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63화 (263/577)

< 그래, 이거야 >

“그 물음의 해답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버려진 지하 사당이라는 지역이 있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곳에는 강력한 보스 몬스터가 존재하는 겁니다. 이 보스의 특징은 온몸에서 강력한 불을 뿜어내는 것이지요. 석벽이나 튼튼한 방패에도 그을림을 남길 정도의 뜨거운 불을 말입니다.”

“그 보스 몬스터가 왕성을 공격한 놈이로군요!”

“보통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한 번 더 틀어줍시다. 다른 곳에서 한 번 더 흔적을 얻게 하는 겁니다. 어떤 흔적이냐면?”

PPT를 넘겨 다른 아이템 설명을 보여주었다.

「미쳐버린 왕의 주술서

지금은 사라진 옛 왕국의 주인이 익힌 주술.

강력한 화염 주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지만, 주술을 익히면 익힐수록 본래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종국에는 마물로 변해버린다.」

“엇!?”

“그럼 이전의 보스가 사실 기사들이 지키려 했던 왕인 겁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별로 특별한 스토리는 아닐 겁니다. 그러나 이걸 한 자리에서 알려주지 않고 파편처럼 여기저기에 단서를 뿌려두게 되면? 드래곤 소울만의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는 겁니다.”

힘을 추구하다가 타락해버리는 왕의 이야기는 정말로 흔해빠진 이야기다. 대신 중요한 건 풀어나가는 방식의 차이였다. 영리하게 꼬아서 게이머에게 전달하는 방식과 개념이 핵심이었다.

“회장님. 이렇게 되면 게임을 시작할 때의 설명 창이나 몇몇 NPC들을 제거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걸 원하시는 게 맞으십니까?”

이제야 안심이 된다. 내가 바라는 바를 저들이 제대로 이해했다. 그렇게 맞다고 대답하니 저들이 비로소 필요한 회의를 시작했다.

“너무 친절하지 말 것, 유저를 괴롭히고 불편하게 할 것?”

“파편이라면··· 이건 저희 개발자들보다는 아무래도···”

“기획에서부터 시나리오를 다시 쪼개야 할 것 같습니다.”

슬쩍 끼어서 한마디 거들었다.

“이제는 충분히 잘 해주실 수 있겠죠?”

“예, 회장님.”

“물론입니다! 다음 시험판이 나왔을 때에는 감탄을 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지적사항 알려드리지요.”

대성박력으로 대답한 뒤 힘차게 일어나려던 개발자들은 다시 머뭇머뭇했다.

“문제점이 아직도 남았었나요?”

“아니, 회장님은 딱 하루 플레이를 하셨는데··· 이런 게 그냥 다 보이십니까?”

다행히 지겹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냥 자신들에 대해 자책하는 투의 반응이었다. 이게 다 꿈속 미래라는 정답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애써 이야기해줄 필요는 없다. 적당히 웃어넘기기로 했다.

“보스 몬스터의 난이도를 낮추는 힌트. 그런 것들은 절대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효한 속성이라거나 아이템 같은 것 말이시죠?”

“그렇습니다.”

“그걸 알려주지 않으면 게이머들이 너무 금방 지치지 않을까요?”

“아예 알려주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예? 그게 무슨 말이신지···”

“불에 약한 보스가 있으면 그 보스가 있는 스테이지에서는 다른 곳에 비해서 기름병과 화염병을 많이 획득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독에 약한 보스 몬스터에게는 그 스테이지에서 독을 많이 얻게 하는 거지요. 이해하셨습니까?”

얼굴을 보니까 대답을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럼!

나는 손뼉을 쳐서 분위기를 환기했다.

“이제 일하러 갑시다.”

“예!”

완성을 위한 재출발의 시각이었다.

117. 그래, 이거야

드래곤 소울은 개발 완료 시기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진행된 상태였다. 아울러 현재 시기의 여타 게임과 비교하면 볼륨도 상당히 큰 편이었다. 그렇기에 전반적으로 손을 봐야 하는 이번 수정 작업은 예상보다 큰 규모로 진행됐다.

하지만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천릿길도 모두 오갈 수 있듯이 보름의 시간이 흘렀고 개발진들의 수고가 결실을 보는 때가 왔다.

“수정이 끝났습니다.”

김현우 팀장이 가지고 온 서류. 여기에는 새로운 시험판의 드래곤 소울이 함께 있었다.

“테스터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다들 호평입니다. 딱히 게임이 쉬워지지는 않았는데, 죽었을 때의 느낌이 전에는 ‘저걸 어떻게 이겨?’였다면 지금은 ‘아! 이렇게 하면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하더군요. 자연스럽게 도전의식이 생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최대의 난관이 나이고 내 입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야 자신들의 노고가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김현우 팀장의 눈빛은 사뭇 도전적이기까지 하다.

이번에는 자신 있다는 의미로 보였다. 나는 내심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좋군요. 그럼 저 역시 테스트를 해볼 테니 두고 가십시오.”

“네, 회장님.”

짐짓 무표정한 척, 근엄하게 말했으나 이런 내 얼굴은 김현우 팀장이 나가는 순간 바로 바뀌었다.

‘아자! 게임이다!’

천성적으로 나는 즐겁게 게임을 하는 게이머다. 그런 만큼 시험판 CD를 보는 순간부터 빨리 즐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내 입맛대로, 내가 요구한 대로의 모든 부분이 반영되어 있다지 않았던가.

얼른 해보고 싶었다.

“스타트!”

처음 시험판을 실행했을 때와 같은 오프닝 영상이 나왔다. 웅장한 OST는 다시 한번 이 게임의 세계관이 거대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했다.

“해외에서 녹음한 것도 아니라고 하던데 참 퀼리티가 높단 말이야.”

오케스트라도, 합창도 모조리 국내에서 섭외한 것이라고 들었다. 그런데도 클래식의 본토에서 녹음한 것과 크게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막귀인 걸까? 국내 클래식의 수준이 그만큼 뛰어난 걸까?’

내가 막귀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건 국내 클래식의 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것으로 대충 결론을 내렸다. 어찌 됐건 흡족하면 충분한 일이다.

‘이제 New Game을 선택하고.’

연이어 「아주 먼 고대···」로 시작하여 「너도··· 그렇게 될 것이다.」로 마무리 짓는 멘트를 감상했다. 여기까지는 초시 시험판과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손 볼 데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대신 그 이후부터는 변화가 보였다.

‘오호. 원작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도 아닌 데 정말 비슷해졌어.’

플레이어의 시작이 확실히 달라졌다.

기존의 시험판에서는 「북방의 수용소」라는 텍스트가 등장한 뒤, 아스테라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설명충으로까지 여겨질 만큼 친절하며 긴 문장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버전에는 아스테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감옥의 열쇠를 가진 간수의 시체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퀘스트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말을 거는 NPC의 부재. 이 정도만으로도 주인공이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느냐? 라는 방향감각을 잃게 됐다.

하지만 은연중에 느낄 것이다. 이 갇힌 공간인 감옥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좋아. 상황이 알려주는 데 굳이 설명을 덧붙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했군.’

이제 열쇠를 챙겨 감옥 바깥으로 나갔다.

익숙한 생김새의 망자들이 복도에서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안녕~ 친구들. 오랜만이야.”

허우적대는 모션은 여전하고 넝마를 걸친 망자들이었다.

‘여기는 바뀐 점은 전혀 없고.’

아무래도 여긴 굳이 손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아차. 아이템 설명을 확인 해 봐야지.’

일전에 짚어주었던 부분이 잘 적용되었는지 바로 읽어보았다.

「녹이 슬고 이가 빠진 짧은 검

마지막으로 손질한 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녹이 슬어버린 검.

군데군데 이빨마저도 나가 있는 검신을 보고 있노라면 무기의 주인이 긴 시간을 방치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무기로서의 가치는 낮아 보인다.」

아이템의 설명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할 단서를 주고 있었다.

첫째, 주인공이 꽤 오랜 시간 갇혀 있었다는 것.

둘째, 오랜 시간을 갇혀 있었음에도 의지를 잃지 않았을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

셋째, 의지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검을 방치했다는 것은 그의 상심이 대단히 컸다는 점을 암시한다.

물론, 이는 과도한 상상이며 지나친 분석일 수 있다. 하지만 드래곤 소울은 본래 꿈보다 해몽이 더 재미있는 게임이다. 다채로운 해석이 나오되 방향성을 유지하도록 적당한 키워드만 실어주면 된다.

나아가며 게임을 진행해보았다.

모닥불에 대한 팁이 나오던 위치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바닥에 불꽃의 일렁임과 같은 것으로 알 수 없는 문자가 만들어졌다.

「모닥불 : 회복」

추가 언급이 없는 담백한 글귀다. 정말이지 깔끔하고 간단한 설명이었다.

‘그래. 이래야 여유롭게 회복을 하고 뒤로 돌아갔다가 부활한 몬스터에게 멘붕을 당하지.’

아주 만족스럽다.

‘응? 전에 장비 주던 걔가 없어졌네?’

무기를 주던 잡몹이 있던 장소에 왔는데 이번에는 이 자리에 있었던 몬스터가 사라진 상태였다. 추측하건대 내가 짚어준 부분을 잘 활용했다면, 이런 식으로 방심을 유도한 뒤 갑자기 뒤에서 기습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짠··· 어라?”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네?”

그 대신이라고 할까. 바닥의 지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해골들이 잠시 뒤를 돌아봤던 사이에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무기도 안 주고 계속 잡몹이 나와? 이러면 불공평한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딱히 큰 불만은 없었다. 방어구 하나도 없이, 허접한 칼 하나만 들고 싸우는 중이지만, 싸움의 감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컨트롤로는 일가견이 있지 않던가.

과감하게 돌격이다.

“그런데··· 둘··· 셋? 어이, 왜 이렇게 많아? 야··· 잠깐! 잠깐! 아니 잠깐만! 야 기다려봐! 나 아직 물약도 받은 게 없다고!”

조금 더 조심성 있게 걸어가야 했는데 흥을 너무 냈나 보다. 실수하는 바람에 한 번에 셋을 상대해야 했고 얼른 고도로 집중해서 플레이하게 되었다. 드래곤 소울에서의 3대 1은 아무리 잡몹이라고 해도 처절한 혈투가 되기 때문이다.

“간신히 다 해치우기는 했네.”

전처럼 엄청나게 강력한 몬스터를 만난 것도 아닌데 이런 초반에 유다희 양을 만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렇게 세 마리의 해골을 잡아낸 것에 대한 보상이랄까?

조금 더 전진하니, 검이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아이템이 보였다.

‘저것만 있으면 3대 1이고 뭐고 두려워할 게 없지!’

밝은 빛을 보면서 신나게 캐릭터를 움직이던 중이었다. 나는 다가가다가 흠칫하고 뒤를 보았다. 눈에 띄는 곳에 아이템을 미끼로 두고 뒤에서 기습하는 형태를 내가 알려줬으니 이 함정에 걸려서야 곤란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수고는 헛되고 말았다.

“또 없네?”

뒤에서 기습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일단은 초반이니까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게 해주는 건가?’

극초반이니까 이런 선물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안심하는 그 순간.

드르륵-!

기관장치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졌다.

“헉?!”

아이템의 바로 앞 지점.

그곳에 밟으면 단두대가 떨어져 내려오는 함정의 스위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건 일반 플레이어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노리고 만든 트랩이군. 내가 방심하는 타이밍까지 최대한 기다렸다가 설치했어.’

< 그래, 이거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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