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낌새가... >
따지자면 에밀리의 연령대에서 출연 가능한 작품이 한 가지 존재하기는 한다. 단, 이건 성인 등급의 드라마였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이 드라마는 한국에서도 꽤 인지도가 높았으니 미국뿐 아니라 더 멀리 이름과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성인 등급에 맞게 수위도 만만치 않고 주연들은 하층민에 골칫덩어리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배역이 성장기의 청소년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리 있겠는가.
‘에밀리의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 이런 드라마는 안 하느니만 못해.’
팬으로서 그녀의 가치를 높게 두었기에 하는 생각일 뿐, 드라마에 출연하게 될 배우들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었다.
‘무인도 생존이나, 얀투라지 같은 건 나이가 안 돼서 못하고.’
기회의 땅이고 할 수 있는 게 무한정 존재할 것 같은 거대한 미국이지만, 욕심이 너무 큰 것일까? 눈에 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심하는 나를 보고 곽지원 전무가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 둘 다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면 TV 쇼 프로그램 같은 것은 어떻겠습니까?”
‘쇼 프로그램? 예능방송?’
배우의 커리어만 보느라 이쪽 분야를 깜빡했다. 걱정거리는 이제 갓 영화 한 편에 출연한 아역을 누가 쓰겠느냐는 거였는데 의외로 그간의 고민이 무색하리만큼 이쪽에서 답이 금방 나왔다.
‘있었어. In Search of the New Fartridge Family.’
본래 에밀리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리얼리티 쇼다. 본래 70년대에 크게 유행했었던 Fartridge Family라는 시트콤을 리메이크하기로 하면서 해당 시트콤에 출연할 배우를 공개 오디션을 통해서 발굴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딱! 소리가 날 만큼 핑거 스냅을 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이 오디션이 가진 최고의 장점!
‘시트콤이 파일럿 방송 이후로 제작중단 되었다는 것이지.’
방송의 제작 중단이 어째서 장점이 되는 걸까? 그것은 오디션으로 충분히 인지도를 만든 채로 이후에는 자유롭게 다른 작품을 골라서 출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에밀리의 인지도가 더 생긴다면 노려볼 만한 영화가 있다.
‘슈퍼히어로물이었는데 제목이 스카이 로우였었던가?’
미국에서 유행하는 작품으로서 대중적인 시선에 맞춰진 영화가 아니라 디지니에서 순수하게 아이를 대상으로 제작한 영화였다. 그렇기에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지는 못했지만, 미국 내에서는 제법 흥행했던 작품이다.
거기에 디지니의 가장 큰 장점이 더해진다. 자체 케이블 방송을 통해서 꾸준히 상영된다는 것이었다.
“좋은 지적이었습니다. 리얼리티 쇼. 그중에서 배우가 출연할 수 있는 쇼를 알아봐 주세요.”
“예, 회장님.”
우리 회사는 연예계에 직접 발을 담그지 않았다. 그러나 폭넓은 분야에 투자하며 돈의 흐름과 미국 금융가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줄을 쥔만큼 영향력이 막대하고 우리는 그간의 인맥과 약간의 돈을 사용하여 해당 쇼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를 들고 나는 에밀리를 찾아갔다.
[영화에 출연하는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야. 하지만 영화라는 건 생각보다 인지도를 높이는 것에 크게 유리한 매체가 아니란다.]
당장은 영화가 아니라 TV를 통해서 얼굴을 알리자는 내 말을 듣고 에밀리가 되물었다.
[왜요? 영화배우들은 엄청 유명하잖아요. TV 배우들과 비교해도 훨씬 유명한데?]
따지고 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영화만큼 크게 성공했을 때, 한 방에 인지도를 쌓을 수 있는 매체는 없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는 크게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다.
성공의 기준을 미국으로 따지면 흥행수익 5억 달러 이상이 된다. 이를 한국 기준으로 말하면 최소 600만 관객 이상의 흥행몰이를 하였을 때와도 같았다.
‘그냥 네가 출연해서 성공할 영화가 없어.’
솔직하게 대답하면 이렇게 되지만 인간이 항상 정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유명 영화배우들이 지금의 위치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그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예쁘게 포장해서 말해주었다.
[당장은 영화가 더 멋있고 폼이 난다고 생각되겠지만 더 도움이 되는 건 TV 프로그램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그녀가 알 필요 없는 어른들의 사정은 쏙 뺐다. 아직 마리맥스를 처리할 준비를 마치지 못해서 지금 괜히 영화판으로 갔다가 난장판이 된다면 수습이 어려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살짝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완전히 내 말을 받아들인 표정은 아니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자신에게 확실히 유리한 방향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으니, 그럭저럭 따라주는 것이다.
분위기를 바꿀 겸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그럼 에밀리가 이번에 어떤 프로에 출연해야 하는지를 알려줘야겠지?]
[어떤 프로인데요?]
현재 기획 중인 오디션 프로그램의 상세한 정보가 담긴 서류를 에밀리의 앞에 내려놓았다.
「In Search of the New Fartridge Family.」
[이게 뭐예요? 새로운 파트라이지 패밀리··· 그 파트라이즈 패밀리요?]
[어? 이걸 알아?]
무려 70년대의 시트콤이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잘 모르는 게 아니라 미국인이었다고 해도 이 시트콤은 그냥 과거의 영광으로 이름이나 들어봤을 그런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런 작품을 나보다도 한참 어린 에밀리가 알고 있다니?
[그럼요! 아빠가 엄청 좋아하셨던 거라서 잘 알아요! 그래서 저도 엄청 좋아했던 시트콤인데!]
‘아참. 그러고 보니 원래는 혼자서 이 프로그램에 참가할 준비를 해서 우승까지 했었지?’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우승은 그 실력만으로 하게 된 것이 아닐 것이다. 애초에 이 고전 시트콤을 좋아했으니 가능했던 일이었나 보다.
[이거 대사도 엄청 많이 알아요!]
[그··· 그래?]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영화 대신 TV를 선택한다는 것에 시무룩했던 그녀가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이 나서 이상하고 기괴한 동작으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오오! 엠마 스틴의 전매특허인 막춤! 그 최초 버전을 보는 거구나!’
그간 지켜본 에밀리는 미래의 매체에서 봐왔던 것과 달리 춤에도 꽤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워낙 웃긴 것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인지 그녀는 절대로 춤을 예쁘게 추지 않았다. 무언가 수수깡처럼 부자연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연출을 좋아했다.
‘이런 모습 덕분에 결국 2010년대에 가장 사랑스러운 여성의 타이틀을 차지한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래. 그렇게 좋아하면 준비하는 건 재미있겠구나. 오디션에서 뺄 기운 여기서 다 빼지 말고 일단은 좀 앉으렴.]
[아! 네!]
[이건 그냥 순수한 오디션이야. 연습이야 원한다면 최고의 선생님들을 모셔다드릴 수 있지만, 예선부터 본선까지 그 오디션의 과정은 에밀리가 직접 해야만 해. 잘할 수 있지?]
[물론이죠!]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래. 원래도 도움 없이 스스로 우승을 했을 운명이니까 더 확인할 것도 없이 잘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그러나 그 전에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에밀리.]
[네?]
조금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내자. 에밀리가 내 눈치를 조심스럽게 보면서 대답을 한다.
[지금 라일리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있잖아?]
[네.]
[그 이름은 마음에 들어?]
[어··· 그게··· 좀···]
[왜?]
[촬영하는 중간 중간에 사람들이 절 부르는데, 자꾸 절 부르는 건 줄을 몰라서 놓치고 그랬던 거 있죠?]
그래. 그럴 거다. 이 이름이 자신과 맞았다면 내가 알고 있는 이름도 엠마가 아니라 라일리여야 했겠지. 그래서 미래의 그녀와 잘 맞아떨어지는 조각 하나를 내가 알려주었다.
[내 생각에는 말이지. 오디션에 나가기 전에 이름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떤 이름으로요?]
[엠마 스틴.]
***
오디션을 준비하는 과정은 스쿨 오브 밴드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짜맞춰준 플랜 안에서 에밀리가 자신의 재능을 일깨웠다면 이번에는 내가 할 것이 별로 없었다.
‘이걸 떨어뜨리면 심사위원들 눈깔이 동태눈인 거지.’
걱정해줄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건 무조건 된다.
‘심각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딱 하나. 외부의 간섭을 예의 주시하는 채로 기대감을 품고 지켜보았다.
[첫 번째로 보여드릴 후보는 크리스틴 베넷입니다~!]
오디션에서 MC의 소개와 함께 VCR을 통해 크리스틴 베넷의 모습이 나왔다. 그냥 간단하게 자신의 소개와 특기 같은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미시간주에서 온 크리스틴 베넷입니다. 저는 다양한 것들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암벽등반을 사랑합니다. 최고의 장소까지 올라갔을 때의 성취감은 올라와 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죠.]
가수의 재능을 겸비한 연기자를 뽑는 오디션에서 굳이 암벽 등반을 자랑한다?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다. 한국이었다면 저건 마이너스 요인이지 결코 긍정적인 점수를 얻을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미국에서는 달랐다. 여성의 건강미에 환호성을 보냈고 간단한 소개영상이 끝나자 무대에 크리스틴 베넷이 올라왔다.
[좋아요. 베넷 양. 오늘 어떤 것을 준비했죠?]
[마녀 사브리나에서의 사브리나와 크리스틴의 fight를 준비했습니다.]
[베넷 양이 보여줄 사브리나!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에밀리랑 같은 걸 준비했네.’
하필이면 맨 처음 오디션을 보는 사람이 준비한 연기와 에밀리가 준비한 연기가 같았다.
‘가장 최근에 끝난 시트콤이다 이건가?’
마녀 사브리나는 종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트콤이다. 또한 에밀리 또래에게 인기가 있었으니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무려 시즌 7까지 나왔으니, 그 인기가 얼마나 컸는지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너무 잘하면 어쩌지?’
혹시라도 에밀리에게 안 좋은 영향이라도 끼칠까 노파심에 걱정하는 그때.
[아니. 우리 마녀들은 자꾸 마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세상은 이미 과학이 가득해졌다고!]
나는 베넷의 압도적인 연기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들도 변해야 해! 과학과 마법이 함께 공존한다면 훨씬 더 멋진 일들을 이뤄낼 수 있을 거야!]
‘저런 실력이라니··· 이건 미쳤어.’
오디션을 직접 관람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그만큼 지금 크리스틴 베넷이라는 여자의 연기는 그야말로 정신 나간 수준이었다.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오오! 세상에! 맙소사!]
[베넷 양.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오디션을 보러 온 건지 모르겠군요. 당신은··· 아아!]
[아니. 연기를 하면서 왜 이렇게 몸을 건들건들 거려요?]
[연기에 성의도 없고, 감정도 없고!]
[로봇에게 시켜도 이거보다는 잘하겠군.]
미쳤는데 잘 한 쪽이 아니라 정 반대였다. 나조차 눈을 가릴 정도였으니 전문가의 시선에는 오죽 참혹했겠는가. 문화차이를 느끼는 한 마디인 미국 답게 심하다 싶을 정도의 혹평이 퍼부어졌고 심사위원들의 강한 멘트들에 크리스틴 베넷은 울면서 무대를 뛰쳐나가버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연민은 없었다.
[연기를 하려면 이보다 더한 소리도 참아가면서 해야 하는데, 고작 이 정도로 울면서 뛰쳐나가네요.]
[저럴 거라면 실력이 좋더라도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살벌하네. 프로페셔널들이란.’
그렇게 시작부터 살벌한 멘트와 함께 수많은 참가자들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 낌새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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