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으로 뱉어라 >
115. 돈으로 뱉어라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뒷공작이 아니라 방송을 이용해서 대놓고 공격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모르고 맞아서인지 더욱 아픈 상대의 공격이었고 당황의 크기 역시도 더욱 컸다.
하지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이 정도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침착해.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만 말하면 돼.’
어차피 녹화 방송이다.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 온 방청객들이 많기는 하지만 일단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짚어놓고 차근차근 해결하면 대응이 어려울 것도 없었다.
문제는 에밀리의 대응이었다.
[그···]
수많은 방송용 카메라, 서슬 퍼런 심사위원들의 시선, 거기에 더해서 기대감 혹은 적대감을 가진 방청객들의 모든 눈빛.
무대에 대한 반응이 열광적이며 뜨거웠던 만큼 지금 느껴지는 차가움은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건···]
때문일까. 되지도 않는 질문에 오히려 크게 당황해버렸다.
[스틴 양. 사실 그대로만 말해주면 됩니다. 이게 그냥 의혹이라면 우리가 확실하게 해명을 해주고 넘어가는 게 좋아서 그래요.]
다 이해한다는 심사위원의 멘트를 들으며 나는 실감했다.
‘이 타이밍일 줄이야.’
한 방 먹었다. 다물고 있는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미래를 샅샅이 읽어내며 대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실수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대처를 잘하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하며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힌 뒤 나직하게 말했다.
“스티브.”
“예, 회장님.”
GF홀딩스의 소속으로 현재 에밀리의 활동을 지원하는 다를 돕기 위해 함께 온 직원이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사실상 외모는 백인에 가까웠지만, 한국적 문화를 많이 접해서 우리 회사에 딱 맞는 인재라고 할 수 있는 그에게 말했다.
“방송사 측에 강력하게 항의하십시오. 방송 중에, 그것도 이렇게 방청객도 있는 촬영 현장에서 저런 루머를 함부로 꺼내도 되는 거냐고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목소리에 담긴 내 감정을 느낀 것일까, 스티브가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후속 조치는 이 정도로 끝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문제가 되는 포인트는 뭘까?’
냉정하게 상황을 보기로 했다. 현재의 이 화제는 방송과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었다. 즉, 실제 방송으로 나가지는 않고 편집 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마리맥스에서 이런 수를 쓴 이유는 뭘까?
방청객을 통하여 퍼지는 루머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입소문은 때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진다.
게다가 의미심장한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옆의 심사위원은 물론이고 쇼를 진행하는 MC들이 이 상황을 막아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말리려 하지 않지. 이는 직접 나서지는 않더라도 가만히 있어야 할 정도의 언질은 받았다는 이야기야.’
빌어먹을 상황이다.
이 방송사는 공중파가 아니라 케이블이다. 심지어 케이블 중에서도 메이저급이 아니라 마이너들 사이에서 조금 두각을 나타내는 수준의 방송사였다. 그런 이들에게 우승자와 관련된 이슈는 무조건 호재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더욱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정이나 수습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본의 논리.’
연예인의 노이즈 마케팅과도 비슷했다.
흐름을 보건대 에밀리는 분명히 우승할 것이다. 이번 이슈를 굳이 최종경연까지 와서 밝혔기 때문이다.
‘드러나서 문제가 될 타이밍이 아니며 이미 우승자가 확정된 상황이지.’
에밀리가 점수를 받기 전에 했다면 모를까 이미 평가가 모두 끝난 뒤에 터트린 것은 우승은 안겨 주려는 속셈이다.
왜 그랬을까?
‘서로의 이익이 잘 맞았어. 마리맥스는 나와 에밀리를 엿먹이고 방송사 쪽은 더 큰 이슈가 될 수 있고.’
그리고 파트라이지 패밀리의 주연 배역은 다른 사람이 차지할 것이다. 이런 루머를 끌고 갈 수는 없다는 이유를 핑계로 대면서 말이다.
실로 저들만의 윈-윈 전략이고 잘 짜인 계획이며 대담한 함정이었다.
하지만, 몰랐을 때에야 한 방 맞았을 뿐이지 선방을 허용했으면서도 두 번, 세 번을 때려 맞을 만큼 나는 멍청하지 않다. 이제는 내가 반격할 턴이었다.
그즈음, 에밀리의 대답이 들렸다.
[사실이··· 아닙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말문이 막혔던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럼. 이런 소문은 왜 나게 된 걸까요? 스틴 양은 이유를 아시겠어요?]
청문회 하듯 채근하는 모습이다. 이를 보니 지금까지는 관심 없었던 심사위원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호비만 뒤끝 있는 줄 아나 본데, 나도 못잖다. 심사위원 블릿 스왈로스. 네 이름은 내가 꼭 기억해두마.’
대관절 무슨 보상을 약속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맹세한다. 그녀는 오늘의 선택을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GF의 윤 회장님과는 게임, 몬스터 프레데터스로 처음 만났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배우보다는 공부하기를 바랐고 그런 부모님을 설득하신 분이 바로 윤 회장님이죠. 이후, 윤 회장님은 제 평생의 멘토이자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하고 계세요.]
정신을 추스렸는지 그녀가 당황한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저는 늘 그분에게 의지하고 있으니까 이런 오해가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저를 그런 여자로 오해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분은 절대 그런 오해가 생겨선 안 되는 분입니다. 그런 것과는 조금도 연관이 없는 분이세요.]
[스틴양.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저는 지금 스틴양이 스스로 변호할 기회를 준 거랍니다. 윤회장님이라는 분은 그쪽 회사에서 알아서 하실 거고 스틴양은 자신을 변호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블릿 스왈로스가 막 말했을 무렵, 스티브를 통해서 한 항의가 먹힌 것일까.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요. 아무래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모든 의혹을 풀긴 어렵겠죠.]
진행자가 나서며 상황을 수습했다.
[이만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자 심사위원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어쩔 수 없겠다는 듯이 수긍했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인 모습들은 연출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끝을 맺으면 방송사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고 에밀리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추락하기 딱 좋은 상황이 된다.
‘일단 에밀리가 지금 이대로 기다렸다가 남은 일정을 소화하는 것에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수학 공식처럼 인간의 감정은 딱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에밀리에게 해 줄 수 있는 배려는 현재 이 정도가 전부였다.
“에밀리가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세요.”
스폰서. 그것도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방송에서 받은 질문이기에 어린 에밀리에게는 크나큰 충격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 예상보다 강인했던 모양이다.
[대장님. 저 계속할 거예요.]
에밀리는 끝까지 남아서 방송을 모두 소화하기를 원했다. 이로써 결국 최종 우승을 하는 것까지 모든 촬영을 마치고 방송사를 나왔다. 나는 그녀를 대견해 하는 한편, 걱정 가득한 그녀의 어머니에게 강직한 어조로 약속했다.
[저 믿으시죠? 모든 것이 다 잘되도록 해결할 테니 어머니께서는 최대한 에밀리를 달래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에밀리를 걱정할 단 한 사람. 그녀의 어머니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대체 방송에서 어떻게 그런··· 애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가늠도 되질 않아요.]
[지금 에밀리는 누구보다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할 겁니다. 일단 집으로 데려가셔서 인터넷이나 TV 모두 당분간은 보지 않도록 해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에밀리와 어머니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제 반격의 시간이다. 나는 GF홀딩스의 일부 직원을 사무실로 불렀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미리미리 준비해뒀던 카드들이 있죠?”
“네, 회장님.”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지금이 적당한 때인 것 같으니 한 번 제대로 사용해 봅시다.”
그 말에 곽지원 전무가 손을 들고 내게 발언권을 청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지금은 적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왜지요?”
“지금 우리가 가진 자료들은 마리맥스와의 싸움을 위해서 준비한 것들입니다.”
“그거야 잘 알고 있죠. 그러니까 지금 쓰자고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를 곤란하게 만든 곳은 파트라이지 패밀리의 제작진입니다.”
‘아!’
그의 말에 아차 싶었다. 이번 오디션에서 우리를 공격하도록 손을 쓴 집단은 어떻게 봐도 마리맥스가 분명하다. 그렇기에 나는 오직 마리맥스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원흉이 되었든 아니든 직접 문제를 만든 곳은 다른 곳이었다.
“지금 마리맥스의 문제를 터트리고 에밀리 양의 문제와 함께한다면 이슈를 한낱 해프닝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에밀리 양의 뒤로는 이번 의혹이 따라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군요.”
정확하며 타당한 지적이었기에 나는 실수를 바로 인정했다.
“단순히 마리맥스와의 싸움만 하기 보다는 마리맥스와 파트라이지 패밀리 제작진과의 밀접했던 관계를 잡아내야만 제대로 된 해결이 가능합니다.”
곽지원 전무의 말은 실로 옳았다. 그러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와도 같이 들렸다. 해내야 하고 해내면 좋지만 ‘누가, 어떻게’라는 요소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가능하겠습니까?”
“원래 모든 정보의 흐름은 돈과 함께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내 물음에 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GF홀딩스 미국법인의 직원들은 미국의 모든 자금 흐름을 파악하던 사람들이지요. 놈들이 가지고 있는 먼지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직한 모습이었다.
“좋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말고 샅샅이 조사해주세요.”
“네!”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곽지원 전무님.”
“네.”
“아마도 내일쯤부터는 인터넷을 통해서 엄청난 루머들이 돌아다니게 될 겁니다. 해당 자료 중에서 마리맥스와 연결이 되는 것들이 있는지 알아봐 주시고··· 또 한 가지.”
“말씀하십시오.”
한국이라면 언론을 막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미국이며 거대한 땅이다. 언론의 자유, 정보의 자유 등의 문제로 한국과 비교해 수십 배는 어려운 나라였다.
‘어차피 언론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오는 걸 막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막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반박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편이 나았다.
“언론에서 뭐라고 떠들어도 그게 사실인 양 퍼지지 않도록. 바로바로 반박기사를 내도록 합시다. 또한, 가장 먼저 그런 기사를 내는 언론사가 어디인지,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기사를 내는 언론사가 어디인지 파악하십시오.”
가장 빠르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기사를 내는 곳은 마리맥스와 연결이 되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파헤쳐서 엮어버릴 것이다.
< 돈으로 뱉어라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