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78화 (278/577)

< 샤크 케이지 >

이윽고 고 여사와 함께 샤크 케이지를 탑승했고 비교적 이른 시간에 배로 되돌아오셨다. 평소였다면 절대로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소심함 때문에 산소량이 빠르게 줄어들었고 그 탓에 어쩔 수 없이 귀환한 것이었다.

“이이가 진짜! 숨 쉬는 것도 못 하면 어떻게 해!”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 아악!”

어머니의 스매싱이 아버지의 등을 불태우며 우리를 태운 배가 다시 투어본부에 정박했다. 오는 내내 모녀에게 술안주용 오징어처럼 오르내린 아버지는 내게 은밀하게 협박하셨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관광은 하지 말자. 알겠지?”

“그러지 말고 따로 자주 오셔서 적응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태식아. 사람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란 게 있단다.”

“하다 보면 뭐든지 늘기 마련이지 않을···”

“어허!”

“넵.”

단호하신 모습에 내심 웃으며 손 맞잡고 약속했다.

‘이런 게 다 추억이랍니다.’

다음 가족 여행에는 세계에서 손꼽는 번지점프대로 조용히 모셔야겠다. 어머니가 등 떠밀면 어쩔 수 없이 하실 수밖에 없다. 그렇게 불효막심한 음모를 꾸미며 막 배에서 내렸을 즈음이었다.

[윤태식 회장님 맞으십니까?]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네 명의 남자가 나를 불렀다. 하지만 정부 기관의 요원은 결단코 아니었다. 복식만 그러했을 뿐 몸매는 산타클로스처럼 풍요롭고 나이 역시도 주름과 수염이 알려주듯 모두가 중년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지요?]

대부분이 모르는 사람인데 한 명의 낯이 제법 익었다.

[블루워터의 크리스 감독님 아니십니까?]

[오오! 기억해주시는군요!]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급 화색을 보인 감독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뒤이어 대뜸 자신의 일행을 소개했다.

[여기 이 친구들은 저와 함께 영화 공부를 했던 영화감독들입니다.]

[그러시군요. 그런데 제가 지금 가족들이랑 여행하는 중입니다만?]

[아! 죄송합니다. 회장님이 시드니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저희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일단 달려왔는데, 확실히 실례가 되겠군요.]

모르는 외국인들을 구경 중인 가족에게 저들이 얼른 인사했다. 미안함을 가득 담은 채였다.

[죄송하지만 나중에 따로 시간을 좀 빼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대답하기 앞서서 궁금한 게 있었다. 도대체 호주에 왔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은 걸까? 그것도 시드니라고 탁 짚어낼 정도로 말이다. 나조차도 이번 여행은 즉흥적으로 결정한 건데 한낱 영화감독이 첩보 요원처럼 정보력을 발휘하여 쫓아온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묻자 절대로 아니라며 설명했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저희도 때마침 이 샤크 케이지를 경험하러 왔었습니다.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군. 그런데 샤크 케이지를 체험하러 온 사람들이 모두 정장 차림이라고?’

자기들 딴에는 최대한 나에게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면서 무언가 제안할 게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어떤 부탁일지는 굳이 심력을 소모할 필요도 없이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감독이 부자 회장님한테 찾아온 이유는 뻔하니까.

절박한 심정으로 투자를 바라는 거다.

[오늘 밤 8시. 시즌스 호텔에서 뵙도록 하지요.]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잠깐 설명을 듣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또 들어서 도움이 될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닌 말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카이닉스라는 목표를 달성하며 예전만큼 투자에 혈안이 되지는 않았으나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마저 거부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 잊고 있었는데 샤크 케이지를 활용하면 블루 워터2를 제대로 뽑아낼 가능성이 높지.’

때마침 여기 블루워터의 감독마저 왔으니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정장 차림의 외국인들. 그것도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정중하게 인사하고 이동하자 가족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온갖 질문들을 쏟아냈다.

“오빠. 시드니에도 아는 사람들이 있어?”

“아니. 내가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찾아왔다는데?”

“누군데?”

“영화감독들.”

“대박! 영화감독이 막 오빠한테 이렇게 인사해? 오빠 그런 사람이야?”

“그런 사람은 대체 무슨 사람이냐?”

“그게 막 그렇잖아. 영화감독들은 자기 세계가 강해서 누구한테도 굽히지 않고 마이웨이! 막 이러고 괴짜에 천재!”

‘응. 안 그래.’

독립영화판이면 모를까, 상업영화판은 어디까지나 돈으로 움직이는 세상이다. 예술가의 기질을 발휘해서 예술을 하려고 한다면 ‘남의 돈으로 예술이나 하는 버러지!’라는 취급을 받는다. 그렇기에 투자자의 입맛에 맞게 상업화시켜야 하는 이들이 상업 영화감독이다.

‘사교성이나 정치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 물론, 그런 거 다 씹어먹는 극소수의 천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가능한 게 별종이고.’

즉, 뭘 해도 흥행을 한다는 보증이 있지 않다면 어떤 감독이건 투자자 앞에서는 마이웨이를 시전 할 수 없다. 거기에서도 나는 네임드가 있는 존재다. 실패한 적이 없기에 내게서 투자받으면 오히려 성공한다는 보증마저 붙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겸양 3에 허세 7을 담아서 이야기해주자 가족들의 자랑스러움이 더욱 배가 되었다.

“오빠 쫌 멋진데~?”

“아 됐다. 너한테 멋져서 어디다 쓰냐?”

“어? 이 오빠가? 내가 우리 학교에서 응? 이름만 대면 응? 그냥 아주 퀸카로 소문이 무성한 그런 뇨자라고!”

“아이고 좋으시겠어.”

“쳇.”

122. 샤크 케이지

시드니까지 찾아온 감독들과의 만남을 위해서 호텔의 특별 라운지를 빌렸다.

[인사는 아까 대충 했다 치고.]

여기서 아쉬울 것 없는 사람과 아쉬운 것이 많은 이들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나는 휴식 도중에 요청을 받은 마당 아니겠는가.

[제가 그리 긴 여행이 아니라 조금 피곤한 편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설명부터 들어보도록 하죠. 어차피 자세한 내용은 우리 실무자들과 하셔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뒤이어 대충 설명을 들어보니, 다들 저예산 축에도 들지 못하는 독립영화만을 촬영해온 감독들이었다. 그러다가 아는 친구의 어마어마한 성공! 블루워터라는 흥행을 지켜보고는 자신들에게도 상업영화에 발을 들여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도 성공할 수 있다! 라는 기대를 품고 찾아온 거였다.

그러며 준비해온 작품들의 시나리오를 열심히 보여주고 설명하는데, 내 소감은 마냥 한숨이었다. 지금까지 안 된 사람들에게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내키는 영화가 없군요.]

나름대로 재미있게 포장하려 하지만 결국 특별함은 없고, 익숙함만이 남는다. 뭐, 공포영화라면 익숙하더라도 무섭게 잘 포장만 하면 되지만 그게 말이 쉽지 실제로 이루기는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니 더욱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으로라도 무서움을 억지로 조장하는 작품들이 늘어가는 거다.

‘어쨌건 아닐 때는 딱 잘라서 끊어야 서로 편하지.’

동양적인 겸손함으로 ‘다음에 봅시다’ 따위의 소리를 하면 곤란했다. 나는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여기까지 찾아온 정성은 감사하지만, 제가 투자할 정도로 마음이 가는 작품은 없습니다.]

그러자 감독들은 ‘이 사람도 이제 흥행할 영화에만 투자하려고 하는구나.’와 같은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글러 먹었다고 보기에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저렇게라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데 오해거든. 나는 원래부터 흥행할 영화에만 투자하는 타입이지 막연하게 대박을 꿈꾸며 도박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고.’

확실하게 뜰 영화. 개중에 내가 많은 퍼센티지를 먹을 수 있는 영화가 저예산 영화였기에 이쪽으로 많은 투자를 했을 뿐이다. 아울러, 그룹의 회장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안목이 알려준다.

‘꿈속 미래가 없더라도 내가 장담한다. 이 시나리오들은 전부 재미가 없어!’

가족과 오붓하게 즐기는 휴가를 방해받았는데 의외의 득템은 없는 모양이다.

[제게 보여주실 건 이게 전부입니까?]

자리를 끝내기 위해 툭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침묵하는 감독들 사이로 한 사람이 다급하게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것은 아주 낡고 또 오래된 각본이었다.

「Old man Keep walking」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는 것일 수 있기에 나름대로 필사적인 모습이다.

낡고 오래 된 각본이라는 것은 영화로의 제작 가능성이 낮다는 걸 의미한다. 그게 꼭 각본이 나쁘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 수 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거나, 혹은 기술력의 부족이라거나 다양한 이유가 가능하니까.

‘무슨 내용인지나 좀 볼까? ···어라? 이거 아는 건데?’

내용은 늙지 않고 1만 4천 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온 존재.

인류의 역사를 함께 살아온 존재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스스로를 밝히는 이야기였다.

‘휴먼 프롬 어스잖아.’

부끄러운 말이지만 영화가 출시되고 한참이나 지난 후에, 인터넷에서 하도 추천을 하길래 불법다운 로드를 통해서 본 적이 있는 영화다. 그때의 소감은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내 취향은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내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었거든.’

특별한 내용은 없는 영화다. 1만 4천 년을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그 흔한 회상장면도 없어서 주인공이 마냥 하는 말을 듣고 상상하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볼거리라고는 정말 개털만큼도 없고 그저 생각할 거리만 한가득 던져줬던 영화였다.

그런데 이 작품의 각본이 이토록 오래 돌아다녔을 줄은 몰랐다. 생각에 잠긴 나에게 감독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본래 TV 시리즈의 에피소드로 만들었습니다만, 각본가가 그렇게 써먹기는 아깝다는 생각에 영화 시나리오로 바꾼 겁니다. 제롬 빅토르의 유작이죠.]

조용히 바닥만 보고 있던 감독이 제롬 빅토르의 이름을 말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얼굴을 했다. 그걸 봐서는 굉장히 유명한 작가인 모양인데, 나 같은 업계 바깥의 사람한테는 그냥 모르는 누군가일 뿐이다.

‘제롬이건 베롬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아. 폐기물로 쌓인 언덕에서 그나마 건질 물건이 나왔다는 게 중요하지.’

나는 재미없었지만 오래도록 회자하였고 저예산 영화의 상징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마저 꿈속 미래에 나돌았었다. 그러니 흥행 결과는 장담할 수 없더라도 손해는 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둘 생각나네. 이건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고 했었지? 그만큼 원작이 여러모로 인정받았다는 뜻이야.’

결론을 내리고 비로소 처음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는군요.]

[저··· 정말이십니까?]

[물론입니다. 함께 해봅시다.]

결정했을 때는 쾌도난마로 해치운다.

[투자부터 배급사까지 저희 쪽에서 제대로 진행해보겠습니다. 감독님은 최대한 좋은 영화로 만들어만 주시면 됩니다. 단, 초저예산으로만 투자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제한을 두었다.

[회상이나 특수효과. 이런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각본이 90%를 하는 영화다. 감독에게 많은 돈이 주어지면,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억지로 넣느라 각본을 망칠 수도 있다.

‘다들 기왕이면 자신이 만든 게 더 멋지게 보이길 바라니까.’

그런 일은 사전에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

[각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스크립트에 10만 달러를 먼저 투자하겠습니다. 먼저 스크립트에 완성도를 더욱 높여주시고 이후 영화 제작에 관한 투자는 배급사와의 계약과 함께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타인이 보았다면 이상하게 볼 정도의 과한 반응이다. 이 정도 투자는 당장 동료인 크리스 감독에게도 받을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블루워터가 엄청난 흥행을 하면서 그는 재산이 제법 빵빵해져서 10만 달러쯤은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런 크리스 감독이 굳이 이 정도 예산이 필요한 영화의 투자를 위해서 친구들과 호주까지 왔고 정장 쫙 빼 입힌 다음에 나를 찾았다.

이동경비에 여행경비까지 합치면 영화 하나는 제작할 수준인 것이다.

‘그 이유를 나는 알지. 성공을 보장받은 기분일 테니까.’

실패하지 않는 투자자가 주는 이점인 셈이다. 사람들이 괜히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원포인트 레슨을 받으려 하겠는가. 아닌 말로 나는 작정하면 조언만 해주고 그 조언 값을 두둑이 챙길 위치에 올랐다.

크리스 감독이 본 윤태식 회장과의 면담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뻑이 아니야.’

이건 팩트다.

< 샤크 케이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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