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 이거야 >
지적만 잔뜩 해대는 회장에게 한 방 먹이려는 생각으로 보면 옹졸한 것이다. 내 주문에 그만큼 부응했다는 깜짝 선물로 느껴졌다. 하지만 어지간하면 여기서 죽기 십상인 이 함정도 내 특별한 반사신경을 웃돌지는 못했다.
단두대의 칼날을 깔끔하게 피해냈다.
‘내가 작정하고 집중하면 컨트롤의 끝을 보이는 사람이라고.’
대신 지난번처럼 지루하게 싸움만 하는 상황에서는 집중력이 살짝 흐트러지지만 말이다.
“좋아. 여기까지는 합격.”
상자에서 나온 보상은 종합선물 세트와도 같았다. 무기만이 아니라 방패도 주었기에 단숨에 장비의 착용상태가 달라졌다.
그 대신이랄까? 다음 지역에서는 궁수라는 원거리 공격 몬스터가 추가 되어 있었다.
“방패를 준 의미가 이거였구나. 이러면 난도가 급격히 하락하지 않게 되지.”
방패의 활용법을 알려주고 화살과 같은 원거리 공격에 대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튜토리얼인 셈이다. 이후의 과정 역시 굉장히 짜임새 있게 진행됐다.
방패를 얻고서 궁수가 등장했듯이 상대의 무기를 쳐내는 기술인 패리을 연습하라는 듯, 중갑을 입은 기사가 다음에 포진하고 있었다.
‘안정적이야.’
패리의 타이밍은 쉽지 않다. 적의 공격이 들어올 때 타이밍에 맞춰서 방패로 튕겨내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유효판정은 짧은 시간에만 주어지기에 다루기 어렵지만 성공했을 때의 쾌감은 그만큼 컸다.
텅-!
쳐낼 때 울리는 묵직한 소리. 상대의 팔이 바깥으로 활짝 열리며 큰 틈을 드러내고 만다. 그다음은 시원스럽게 찔러서 몬스터의 몸을 관통하는 공격이었다.
적의 체력이 싹둑 떨어져 나가는 것 역시도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이전 시험판에서 한참이나 날 괴롭혔던 챔피언 보스와 동일한 외형을 가진 기사는 이렇게 패리의 타이밍을 교습해주고서 저 멀리 떠나갔다.
드래곤 소울에서 첫 NPC를 만난 시점은 보스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였다. 아스테라 라는 이름의 그에게 말을 걸자 메시지와 함께 음성이 들렸다.
「너··· 너는 망자인가? ···아니군. 망자가 아니라니··· 다행이야.」
「나는 곧 죽고 말겠지. 그러면 분별력을 잃고 말 테고··· 그래, 내게는 필요 없지만 자네에게는 이 물건들이 쓸 만하겠어.」
- 암리타 병을 획득하셨습니다.
- 거대한 철문 열쇠를 획득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래··· 쉬고 싶군.」
지난 시험판에서와는 달리 자신의 한계에 대한 체념 어린 말과 이루어질 일 없는 전설 한자락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아이템을 줌으로써 자신의 일을 마쳤다.
‘보스전이 되기 전에야 포션이 나오다니. 이건 손을 볼 부분 같아.’
잡몹을 처리하면서 죽지 않고 이곳까지 도달하는 일은 일반 플레이어에게는 그 자체로 고난과도 같을 것이다. 초기 시험판보다 몬스터가 쉬워지기는 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신과 같이 때 일찍이 경험하지 않았던가. 너무 어렵기만 하면 대중성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준점을 잘 잡아야 해. 프로게이머들의 호승심이랑 일반인들의 호승심은 다르니까.’
왠지 생각나는 매운맛처럼 계속 도전하고 싶어지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수정할 사항에 이 점을 체크해두고 열쇠를 활용하여 거대한 철문을 열었다.
철문 너머에는 지금까지 봐온 잡졸들과는 느낌자체가 보스 몬스터가 있었다. 마치 몬스터 프레데터스의 거대 괴수처럼 위압감을 자랑하는 이놈은 수용소의 마수였다.
“하지만? 의외로 상대하기 쉽다는 거~”
스테이지 1 클리어!
지난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기에 손쉽게 처리하고 넘어갔다.
‘다들 여기서 이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까지의 플레이는 스테이지 1을 가장한 튜토리얼이다.
본 게임은 이제 시작되는 것!
뒤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한 수다스러운 NPC가 사라지고 그 대신 그의 친구로 등장했던 거대한 그리폰이 주인공을 낚아챘다.
이후 새로운 장소에 떨어뜨렸는데 여기서 게이머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저 그리폰이 어떤 존재인지, 또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편화된 정보들이 곳곳에 숨어있었으므로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춘 이들이라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재밌어!”
스테이지 2를 넘어 3까지 클리어를 마친 나로서는 그야말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패드를 내려놓았다.
‘2004년 최고의 게임이 무어냐 묻는다면 누구라도 드래곤 소울을 꼽게 될 거야.’
감히 단언하건대, 이건 무조건 뜰 것이다.
환한 얼굴로 개발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 행복감을 모든 이들에게 나눠주고자 한 걸음을 내디뎠다.
“드래곤 소울의 출시를 준비합니다. 마무리 작업은 확실하게 해주시고 마찬가지로 체험판을 배포해주세요. 몬스터 프레데터스, 신과 같이, 그리고 드래곤 소울! 이 세 게임이 우리의 메인 타이틀이 될 겁니다.”
그렇게 2004년 5월 2일.
ZBox Live는 물론이고 인터넷을 통해 드래곤 소울의 트레일러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면서 새로운 시각적 충격을 선사했다.
118. 덤벼봐
2004년 5월 2일.
세계의 게이머들을 충격으로 빠트리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남자라면 그 누구라도 당연히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기사의 고고한 자태가 처음의 시선을 고정했다면, 그 이후는 호러게임을 방불케 하는 그로테스크한 몬스터와 배경이 게이머들의 심장에 불을 질렀다.
게임을 사랑하는 일본인인 안도 쿠라노스케 역시도 그중 하나였다.
‘이··· 이건! 꼭 사야 해!’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 흠뻑 빠져 있던 그.
하지만 영상의 마지막에 나타난 GF라는 게임사 명칭을 보고 울상을 짓고 말았다.
“아! 왜 GF냐고!”
한국의 게임 개발 회사인 게이머스 포럼은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로 이제 정평이 난 곳이었다. 그러나 ZBox에만 독점으로 발매하기 때문에 게임 스테이션이 대부분인 일본의 게이머에게는 그야말로 계륵과도 같았다.
하고는 싶지만 딱 이들의 게임만 한답시고 ZBox를 구매하기에는 저어된다. 그렇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침만 꼴깍 삼켜야 했다.
‘이럴 때는 복권이라도 당첨되거나 내가 엄청 부자였으면 싶다니까. 아! 돈만 있었어도!’
콘솔 하나 구매하는 가격이면 게임을 몇 개나 살 수 있다. ZBox에도 근래 매력적인 게임이 속속 생기고는 있지만, 아직 게임 스테이션과 비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한된 자금에서 효과적인 소비를 해야만 하는 안도였기에 매력적인 드래곤 소울은 새로운 고통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적은 있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인터넷에 올라온 게임 잡지에는 희소식이 담긴 것이다.
【드래곤 소울. ZBox 독점 아니다!】
【5월 24일 ZBox와 게임 스테이션2 동시 발매!】
“만세!”
지금까지 ZBox로만 게임을 출시하던 GF에서 처음으로 게임스테이션에도 함께 출시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가만?”
환호를 내지르던 안도가 멈칫했다.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나 같은 사람들이 엄청날 테고 드래곤 소울은? 초도물량을 구하는 것조차 힘들어질 수 있어.’
그동안 ZBox가 없어서 GF의 게임을 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죄다 몰려들 게 뻔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고로 준비하는 자가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는 법!
‘누구보다 빠르게, 밤을 새울 각오로 가서 제일 먼저 사오면 그만이야.’
안도는 5월 24일에 큰 동그라미를 치고 그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흐어··· 으으···”
2주는 길다면 길지만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안도가 체감하기에는 마치 1년처럼 기나긴 인고의 시간 같았다. 어릴 적 산타클로스의 선물 꾸러미를 기대하던 마음으로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밤잠마저 설쳤고 그 결과, 발매일에는 한숨도 못 자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발표 수업이 몰려 있는 날에 게임이 발매한 탓이라고 해야 할까나?’
본능적으로 이리저리 핑곗거리를 찾다가 그는 몸을 일으켰다.
평일에 게임 구매가 어려운 직장인들이나 학생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드래곤 소울 발매는 오후 6시 이후에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키비트까지 달린다!’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백만 배는 중요한 스케줄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아키하바라에 도착해도 1시간 정도는 시간이 남았기에 그는 낙관하며 움직였다.
그런데 도착하고 나니 눈을 다시금 부릅뜨게 된다.
‘이 줄은 뭐지? 설마···?’
아키하바라는 일본 최대의 전자제품 거리로 그 이름이 드높은 곳이지만 막상 일본 제품이 아니면 제품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매우 한정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그중에서 해외의 게임을 구매할 수 있는 상점은 고작해야 5곳 정도였는데 바로 그 거리에 늘어선 줄은 무려 다섯 개나 되었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니지? 가게마다 빠짐없이 몽땅 줄이 섰다는 거.’
당연하게도 안도의 목표였던 아키비트에도 길게 줄이 늘어선 상태였다. 해외 게임을 구매할 수 있는 샵에서 대기자들이 쫙 늘어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다들 드래곤 소울을 사러 온 거란 말이야!?’
순간 안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피곤을 무릎 쓰고 왔더니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미 늦었나······.’
그렇게 허탈한 얼굴로 줄을 바라보던 안도는 줄이 계속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이 급해졌다.
‘혹시 몰라. 내 차례까지 올지도. 일단 줄부터 서고 보자!’
예상했었으면서도 막상 학업을 때려치울 정도의 용감함을 보이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며 얼른 대열에 합류했다.
‘빨리··· 빨리···’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30분 남짓이다. 그러나 안도는 지금까지 기다린 30분이 5월 9일부터 오늘까지의 시간과 맞먹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30분의 시간이 지나면서 드디어! 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반시간은 더 기다려야 내 차례가 오겠어. 그때까지 물량이 남아있을까?’
이 줄에 있는 사람들의 목적은 모두 같다. 그러니 물건 구매의 속도가 더딜 이유가 없었고, 줄이 당겨지는 속도는 꽤나 빠른 편이었다. 그런데도 30분이나 소요된다는 것은 줄이 얼마만큼이나 길게 늘어섰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윽고, 눈에 띄게 앞사람이 줄어들었다.
5명··· 4명··· 3명··· 2명··· 1명!
드디어 안도의 차례가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여기 드래곤 소울입니다.”
길게 늘어선 줄은 기다리는 손님도 지치게 하지만, 판매하는 점원도 지치게 만드는 법이다. 그럼에도 점원은 아주 친절한 얼굴로 드래곤 소울 CD를 내밀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받아든 안도가 살그머니 말했다.
“저기··· 혹시 2장을 구매할 수 있을까요? 혹시 몰라서···”
쉬쉬하며 말했지만 오래도록 기다린 후발주자의 민감한 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대뜸 노성이 들렸다.
“아직 줄이 이렇게 긴데 혼자 두 개를 사겠다니! 뭐 하는 짓이야?!”
울화가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안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얼굴을 붉히더라도 다시 마주칠 일 없는 생판 남이 아니던가? 그냥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루면 나머지는 알 바 아니었다.
그때 점원이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유통사에서 절대 1인당 2장을 판매하지 말라는 공문이 왔었기에 2장은 구매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게 마지막이라서 애당초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헐! 마지막?’
안도의 등 뒤로 서늘한 땀이 흘러내린다. 체념한 채로 조금만 더 멍하니 있었다가는 드래곤 소울 타이틀을 구매하지 못할 뻔했던 것이다.
< 그래, 이거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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