고.’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떠올리며 그가 웃었다. 느린 거북이가 빠른 토끼를 달리기에서 따라잡은 진짜 이유는 거북이의 부지런함보다도 토끼의 방심 때문이었다. 비중을 두자면 노력보다는 자만이 더욱 크다.

그리고 자신은 윤태식 회장의 교만한 그 감정을 절대로 놓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 능력을 보여주마. 나중에야 아차 싶어서 네가 나설 때는 이미 모든 승부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짝!

손뼉을 치며 결단했다.

‘승부는 스피드에서 날 것!’

대기업의 인적 자원과 쌓여있는 노하우를 신생기업이 어찌 따라잡을 수 있으랴. 그는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도 이를 초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즉, 압도적인 그래픽이나 여타 기술력에 관련된 분야로는 감히 게이머스 포럼과 싸울 수 없다.

그렇기에 저들이 나태하게 잠자는 동안 힘껏 달기리고 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속도전으로 갑니다. 최대한 유저들이 원하는 것을 발 빠르게 업데이트하면서 칼리버 온라인이 절대 지루하지 않고 지겨워지지 않는 게임으로 만듭시다.”

“하지만 대표님. 현재 인력으로는 그 속도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가까스로 일정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람이 부족하면 사람을 더 뽑으면 돼!”

쾅!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하다가 게이머스 포럼에서 게임 내고 유저들 다 그리고 넘어가서 게임 망하면 그때는 오 팀장이 책임지실 건가?”

“···아닙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있는 거고.”

성주환 대표가 자신을 믿고 따르라는 듯 가슴을 쳤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게이머스 포럼에서 당장 내일이라도 게임 발표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팔자 좋게 사람이 없다, 우린 어렵다 같은 이야기만 할 겁니까?”

“저기··· 그···”

“답답해 죽겠네. 알면 얼른 움직이십시오! 가서! 게임을 완성해서 결과물을 가지고 오란 말입니다!”

“네··· 네!”

무릇 리더는 항상 따뜻하기만 할 수 없다. 평소에는 온화한 카리스마를 보이더라도 필요할 때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칼날처럼 예리한 위엄을 보여야 한다!

‘윤태식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확신으로 밀어붙이는 불도저식 경영으로 모노 소프트의 직원들이 부단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4월 22일.

모두의 땀과 아이디어, 노력의 산물인 칼리버 온라인의 오픈 서비스 날이 찾아왔다.

시나리오 모드, 모험 모드, 전략전투 모드 등. 다양한 모드를 지원하고 또 그 안에서 여러 가지 맵이 있는 형태의 칼리버 온라인은 누가 보더라도 기존의 LON을 업그레이드한 게임이었다.

- 미쳤다! 이거 진짜 대박이야!

- 진짜 재밌어! LON은 맨날 같은 맵에서만 게임을 했는데, 이건 맵이 5개나 돼.

- 스드도 그래서 꾸준히 새로운 맵을 개발하고 그랬잖아. 분위기 보니까 칼리버도 이런 식으로 계속 맵을 새로이 개발할 모양이던데?

- 근데 이런 게임에 맵이 많은 게 좋은 거임?

- 당연히 좋은 거지! 매일 같은 맵에서 같은 전략으로 게임해야 하는 거잖아. 질리면 답 안 나올 정도라고. 그러니 당근 맵이 많아야지.

- 영웅은? 영웅은 많대?

- 초기에는 30개 정도만 개방이 되고, 추후에 계속 업데이트된다는 거 같던데?

- 오! 30개!

- 영웅 30개면 충분히 많네!

이미 LON을 통해서 이 장르에 익숙해진 유저들은 너도나도 칼리버 온라인의 오픈 테스트를 기다렸다.

그리고 대망의 오픈.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성공의 포문을 개방했다.

“서버 열었습니다!”

“가입자 정보가 폭주합니다!”

LON의 국내 유저는 대략 5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를 고려한 칼리버 온라인의 예상 가능 동시접속자의 숫자는 대략 3만 명!

동시 접속자 3만 명이면 출시와 동시에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는 숫자였다. 하지만 자체평가였던 이 수치는 현실을 반영하기에 부족했다.

“이럴 수가!”

“오픈 30분. 동시 접속자 6만 명입니다!”

“우와!”

3만 명이라는 숫자는 어디까지나 기존의 정보를 토대로 낸 예상 수치일 뿐.

지금까지 LON을 즐기던 유저들은 집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오픈 첫날은 그들의 기대감이 마구 분출되는 타이밍이다. 그렇기에 예상치를 아득하게 넘어서는 동시 접속자 숫자가 발생했다.

경험 없는 신입이라면 마냥 좋아서 어쩔 줄 몰랐으리라.

하지만 성주환 대표는 게이머스 포럼의 성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는 기쁨에 휘둘리지 않은 채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지휘했다.

“우리 서버에서 감당할 수 있는 최대 접속자는 얼마나 돼?”

“최대 8만 명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12만까지 가능하도록 늘려!”

“알겠습니다.”

오픈 30분이면 지금 막 오픈한 것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시점이다. 이때 6만 명이면 12만까지는 충분히 그 인원이 늘어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 부랴부랴 서버를 증축하면 늦는다.

남더라도 미리미리 증축해둬야 이탈자들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이건 성주환 대표가 게이머스 포럼에 있는 동안 배운 기본이었다. 그렇게 칼리버 온라인은 모두의 기대만큼 막힘없는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 칼리버 온라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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