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71화 (271/577)

< 일~! >

‘뭐, 과소비하지 않는 좋은 습관이니 그냥 좋게 여기련다.’

아껴서 나쁠 건 없다. 그런 주제에 나는 왕창 쓰고 있지만 말이다.

“오빠는 모델이랑 체형이 비슷해서 딱히 맞춤으로 살 필요도 없는 거 같아. 그냥 사이즈만 맞추면 그냥 딱 오빠 핏이야.”

가게의 직원들이 하는 칭찬이야 어차피 고객에게 하는 사탕발림이니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태희가 하는 칭찬은 나름 기분이 좋다. 아울러 끝이 보여서 더욱 기뻤다.

“오빠 것 골라주느라 수고했어. 이제 끝났으니까 네 것을···”

“다음은 구두 갑시다!”

“뭐? 구두는 계획에 없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장을 맞추고 구두를 안 맞춰? 이 사람 큰일 낼 사람이네!”

“아니 뭐··· 큰일이 날 거 까지는···”

“됐고!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다 해줄게.”

패기 넘치게 리드하는 태희의 기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헤어나오지 못하는 백화점이라는 미로에 계속 갇혀 있고 말았다.

“여기 이거랑! 이거는 오빠가 가장 처음에 맞춘 정장이랑 잘 어울리겠어!”

‘내가? 네가 아니고?’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이 제품은 최상급 코도반으로 제작한 것으로···”

‘그건 또 뭐야?’

뭔 소린지 정말 한 개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고르는 족족 ‘이건 최상급 캥거루 가죽으로 만든···’으로 시작하는 뭔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잔뜩 들었는데 나한테는 가죽 종류 빼고는 그냥 죄다 외계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태희가 그 말들을 몽땅 알고 대화하는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정작 명품은 입지도, 들고 다니지도 않는 애가 왜 이런 건 두루 꿰고 있는 거래?’

누이비통, 쿨하다, 얼마니 등등의 매장들을 정신없이 돌아다닌 태희의 쇼핑 욕구가 풀리는 시점은 정장에 1억 2천만, 셔츠에 3천 200만, 구두에 2천 200만, 넥타이에 700만 원을 사용하고 난 후였다.

비싸기로 유명한 브랜드에 와서 잡히는 대로 구매를 하고 있으니 쇼핑을 하러 온 다른 사람들이 하던 것들을 멈추고 입을 벌린 채 구경을 할 정도였다.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네? 왜죠?”

매장을 나가려는데, 점장이 달려와서는 태희를 붙잡았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그게 아니면 오해가 생긴 걸까? 잠시 불쾌한 생각이 찾아오며,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게 된다. 하지만 그의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 구매하신 제품들이 워낙 고가이기도 하고 또 부피도 상당해서 쇼핑에 불편함이 있으실 거 같아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쇼핑 도우미들이 올라올 겁니다.”

‘도우미? 쇼핑에?’

명품관에서 대량으로 쇼핑하는 고객이 손에 들기가 불편해서 쇼핑을 멈춘다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쇼핑 욕구를 멈춰야 했던 손님일까? 아니면 명품관일까? 물어볼 것도 없이 전자다.

그렇기에 명품관은 그런 손해를 최소화하려는 방편으로 VVVIP 고객을 위한 도우미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단다.

‘이런 경험을 해볼 일이 있었어야 이런 게 있는 줄도 알지.’

잠시 후 세 명의 도우미가 매장으로 와서는 점장의 안내로 우리 물품을 인계받았다.

“그럼 즐거운 쇼핑 되시기 바랍니다.”

90도 인사를 받으며 나오자 태희가 내게 작은 어조로, 하지만 한껏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박. 대박~! 오빠. 나 이런 거 처음 봐!”

나도 처음이다.

‘그런데 제발··· 멀리서 얘기해도 되는 큰소리로 귓속말을 하지는 말아줄래?’

그러거나 말거나 태희는 아주 흥이 제대로 오른 모양이다.

“오빠 또? 또 뭐? 또 살 거 있어? 뭐? 뭐? 어떤 거 살 거야? 또 있지? 얼른 말해봐.”

없다면 다시금 프랑스의 연인을 떠올려서 자체 생산해낼 기세였다. 긴긴 쇼핑이 피곤했지만 쾌활함이 나로 하여금 웃음 짓게 했다.

그래. 이렇게 굳이 나왔을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이런 시간을 내겠는가?

“시계.”

짧게 말하자 태희가 손뼉을 짝! 쳤다.

“오! 남자 시계! 나 그거 한번 골라보고 싶었어! 그거도 내가 골라 봐도 돼?”

“선택권은 예전보다 넘어갔었단다?”

태희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혀를 내밀며 토끼처럼 웃었다.

고가의 시계를 고르라면 당연히 필립파텍스다. 국내의 몇 개 있지 않은 매장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명품관에 있었으니 당연히 들러야 할 코스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있어서 이 명품관을 온 거지.’

구두와는 다르게 정장과 시계는 내 계획에 있던 품목이다. 당연히 사전 조사를 해왔기에 태희를 오래간만에 내가 이끌었다.

시계의 가격은 기본 1,200만 원에서 시작했다. 물론 이런 상품은 어디까지나 기본에 지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골라볼까 하면 대부분이 3천만 원에서 4천만 원 수준이다. 손목에 어지간한 중형차 한 대를 차고 다니는 것과도 같다.

“대박. 원래 시계가 이렇게 비싼 거야?”

‘너 조금 전에 1억을 시원스레 썼었어!’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까, 나와 태희의 취향이 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태희는 지금까지 쇼핑하면서 억을 가볍게 넘긴 것을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 채 외려 필립파텍스의 시계를 보며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이런 가격을 주면서 이걸 왜 차는 거야?”

“응?”

“그렇잖아. 난 비싸 봤자 한 500만 원? 뭐, 그 정도를 생각했는데··· 우와. 이건 너무 상상 초월이라서······.”

다른 분야는 이미 그런 가격을 알고 있었는데 시계는 영 몰랐나 보다. 누구나 그렇듯 자신의 관심사에는 전문가라도 다른 부분에서는 초심자이기 마련 아니겠는가.

가볍게 웃으며 이를 짚어 주었다.

“그렇다면 옷은? 구두는? 굳이 그런 그만큼의 높은 가격이 필요했을까? 시계사고 나면 지갑도 살 계획인데 지갑은? 굳이 그런 비싼 것들을 하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 웃긴 사실인데 사치품은 사실 굉장한 모순에 의해서 탄생하는 거라고 볼 수 있어.”

“뭐가 모순인데?”

“비싼 것들을 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걸 물어본 거잖아.”

볼에 바람을 넣고 퉁퉁거리는 태희였다.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비싸니까 사는 거야.”

“아!?”

남자라면 이쯤에서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멍멍이 소리냐?’ 라고 반문할 타이밍일 것이다. 그러나 태희는 여자의 본능 덕분인지 바로 이해한 얼굴이었다.

“고급인 만큼 좋은 재료를 쓰고, 고급인 만큼 좋은 기능 혹은 성능을 가지고 뭐 그런 것도 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들이 가격만큼의 효과를 보지 못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있다. 쉬운 예로 가난한 사람이 10억이라는 돈을 벌 때까지는 돈의 크기만큼 행복도도 커진다. 그러나 백억, 천억, 1조를 갖게 된다고 돈의 액수만큼 행복이 100배 1,000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감정에는 임계치가 있기 때문이다.

물건 역시 마찬가지다. 하자가 있어서 쓰지 못하는 물건과 좋은 물건의 차이는 명백하지만 좋은 물건과 명품으로 분류된 물건의 차이는 20배, 30배씩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약간의 품질 차이로 가격은 20배, 30배가 된다.

합리성과 쓰임새의 관점에서만 보면 있을 수 없는 멍청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치품과 희소성으로 표현되는 감정적인 측면을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것들은 그냥 결국 비싸니까 ‘나 이런 것도 살 수 있다. 나 이런 능력 된다.’인 거야. 그냥 폼이나 재려고 필요한 거지.”

가성비가 완전히 바닥인 제품들이 희소성을 이용해서 막대한 가치를 품게 되는 이유. 그만큼 돈 있는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빠도 폼 재려고 이런 것들을 사는 거야?”

“아니.”

“그럼?”

“내 앞에서 폼 재는 놈들이 쉽사리 폼 재지 못하게 하려고 사는 거지.”

“크~ 우리 오빠 남자다잉~!”

시계 구매의 목적을 제대로 이해한 태희에게 주춤했던 지름신이 다시금 강림했다. 이번에는 공부가 필요했었기에 알려주며 시간을 보냈고 쇼핑 시작 후 처음으로 내가 상품을 골랐다. 내 선택은 가볍게 칼라트라바 하나를 챙긴 뒤 매장의 점장에게 추가 오더를 넣는 것이었다.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이름 그대로 엄청나게 어려운 이 시계는 모든 하이엔드 시계의 정점이라고 불린다.

‘롤스루이스보다 비싼 시계라니 말 다 했지.’

그런 시계를 한국의 매장에서 그냥 보유하고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일 년에 몇 개 제작하지도 않는 이 시계는 늘 구매자가 기다리다 안달이 나는 만큼 쉽사리 만날 수도 없다. 그게 이렇게 굳이 점장에게 오더를 미리 넣어두고 나가는 이유다.

이후, 시계로 유명한 브랜드 매장에 들러서 하나씩 구매했는데 가격은 개당 800만 원에서 1,300만 원 수준이었다. 그리고 태희는 조금 덜 유명한 볼거리에서 550만 원짜리 하나를 골라왔다.

“이게 제일 예뻐 보여.”

시계의 가치나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냥 디자인은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단다. 아무래도 출근할 때는 이걸 주로 차고 다닐 것 같다.

이후 200만 원에 내 지갑을 구매한 뒤에 지금까지 태희의 지갑과 가방, 시계를 구매했다. 외식까지 하고서 집에 돌아오니 몸과 정신이 피곤한 한편, 기존의 미래와는 확실하게 달라진 작금의 나를 물씬 실감하게 된다. 그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정장이랑 시계 좀 샀다고 방의 느낌이 확 변한 느낌이네.’

사실 정장은 옷장에 있고 시계는 시계함에 있으니 눈에 띄는 방의 변화는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괜히 방이 좀 중후해진 기분이 들었다.

120. 일~!

7월의 마지막 주.

드문드문 출근하지 않아 비어있는 자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낸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하지는 않았고 적막해진 사무실에서 유독 큰 목소리로 말하는 이도 있었다.

“회장님!”

여타의 대기업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겠지만, GF그룹의 회장인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산하 기업의 게임 개발의 선장 역할이다.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합니까?”

보고와 함께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은 GF 컨텐츠에서 MOS팀 팀장을 맡고 있는 성주환 팀장이었다. 그는 ‘MOS 장르는 요즘 워드래프트Ⅲ의 사용자 지정 맵에서 무려 85%라는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장기가 끝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라며 자랑하는 중이었다.

“막대한 점유율을 자랑하는 MOS. 그중에서도 현재 LON이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70%입니다. 지금이 새로운 게임으로 등장할 가장 적기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자신도 물밑 작업이 아니라 전면에 나설 때가 왔음을 피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드래곤 소울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성주환 팀장의 손을 들어주었을 테지.’

그의 말대로 드러난 성과는 충분히 그만한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게임의 자체적인 완성도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 바로 적당한 시기다. 때가 맞지 않으면 비운의 명작으로 당시에는 실패했으나 의미는 있었던 작품이 된다.

‘지금은 너무 빨라. 시대를 앞서서는 좋을 게 없어.’

재차 경각심을 가지는 부분이다. 미래의 정보를 활용할 때는 시장이 쫓아오는 속도를 간과하지 말아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한껏 흥분해 있는 성주환 팀장을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세요.”

“하지만 회장님. 통계가 알려주듯이 지금이 적시입···”

“아닙니다. 지금 출시하면 잠깐만 반응이 있을 뿐, 오래 기억에 남을 게임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

“인내가 긴 만큼 후일 거둘 열매는 크고 더욱 달콤할 겁니다. 현재의 성과만으로도 저는 기대 이상의 만족을 하고 있고 때가 되었을 때, 성주환 팀장의 LON은 전 세계 게이머들이 모두 기억하는 게임이 될 겁니다. 그러니 아직은 기다립시다.”

“···알겠습니다.”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 정도로 답답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어쩌겠나? 내가 회장이고 이 게임의 뼈대를 다 만든 인물 역시 나인데 말이다. 불만이 있더라도 꾹 내리누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언제나 그렇듯 훗날의 거대한 성공과 보상을 함께 나눌 때 지금의 일은 기억조차 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 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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