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69화 (269/577)

< 지름신과 드라마 >

“···회장님?”

가만히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길남주 실장은 혹시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이 내 쪽을 보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뭐랄까··· 시간이 이만큼 지났구나 싶고 열심히 달렸구나, 참 감개무량하다는··· 그런 감정이 들더군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갯짓했다.

“하던 거 계속하세요.”

“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그 덕에 미꾸라지가 용이 될 수 있었죠.”

길남주 실장이 그러고는 실없이 웃자 회의장의 모두가 그를 따라 웃었다. 이를 보고서 나는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마음의 빚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있었다.

회의장에 앉은 간부들은 길남주 실장의 말에 매우 공감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사실 이들 대부분은 원래부터 용이 될 준비가 되어 있던 잉어들이었다. 오히려 미꾸라지인 내가 이들을 붙잡아서 함께 용이 된 것이다.

12지신 중에 쥐가 1등을 한 건 소를 타고 이동하다가 결승선에서 재빨리 내렸기 때문이라는 그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러나 더 높은 곳에 날게 해주었고 추락의 위기를 겪지 않게 했으니 이제는 묻어간다, 함께 하며 이익만 챙겼다는 일말의 죄책감조차 지워버려도 될 것이다.

즐거운 감정을 유지한 채로 다음 보고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크라비티의 사업보고를 하겠습니다.”

게이머스 포럼 내부의 회사 중에서 상장사는 총 3개다.

레이컴, 넷젠, 크라비티.

그중에 크라비티는 가장 마지막에 상장했는데 올해의 예상 매출액은 1,600억이며 6,800억 원의 시가 총액을 보유하고 있다.

‘계열사 중에서는 당연히 케이리버가 으뜸이고.’

세계를 무대로 하는 만큼 케이리버의 올해 기대 매출액은 무려 4조 8천억!

영업이익은 1조 1,664억을 목표로 잡고 있다. 2004년도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 MP3플레이어의 시장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고 덕분에 세계 2위의 MP3 기업인 케이리버의 성장은 눈이 부실 정도다.

물론, 여기에도 내 도움이 큰 몫을 했다.

‘양도준 대표가 예상외의 고집을 부려서 큰일 날 뻔했던 위기가 있긴 했었지.’

한국의 기업이니까 공장은 무조건 한국에만 지어야 한다라고 해서 어찌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야말로 경영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마인드.

업계 1위는 어떻게든 제작 단가를 낮춰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양도준 대표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덕분에 ‘케이리버 정도 되는 회사가 괜히 무너진 게 아니구나.’하는 자각을 다시금 했다.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케이리버는 양도준 사장의 고집대로 국내 공장에 고집을 피웠을 것이고 그것이 몰락이라는 골인 지점으로 추락하는 단초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됐건 내 재산도 팍팍 늘었으니까.’

내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국위 선양을 위해서나 양도준 사장이 마냥 안타까워서가 아니다. 함께 하는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케이리버는 시가 총액 6조 9천억이 되었고 나는 투자금 50억 6천만 원으로 7,200억에 이르는 부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전에는 내가 가진 재산이 얼마인지 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자산관리사를 통해서 확인해야 정확한 금액을 알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이토록 성공 가도를 달리는 인물들로 구성된 간부회의실의 모습!

새삼 감개무량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동안처럼 편의성 때문에 회장님이라고 불렸는데 이제는 진짜로 대기업집단에 속한 그룹 회장이 되어버렸어.’

대기업 집단의 기준은 자산총계 5조 원 이상의 그룹이다.

GF그룹의 자산총계는 무려 10조 7천억.

게임으로 아이템 팔아서 번 돈으로 시작하여 재계순위 11위까지 성장하였으니 문자 그대로 입지전적이라 하겠다.

참고로 10위는 현재중공업 그룹이며 12위에는 국내 2위 항공사와 타이어 회사 등 다양한 알짜 회사를 거느린 은호 그룹이 있으니 당금의 우리는 국내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규모의 그룹이다. 이를 감히 부정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지는 보고를 한 귀로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쯤 되면 비좁은 울타리를 떠나서 각자가 사옥을 가질 때가 됐지.’

GF 그룹은 거대해진 규모만큼 GF홀딩스를 중심으로 계열사들을 새로이 정리했다. GF그룹 내부의 자금과 투자는 GF홀딩스에서 관리하고 해외로의 유통과 관련한 모든 업무는 자회사인 GF 글로벌을 추가로 출범하여 담당했다. 덕분에 김유천 역시 대표로 불리게 됐다.

국내 유통과 서비스는 김지애가 대표로 앉은 클로버 스팅이 맡았고 김정규 역시 GF 서비스의 대표 자리를 차지했다.

배추라고 가만히 둘 수 있을쏘냐, 역시 이참에 한 자리 차지했는데 GF 내부의 서버와 다양한 시스템들을 총괄하는 자회사인 GF 테크랜드의 대표가 그의 자리였다.

‘고진환 부문장은 곽지원 전무와 함께 GF 홀딩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했고.’

이로써 초기 5인이 모두 GF 내부에서 한 자리씩 가지게 됐다.

‘드라마의 젊은 회장님들은 펑펑 놀던데 현실은 성장할수록 일거리가 많아진다니까. 신경 쓸 게 정말 많네. 마이코닉스도 이제 규모가 상당해졌으니 제대로 계열사 대접을 해줘야 할 테고.’

‘샤이닝 로드 : 메마른 대지’의 확장판인 ‘이그니스’의 반응은 그 이름만큼이나 열광적이었다. 덕분에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팬더그램도 평가액이 2,000억을 넘어서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 둘이 계열사로 승급하게 되면 우리 그룹은 계열사 5개에 자회사 7개의 규모가 된다.

사실 메일 타이틀을 가진 스튜디오들을 따로따로 다 분리해서 관리하면 훨씬 많은 계열사로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고 의미도 없기에 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공갈빵처럼 크게만 부푼 규모가 아니라 꽉 찬 내실이다.

“너무나도 빠른 성장 덕분에 강남 사옥으로는 오래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됩니다.”

5명으로 시작했던 게이머스 포럼은 현재 1,800명 규모로 불어났고 계획대로라면 내년 하반기까지 총 3,000명의 직원을 더 채용하는 방향을 검토 중이다. 슬슬 강남 사옥을 넘어서 회사의 규모에 맞는 오피스를 채워야 했다.

하지만 시원스럽게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GF의 규모를 한 번에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재계 순위 11위의 회사가 한 번에 이주할 수 있는 건물은 애초부터 국내에 몇 개 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런 건물들이야 이미 주인이 다 존재했다.

‘그렇다고 지금 새로 지을 수도 없어.’

최근에야 DMC에서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했고 판교 테크노밸리는 이제 막 이름이 지어졌다. 그런 곳들을 두고 당장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엉뚱한 곳에 본사 사옥을 추가한다?

참으로 멍청하며 쓸데없는 돈 낭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내가 떠올린 방법은 이것이다. 급성장하여 인원수용에 문제를 일으키는 두 회사인 넷젠과 크라비티에게 재택근무를 지시하는 것.

“이렇게 합시다. 개발자들에게 출근은 필요한 상황에만 하라고 전달하십시오.”

“네?”

“어차피 집에서 하나, 회사에서 하나 상관없는 분야의 개발자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니 굳이 출근하느라 고생하고 회사에 자리 차지하고 또 퇴근하느라 고생하지 말고 집에서 업무를 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대신 근무하는 동안 필요한 장비와 전기세는 회사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꿔봤을 아름다운 단어, 재택근무!

회사는 비좁은 공간의 고민을 줄여서 좋고 직원은 출근의 압박이 사라져서 좋다. 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 하겠다.

“하지만 회장님, 자칫 업무효율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효율에 지장 없는 정도로만 제한적으로 하면 됩니다. 수칙을 정하세요. 예컨대 기간 내에 정해놓은 만큼의 업무를 처리하지 못하면 그만큼 감봉하고 더욱 많이 한다면 보너스를 챙겨주는 겁니다. 또한, 꼭 얼굴을 봐야만 진행하는 업무가 있다면 그때만 출근하도록 합시다.”

이 제안은 임시로 시행해보는 쪽으로 일단락 지었고 결국 팀장급 이상은 매일 출근, 대리급 이하의 직원은 주 1회 출근하는 방향으로 결론 내렸다. 당연히 그에 걸맞도록 성과에 대한 당근과 채찍이라는 제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고진환 부사장님이 맡아주십시오.”

“예, 회장님. 문제가 최대한 없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해당 사항의 최고 담당자가 된 고진환 부사장은 우선은 대답했지만 이후 두통이 심하다며 머리를 부여잡고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2004년 7월 셋째 주.

지난 회의에서 임시로 시행해보기로 한 주 1일 출근제를 일단 GF 홀딩스의 자회사이자 몬스터 프레데터스, 신과 같이 등의 GF 최고 흥행 타이틀을 가진 GF 콘텐츠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했다.

모든 직장인이 꿈에서도 바라는 재택근무! 하지만 예상외로 참여율은 저조했다. 불안하다거나 ‘그냥 집에서 나오지 마.’라는 식의 해고통지를 받을까 봐서는 아니었다. 회사에서도 처음인 만큼 직원들 역시도 생각지도 못한 경험이다.

당연히 재택근무를 할 준비와 제반 여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였기에 적극적으로 환영하면서도 당장 재택근무에 들어가는 인원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다음 주부터는 20% 이상은 나올 거야.’

참여율이 낮다고 ‘내가 틀렸나?’ 하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자고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으면 좋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인간의 본능 아니겠는가.

준비되면 어련히 재택근무를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일단락 짓고 난 후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나도 유흥이라는 것을 즐겨봐야겠어.”

그간은 회사가 성장하고 자산이 늘어나면 그것에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여가로는 플레지를 비롯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게임 회사를 운영하는 녀석이 쉴 때도 게임을 하고 만나서 회의하거나 다른 일을 할 때도 게임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막상 이러니 현자 타임이라 해야 할까, 그토록 좋아했던 게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다른 여가와 휴식을 즐기고 싶어졌다.

‘돈을 쓸 시간이 없어서 쌓기만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놀고 있네’라고 했었는데, 막상 내가 그 처지에 놓일 줄이야.‘

물론 그렇게 살아온 내 모습이 후회되거나,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등의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재미없고 흥미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토록 정력적으로 일할 수 있을 리 만무한 일.

그 자체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단지 고생해 온 나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식의 보상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뿐이다. 그 시작으로 뭐가 좋을지 생각하다가 나는 꿈속 미래에서의 내가 마냥 ‘부럽다.’라고 여겼던 것을 몸소 실천해보기로 했다.

‘오늘은 질러보자.’

돈을 쓰기로 마음먹고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자동차 매장이다.

청담동에 위치한 최고급 자동차 전시장.

내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서 해당 지점의 지점장은 물론이고 전 직원이 대기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그들의 90도 인사를 받으며 매장으로 입장하니 나름대로 영화 속 갑부의 모습과 비슷한 장면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극도의 서비스를 통해서 윤태식 회장이라는 개인의 변화를 실감하게 되어서다. 다만, 자주 경험해본 일탈이 아니라서인지 지극한 서비스가 솔직히 낯설었다.

< 지름신과 드라마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