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255화 (255/577)

< 낌새가... >

‘엄청 빡빡하네.’

그냥 가볍게 진행하는 오디션일 줄 알았는데, 서양 특유의 강한 멘트는 이 시절부터 이미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자유연기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예선임에도 대부분의 참가자는 노래를 불러보는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대부분 그 전에 멘탈이 수십 토막으로 썰려버렸다. 녹화방송인 만큼 너무 심한 것은 알아서 편집하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는지 표현 수위는 매우 과격했다.

‘거참. 이번 참가자는 꽤 괜찮았던 거 같은데도 잘라버리네.’

이쯤 되니까 슬슬 에밀리의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녀가 본래 이 오디션의 우승자였다고 하더라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보고 있을 즈음.

[다음 참가자는 엠마 스틴입니다!]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이번만큼은 그래도 제대로 된 참가자였으면 좋겠네요.]

[저도 벌써부터 지겨워지고 있어요. 이거 방송에 나갈 분량이 나오기는 하는 거예요?]

심사위원들은 에밀리가 등장하는 내내 따분한 얼굴로 하품까지 했다. 이 역시도 편집되어 잘 포장될 현장의 분위기였다.

[뭐 그래도 첫인상은 나쁘지 않네?]

[보자··· 그러니까 특기가··· 막춤?]

[막춤이 장기가 될 수 있어요?]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어이가 없다는 것으로 변해간다. 끼가 넘쳐나는 연예계에 무슨 이딴 것을 장기로 내세우냐? 이런 표정이다.

‘내가 장기로 내세우라고 했는데 아직은 시기상조였나?’

그런 나의 우려는 물론이고, 심사위원들의 의심을 뒤로한 채 에밀리의 자유 연기가 시작되었다.

[아니. 우리 마녀들은 자꾸 마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세상은 이미 과학이 가득해졌다고. 우리들도 변해야 해~ 과학과 마법이 함께 공존한다면 훨씬 더 멋진 일들을 이뤄낼 수 있을 거야!]

최초 탈락자인 크리스틴 베넷과 완전하게 동일한 대사다. 팬의 입장에서는 마냥 흐뭇하게만 보이는데 과연 깐깐한 저들의 눈에는 어땠을까?

[아. 드디어 배우다운 배우가 나왔네요.]

[그래. 이 정도는 해줘야 연기를 하러 온 사람이지.]

[그간 기본조차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았어요.]

다행하게도 끝났을 때의 반응과 표정은 정반대였다.

[벌써부터 너무 기대할 말씀들은 자제해주세요. 이 배역은 연기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노래도 잘 불러야 하니까.]

[그러게요. 프로필을 보니까··· 어릴 때 너무 많이 울어서 성대 결절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는데,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어요?]

성대 결절.

다들 성대 결절이 일어나면 노래를 도저히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착각을 많이 하는데, 물론 이것이 노래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기가 어려운 것은 맞지만,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항은 아니다.

‘에밀리 같은 경우는 그 덕분에 허스키한 보이스의 매력을 제대로 어필할 수 있지.’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단점이 되는 성대 결절이 에밀리에게는 커다란 장점이 된 셈이다.

[네 다정함에서 마법을 느낄 수가 있어~ 비단, 세틴, 가죽, 레이스 된 네 옷을 만질 때, 천사의 얼굴이 있는 검은 바지를 만질 때 네 마법을 느낄 수가 있어~]

이윽고 에밀리의 노래가 시작되었고, 심사위원 석은 그야말로 조용해졌다. 원래도 곧잘 노래하는 타입이었지만 스쿨 오브 밴드 촬영을 하는 동안에 영화사의 추천으로 보컬 레슨까지 꾸준히 받았다. 그렇게 가꿔진 자신의 실력을 지금 최대한 폭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 아. 스틴양?]

[네.]

[지금 나이가 몇 살이라고 했죠?]

[이제 곧 16살이 됩니다.]

[이야··· 제가 그 나이 때에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런 생각을 다시 하게 되네요. 도저히 그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감성이었습니다. 저는 합격입니다.]

[에이브에게 선수를 빼앗겼네요. 이런 인재를 합격시키지 않으면 대체 누가 본선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합격입니다.]

밝아지는 에밀리의 얼굴만큼이나 주변의 환호성과 박수가 커져간다. 조금 전까지만 보면 무작정 욕만 퍼붓는 성격파탄자들 같았는데 저런 멘트를 들으니 제법 인간다워 보였다.

그때 마지막 심사위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불합격입니다.]

달아오른 분위기를 일순간에 차갑게 만들어버리는 한 마디에 모두가 굳어진 얼굴로 ‘대체 왜? 불합격이야?’라는 눈빛을 쏘았다. 그 모습에 심사위원이 픽 웃었다.

[어차피 제가 불합격을 줘도 본선 행은 확실하니까 안심하고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노골적으로 노려보시지는 마시고요. 에밀리의 재능을 보니까 괜히 부럽고 셈이 나서 그냥 불합격을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불합격입니다.]

합격할 실력이라는 걸 인정하고 하는 말이다. 그냥 한국의 여느 방송들처럼 그냥 자극적인 것을 하나 끼워 넣기 위함인 것.

‘분량 만들기였군.’

방송을 아는 사람들 다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에밀리는 수많은 참가자들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예선에 합격하는 영예를 누렸다.

***

[옐로우몽키 답군. 애들 장난도 아니고 같잖은 짓을 했어.]

In Search of the New Fartridge Family가 방송으로 나가기도 전. 마리 맥스의 사장 호비 아인슈타인은 이미 자신의 정보망을 통해서 에밀리의 오디션 내용과 결과를 확인하고 있었다.

[엠마 스틴? 정말 얄팍해. 꼴랑 이름 하나 바꾸고 내가 몰라주기를 바랐다는 건가?]

[어떻게 할까요? 어차피 아직 편집도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또, 해당 방송사에 제 동기도 있어서 잘 이야기하면 탈락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일런트의 말에 호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오호라! 탈락을 시킨다니! 세상에 이런 멍청한 수를 쓰는 놈이 도대체 어떻게 내 밑에서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예? 그··· 그럼?]

[기왕 방송까지 나왔는데 방송 출연을 이용해서 놀아줘야지 않겠나.]

씩 웃으며 그가 말했다.

[제이에게 연락해.]

제이 아인슈타인.

호비의 동생이자 마리 맥스의 전무이사인 그는 호비의 변태적 행위가 완벽하게 꾸며질 수 있도록 지금까지 모든 것을 조종해온 존재였다.

[옙!]

호비가 그와 연락을 할 때는 정말 확실하게 상대를 압박하고 싶을 때 뿐이었다.

***

[드디어 파트라이지 패밀리의 공개 오디션이 끝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파트라이지 패밀리의 새로운 가족으로 뽑히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줄 배우들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과연! 이들 중에 이 영예로운 가족이 될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느덧, 파트라이지 패밀리의 최종경연까지 달려왔고, 에밀리는 당당히 전체 평가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마지막 오디션을 시작합니다!]

[이번 참가자는 우리 프로의 최고 이슈라고 할 수 있죠?]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단 하나의 경연도 빼놓지 않고 계속해서 최고점을 받아왔죠. 덕분에 인터넷에는 이미 이 참가자의 우승은 이미 정해져 있고 다른 배역을 차지할 참가자가 누구냐?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과연 얼마나 대단한 무대를 보여줄지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그럼 화제의 참가자를 모셔보겠습니다!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엠마 스틴!]

사실상 미국에서는 M이 두 개가 붙었을 때는 둘 다 발음하지 않아서 엠마보다는 에마라는 표현이 맞았다. 그렇지만··· 알게 뭔가? 우리에게 익숙한 건 엠마인데 말이다.

‘게다가 에마라는 건 한국에서 영 좋지 못한 발음이라고.’

이러나저러나 에밀리의 경연곡 전주가 무대에서부터 객석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서 무대 위로 올라왔다.

에밀리의 무대를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이 경연은 혼자하는 게 아니고 듀엣이었지?]

[어. 중간에 같이 부르는 참가자가 올라올 거야.]

[우와··· 지금 이걸 이어받아야 해? 누구야? 불쌍해서 어떡하냐?]

누군가는 자신이 응원하는 참가자가 에밀리 때문에 떨어질 것을 걱정했고, 또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는 에밀리를 보면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에밀리와 함께 이번 곡을 부르게 될 참가자에게 애도를 표했다.

[아니. 연기도 잭폿, 노래도 잭폿··· 이런 능력자가 뭐가 아쉬워서 공개오디션까지 참가를 하냐?]

[능력 있으면 다 써주냐?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일단 인지도가 생겨야 뭘 할 거 아냐.]

[맞아. 여기서 우승하면 배역도 따고, 인지도도 생길 텐데 이걸 포기하면 그게 얼간이 아니냐?]

[그러네?]

게임 오버다. 에밀리의 무대를 보는 사람들은 이번 경연에서도 그녀가 최고 점수를 따낼 것이라는 점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듀엣을 부르는 여성의 얼굴을 보고는 뜨거운 반응이 올라왔다.

[알레시!]

[오오! 알레시랑 엠마의 듀엣이야? 우승 후보와 준우승 후보라니!]

[이거 방송사에서 그냥 몰아주는 거 아니냐?]

파트라이지 패밀리의 오디션에서 뽑는 배역은 총 3개다. 그리고 알레시는 에밀리와는 다른 배역에 지원자이면서 에밀리에 이은 유력한 준우승 후보였다.

[더 볼 것도 없어. 이 둘이 붙었으면 끝났다고.]

[에밀리와 함께해서 애도를 표해야 할 게 아니라 그냥 다른 듀엣들에게 기회가 없다는 것에 애도를 표해야겠어.]

이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에 환호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이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맥이 빠져버렸다.

이 점이 이상했다.

‘이렇게 되면 역전이라는 게 불가능한 조합인데, 방송사 입장에서는 매우 불리한 조건 아닌가?’

공개 오디션이라는 건 이슈와 함께 이어질 시청률이 중요하다. 그 때문에 본선에 이르고 부터는 무대가 끝남과 동시에 모든 점수를 알려주지 않는다. 일종의 블라인드 방식으로 모든 무대를 보인 뒤에 미리 입력했던 점수가 공개되는 형식이다.

‘그런데 그 점수가 보나마나라면? 그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지금 이 방송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내가 생각한 것을 생각 못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뭔가가 있어.’

이 상황을 반전시킬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이런 과감한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골똘히 생각하는 가운데 열화와 같은 호응과 무대가 이어졌다.

[맙소사! 놀랍습니다! 이런 완벽한 무대를 이토록 어린 친구들이 보여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말이죠.]

[이건 정말이지··· 제가 심사위원만 아니었다면 무대 앞에서 환호를 지르면서 보고 싶은 공연이었습니다.]

[이번 공연은 이 방송사의 역사에 길이 남을 공연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두 사람과 평생 함께할 무대로 남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는 뭐 그냥 할 말이 없네요.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죠?]

심사위원들의 적극적인 칭찬이 두 사람을 향했다. 그리고는 먼저 알레시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다.

‘그냥 시간 끌기 내용들이네.’

보는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기 위한 사설 타임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더해서 혹시 모를 분량이 만들어지면 더 좋은 일인 그런 것.

[그럼. 이번에는 스틴양에게 질문할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심사위원이 미소 지었다.

[이 질문이 꽤 예민한 문제가 될 수는 있는데, 지금 방송사로 제보가 들어왔다 보니까··· 아시죠? 다음 시트콤에 배우로 활동해야 하는데, 문제의 요지가 있을 거라면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거?]

조금 전, 마치 칭찬이라는 것처럼 ‘저는 뭐 그냥 할 말이 없네요.’라고 그 심사위원이었다. 하지만 느낌이 왠지 싸늘했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사실대로 대답해주시면 돼요.]

[네.]

두근두근-.

심사위원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서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엠마 스틴. 이전에 사용하던 이름은 라일리 스틴으로 스쿨 오브 밴드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연기를 했던 배우. 하지만 이 배우가 이런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GF그룹의 오너와 모종의 스폰서십을 맺었기 때문이다.]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이런 내용의 제보가 들어왔어요. 어떤가요? 사실인가요?]

< 낌새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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