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62화 (262/577)

< 맛있게 매워야지 >

“기존에 즐기는 RPG처럼 마음 편하게 했다가는 죽는다는 걸 알려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절대로! 몬스터가 그냥 무지막지하게 강력하다는 방향이어서는 안 됩니다.”

단순하게 공격력과 방어력의 극심한 차이로 난도를 높이지 않은 채 최대한 게이머들을 속이고 기만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을 이만큼 보고서도 깨닫지 못하면 그건 얼간이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우리 개발자들은 초반의 감탄을 멈춘 채 저마다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지금 제가 보여드린 영상의 내용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하면 게이머를 골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에 집중하십시오.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넣는 겁니다. 게이머들은 몬스터에게 속고 당하며 괴로워하면서도 이 게임의 맛에 중독되게 될 겁니다. 죽음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줍시다.”

“예, 회장님!”

“회장님 덕분에 새로운 게임의 세계에 눈을 뜬 기분입니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지만, 차마 해보지 못했던 시도들을 전부 넣어서 새로이 돌아오겠습니다.”

처음과 완벽하게 달라진 얼굴이었다.

흡족하리만큼 마음에 든다. 그러나 우리 게임이 나가야 할 길은 고작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직 더 남았습니다.”

“네?”

“아직 수정해야 할 것들은 넘치니까 다시 앉아 주십시오.”

회의실의 스크린에는 새로운 영상이 올라왔다.

“질문을 다시금 드려야 할 시간이군요.”

이전처럼 드래곤 소울 애니메이션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PPT 화면이다.

“드래곤 소울의 주인공은 현재 게임 속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자초지종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최종 보스를 클리어했을 때를 가정해 봅시다. 이 시점에서의 주인공은 드래곤 소울 세계의 현재 상황을 제대로 알고 있겠습니까, 모르고 있겠습니까?”

물음에 뚜렷한 의도가 있음을 이해한 개발자들이 심사숙고한 뒤 대답했다.

“아무래도 다른 불사자들과 비교하면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했으니 어떤 상황인지 알고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렴풋한 정도이고 정확한 전후 사정 까지는 모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네?”

이어지는 말에 제작진들이 다시 어리바리한 얼굴을 한다.

“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엔딩까지 모든 모험을 마친 주인공마저도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그걸 일일이 다 설명해준다면? 과연 게이머들은 그것을 쉽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냥 이런 게임이구나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물론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깐깐한 게이머라면? 절대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훌륭한 세계관과 스토리를 짜놓고도 이류 스토리라인의 게임으로 끝이 날 것이다.

‘얼마나 세계관이 훌륭하고, 얼마나 스토리가 멋지냐보다 중요한 것은 이 스토리 진행이 얼마나 게이머들을 설득하느냐다.’

그런 관점에서 너무 난해한 드래곤 소울은 분명히 이류에서 끝이 날 게 뻔했다.

“절대 납득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재차 강조했다.

“다시 말씀드리지요. 납득하지 않는 소수! 그들까지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만 이 게임이 명작 반열에 들 겁니다.”

“어··· 그렇다면··· 엔딩까지 스토리를 더 명확하게 이어주고, 주인공이 그 모든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수정할까요?”

“아니죠. 그렇게 모든 이해가 쉽게 한다면 심심하고 흔해빠진 이류 RPG에 불과합니다.”

이내 개발자들의 얼굴은 ‘그럼 어쩌라는 겁니까?’ 등의 표정으로 변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확신에 찬 결단 아니겠는가.

미래의 성공에 기반하여 강력하게 주장했다.

“스토리 라인을 확실하게 숨깁시다. 아주 중요하고 굵직한 것만 알려주고 나머지는 퍼즐 조각처럼 게임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흩어 놓습니다. 어차피 주인공이 이해하기 힘든 세계라면 게이머들 역시 주인공과 함께 숨겨진 스토리를 찾아내도록 만드는 겁니다.”

“예?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단순 메인 스토리라인만 따라가서는 전혀 무슨 내용의 게임인지 알 수 없게 될 텐데요?”

“그걸 노리는 겁니다.”

“네?”

선뜻 받아들여지지는 않으나 어떻게든 이해하고 경청하려는 태도가 보였다.

“5년 전에 이 게임을 개발했다면 절대 이렇게 만들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게 우리 게임을 더욱 반석 위에 올려줄 수 있을 요소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인가요?”

다른 회사의 사람들이 이 회의를 보게 되면 참 이상한 회의라고 위화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회장이 앞에 나서서 ‘우리 게임의 수정 방향은 이러이러해야 합니다!’라며 개발자들을 설득하고 있으니 말이다.

통상적으로는 그 반대여야 옳은데, 우리 게이머스 포럼에는 이런 경우가 잦은 편이었다.

‘괜찮아. 우리가 성공하면 롤 모델은 곧 우리 회사가 될 뿐이니까.’

과정 따위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결실!

성공하면 그만이다. 더군다나 어느 쪽으로 가건 결국 제일 많이 돈을 버는 건 회장인 나 아니겠는가.

“인터넷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이머스 포럼의 성공으로 한국의 게임 잡지는 인터넷 매거진으로 완전히 방향을 돌렸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의 게이머스 포럼은 전 세계에 자리를 잡아가면서 게임에 대한 정보를 게이머들끼리 공유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드래곤 소울은 정보 공유 환경이 이루어졌을 때, 그 게임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형태가 될 거야.’

혼자는 어려우나 집단 지성이 더해지면 이야기는 매우 달라진다.

“누군가가 엔딩을 볼 때까지 플레이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게 왜 이렇게 끝나는 건지 모르겠는 겁니다. 그렇다면 알 때까지 게임을 플레이할까요?”

“일부는 그럴 수 있겠지만, 아마 대다수는 그렇게까지 플레이할 것 같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2회차, 3회차. 그 이상의 다회차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대다수의 유저는 1회차 혹은, 2회차까지만 하고 다음 게임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어떻게 호기심을 해결하려고 하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물어봐서 의문을 해소하려 하지는 않을지···?”

“정답입니다. 답답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주변이나 커뮤니티를 찾을 겁니다. 그리고 1의 정보를 찾은 사람, 2의 정보를 찾은 사람, 또 3의 정보를 찾은 사람들에 의해서 퍼즐 조각이 맞아 나가면서 의문이 해결이 되어갈 겁니다.”

자주 회자하면서 관심도가 커지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도움을 통해야만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게 과연 도움이 되겠습니까?”

“됩니다.”

시나리오만 보고 영화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듯, 아무리 괜찮은 기획이라고 해도 그것이 성공할지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실제로 드래곤 소울이 그런 방식으로 대박을 이루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의 활성화 때문에 게임은 점점 더 입소문을 타고 그토록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노력해서 찾아낸 것들이 게임 클리어 이외의 쾌감을 느끼게 해주지.’

하지만 무작정 ‘내가 장담한다! 그러니 따라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래서 설득력을 보강하고자 준비한 자료가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모든 설명은 이런 글이나 말보다 시청각 교육이 최고다.

“이제 화면에 집중하십시오. 두 가지 사진이 올라올 겁니다. 어떤 사진이 더 자극적인지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크린에 올라온 사진을 착착 올라왔다. 이를 본 개발자들은 빠르게 동공이 움직이고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들 나이도 먹을 만큼 드신 분들이 이런 걸 가지고 뭘 무안해하고 그러실까.’

스크린에 올라온 두 장의 사진은 다름 아닌 늘씬한 여성의 비키니 사진이었다.

하나는 흔히 볼 수 있는 좋은 모델의 아름다운 몸이었다. 다른 하나는 같은 비키니 위에 검은색 망사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대신 2번 사진의 비키니는 피부와 같은 톤이었다.

“어떤 사진이 더 자극적입니까?”

“······.”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바꿔서 물었다.

“1번 비키니가 더 자극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손을 들어보겠습니까?”

아무도 없었다.

“2번 비키니가 더 자극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몇몇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리려다가 주변 눈치를 보고는 슬그머니 다시 내렸다.

나는 내심 웃으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확실하게 합시다. 이 사진들은 여러분에게 무안을 주려고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모두 오늘 회의에서 중요한 내용이니까 설명을 위해 올린 겁니다. 그러니 손을 들지 않는 분은 드래곤 소울이 성공했을 때 받게 될 보너스를 절반씩만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나 돈에는 민감하기에, 다들 상여금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바뀌었다.

“그럼 다시! 1번, 손 드세요.”

1명이 올렸다. 크라비티의 창단멤버이자 나그네로크의 핵심 개발자였던 김현우 개발자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자기 혼자라는 사실에 당황해서는 급히 팔을 내렸다.

그는 대놓고 보여주는 타입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다음은 2번.”

나머지 전부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중에는 배신자도 한 명 끼어 있었다.

“어허. 현우 씨는 이미 1번에 손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은근슬쩍 여기도 끼어들려 하시면 안 됩니다.”

당황한 얼굴의 그를 보면서 개발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웃음이 가실 무렵 말을 이었다.

“대부분이 2번을 선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망사니까요?”

“아슬아슬하니까요?”

이제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누군가의 대답에 폭소가 터졌다.

“틀렸습니다. 2번이 더 자극적인 이유는 바로 상상력 때문입니다.”

인간의 감각은 생각보다 허점이 많다. 그리고 인간은 대부분 그런 허점을 상상력으로 커버하면서 사물을 판단하도록 진화해왔다.

검은색 망사와 그 속의 살 색 비키니는 그것을 보는 남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상력은 당연히 눈앞에 보이는 변하지 않는 사실보다 훨씬 자극적이다.

“우리는 게이머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문을 수호하는 기사를 죽였더니 방패를 드랍하였습니다. 그리고 게이머가 방패를 확인했을 때 방패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는 겁니다.”

「그을린 기사의 방패

무시무시한 무게만큼이나 강력한 방어력을 지닌 방패.

옛 왕가를 수호하는 기사들이 사용했던 방패로서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잃어버린 후에도 텅 비어버린 내성 앞을 굳건히 지켜내고 있다.

방패에 보이는 그을음은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 연상케 한다.」

“지금 보시는 텍스트와 이후 이어지는 설명은 일종의 예제입니다. 사용하셔도 좋고, 다른 것을 넣어도 좋습니다.”

“네.”

“텍스트와 기사의 위치만으로 이들의 충성심이 어느 정도인지 게이머는 알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내성 안에 있어야 할 왕 또는 왕족에 대한 이미지 역시도 가늠하게 됩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이제 성으로 들어갑니다. 내성에는 이미 죽은 것인지 그게 아니면 자신들만 빠져나간 것인지 모릅니다. 어찌 보면 꽤 오래 비워진 것도 같군요. 현재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불에 탄 흔적들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에 본래 있어야 할 주인. 기사들이 충성을 다하였던 존재들은 어디에 갔을까요?”

그야 당연한 말이지만, 알 수 없다. 이건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 내가 회의를 준비하면서 급조하여 만든 설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느끼는 바는 있을 것이다.

< 맛있게 매워야지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